EP.67
간절히 유료 기도하면 우주가…아니 사랑의 여신이 소원을 들어준다!
그것도 지금 딱 필요한 고오오급 장비로!
내가 생각해도 참 빈약한 변명이다. 이런 걸 누가 믿겠는가. 그저 수상쩍지만 우리 사이니까 한번 덮어주겠다.
딱 이 정도를 노리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음음. 요나 님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
…이걸 믿어?
혹시나 싶어 카렌의 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으로 나를 향해 경건히 기도를 올리는 카렌. 진심으로 나라면 가능할 거라는 확신이 팍팍 전해진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단심문관의 절대적인 지지에 엘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나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저번에 봤을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
“아하하.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어쩌다 보니가 말이 되니?”
어이없어하며 한숨을 내쉬는 엘리.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마치 불안하다는 것처럼.
갑자기 이러는 걸 보아 전투가 불안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갑자기 내가 예전과 달라 보이니 당황스러운 거겠지. 어딘가로 가버릴 것 같기도 하고.
여기서는 조금 안심시켜 줄 필요가 있겠네.
무언가 말하려 하나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는 엘리의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저는 엘리가 아는 돈도 없고 집도 없고 힘도 없지만 얼굴 하나는 자신 있는 발랑까진 꼬맹이 그대로랍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냐.”
“그런 거예요.”
단호한 대답. 엘리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조금 묘했다. 어쩌면 내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변하는 걸 두려워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좀 더 근본적이고 본능적인…그래. 마치 자기 죄를 마주한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우리 사이에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건 분명 엘리가 아닌 나일 텐데 말이지. 당장 이번 일도 내가 억지 부린 거고.
하지만 이제부터 싸우러 가는데 언제까지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는 없잖은가.
애써 빵긋 웃으며 에의 전신 슈트 차림을 핥듯이 훑어보았다.
“엘리. 뭔가요 그 야한 옷은. 저를 유혹하는 건가요?”
“뭐? 야한…? 유혹…?”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멍하니 되묻는 엘리. 그런 그녀의 선명한 복근을 챱챱 두드리며 말했다.
“안 되겠다. 나중에 이 옷 입고 제 방으로 따라오세요!”
“하! 요나 네가 오라고 한 거다? 내가 못 할 줄 알아?”
“네? 전 한 번도 말린 적 없는데 왜 갑자기 센 척을…?”
“…시끄러! 아무튼 이것도 전부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고의 이야기니까 조심해. 어떻게 얻었는지는 깊게 묻지 않겠지만 새 장비 얻었다고 써볼 생각에 무리하다가 다치는 얼간이를 한둘 본 게 아니거든.”
“에이. 리디아 님에 카렌 심문관님. 거기에 엘리까지 있는데 별일 있겠어요? …그래도 약속한 대로 숨어있을게요. 여차하면 그대로 도망치구요.”
“응. 그걸로 됐어.”
한쪽 팔로 내 머리를 통통 두드린 엘리가 몸을 쭈욱 펴며 기지개를 켰다.
육식 짐승 특유의 날렵하면서도 유연한 근육이 눈앞에서 꿈틀거린다.
“읏샤! 오랜만에 실전이네. 리디아. 발목 잡으면 안 된다?”
“은퇴한 지 몇 년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엘리 선배야말로 뒤처지지 마.”
서로 히죽이며 시선을 교환한 둘이 앞장서서 요정과 은화를 나섰다. 나와 카렌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뒤따라갔다.
이단 놈들을 조질 시간이다.
***
약속대로 나와 엘리와 리디아가 먼저 입장했다. 평소에는 리디아와 함께 가던 내가 오늘은 엘리에게도 성과를 보여주겠다는 것처럼 잔뜩 들뜬 모습을 가장해서.
그렇게 약속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저 멀리서 카렌이 피로와 기묘한 열기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로 다가왔다.
“늦지 않게 잘 오셨네요. 추적은 없었나요?”
“물론입니다. 혹시 몰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따라붙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여신께서 직접 계획하신 일에 어떤 방해가 있겠습니까.”
“…그으. 일단 사랑의 여신께서는 미궁을 안정시키느라 지상에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건 아시죠?”
“예에. 그래서 대리자이신 요나 님을 보낸 것 아닙니까.”
“….”
카렌의 눈에 담긴 열기가 더욱 거세졌다. 여전히 눈가는 피로에 절었다는 점에서 살짝 무서울 정도의 맹신.
정말 이게 맞나? 숨어서 여신의 뜻을 대행하는 성자(아님)루트 이대로 개방해도 되는 건가?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긴 하다. 이제와서 ‘전부 구라였어용.’ 같은 소리 했다가는 내가 성자를 사칭한 이단으로 찍혀서 카렌한테 반토막이 날지도 모르니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죄책감이랄까 책임감이랄까. 그런 게 느껴진단 말이지.
하여 슬쩍 아공간에 처박아 둔 여신상을 한 손으로 만지작대며 속으로 물었다.
‘이대로 가도 됨?’
여신상은 여전히 말랑쫀득따끈했다. 허락의 의미가 분명하다.
당사자와 합의도 원활하게 마쳤으니 이제 거리낄 필요는 없겠지.
체내에 새끼손톱 크기의 신성력이 자리 잡고 있긴 하지만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는 상황. 일단 어제 질리게 본 여신상의 자애로운 미소를 최대한 따라 해 보았다.
“하지만 저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답니다. 저를 도와주시겠나요 카렌 심문관님?”
“제 힘이 다하는 그날까지. 이 신앙이 다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훌륭해요. 그럼 바로 안내를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맡겨주십시오.”
의욕이 가득한 표정으로 앞장서는 카렌. 그 모습을 오들오들 떨며 지켜보던 리디아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보던 엘리가 양옆에 나란히 서서 작게 물었다.
“요나. 솔직히 말해. 진짜 성자야?”
“마 맞아 요나야.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살짝! 살짝만 귀띔해 주면 안 될까?”
아니 왜 이렇게 진지한데 둘 다. 순진하다면 순진한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이래저래 사랑의 여신께 총애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게 무상의 사랑은 아니거든요. …무엇보다 제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자신이 없구요.”
“….”
“….”
그렇게 궁금해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입을 꾸욱 다문 엘리와 리디아. 그런 둘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두 분을 향한 제 마음은 무상이랍니다. 두 분이 저를 무상으로 도와주는 것처럼 말이죠!”
“…글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빚을 갚는 것뿐일 수도 있지.”
“요나는 나한테 빚을 졌잖아. 전부 갚기 전까지는 놔줄 생각 없어.”
피식 웃으며 카렌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 둘. 그렇게 얼마나 대수림 속을 누비고 다녔을까.
일부러 사람이 없는 외곽에서 만난 탓에 가장 깊숙한 중심부인 세계수의 환영 앞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아직 미궁이 한차례 뒤섞이기 이전이라 그런지 한번 가본 카렌과 헤매지 않는 길 찾기 스킬의 도움을 받는 내가 나선 덕에 길을 잃는 일은 없었지만.
대수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던 거대한 나무. 하늘을 뒤덮는 수준을 넘어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웅장함에 순간 말문을 잃었다.
“이게 세계수….”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제가 황혼을 삼키는 자와 조우했던 장소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조심 가도록 하죠.”
나는 소리를 먹는 발걸음을 이용해서. 다른 이들은 자신만의 특수한 요령이나 마도구를 이용해 기척을 죽인 채 천천히 세계수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 몸체가 아닌 벽처럼 보이는 세계수. 물론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니 손을 대면 그대로 통과해 버리겠지만…그럼에도 이 자리에 무언가 있다는 듯 세계수의 주변에는 탁 트인 평야가 있었다.
그리고 그 평야에는 척 봐도 수상쩍은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이 있었다.
분명 옷은 평범한 색상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놈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신성력을 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얼핏 보인 것이지만 심장 부근에 붉은 하트 표식이 새겨져 있었으니.
이는 사랑의 여신에게 자신의 심장을…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광신의 표식으로 놈들은 의심 여지가 없는 황혼을 삼키는 자들이리라.
주변에 널브러진 채 썩어가는 몬스터의 사체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있으니 그 꼴이 참 기괴하기 짝이 없네.
그나마 다행인 건 일전에 카렌과 이안이 깽판을 쳐둔 덕에 머릿수가 생각보다 적다는 점?
그 중심에는 카렌이 말했던 이상할 정도로 작은 체구를 지녔지만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강렬한 신성력을 지닌 광신도가 하나 있었다.
일그러진 신성력이 겉으로 새어 나오는 걸 넘어 힘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걸 보아 숨길 생각이 없거나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척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녀석이지만…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세계수 앞에서 몬스터나 잡고 있길래 한참은 걸릴 줄 알았는데…겨우 하루 만에 올바른 방법을 찾아낼 줄이야.
원을 그리듯 둥글게 선 황혼을 삼키는 자. 그 중심에는 꽁꽁 묶여있는 사람이 둘 있었다.
다른 종족도 아니고 생전의 세계수가 그렇게나 지키고 싶어 했던 엘프가 이번 제물이겠지.
그리고 이는 정답이다.
“이렇게 빨리 소환 방법을 찾아낼 줄은 몰랐는데.”
초조한 마음에 이를 악무는 것도 잠시. 어째서인지 묶여있는 엘프 둘의 얼굴이 낯익었다.
“…레몬? 애플?”
아니 저년들은 왜 또 잡혀있는 거야?
꽁꽁 묶이고 싶어서 미궁 들어오는 거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묶이는게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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