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8
1층의 계층 수호자. 뭐가 나오는지는 몰라도 녀석을 소환하는 방법은 알고 있다.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내용이니 나름 신경 썼기 때문.
제대로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니 대충 요약하자면….
산제물의 의식이다.
대수림의 주민…이 경우에는 1층의 모든 몬스터 그리고 엘프겠지. 그들을 세계수의 앞에서 필요한 양만큼 학살해 그 시체를 늘어놓는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세계수를 향해 간절한 복수심을 품고 힘을 내려달라 기도하면 그걸로 끝.
얼핏 보면 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간단한 일 같지만 세세히 따져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굳이 몬스터를 세계수의 앞까지 끌고 와서 굳이 마석도 뽑지 않고 시체를 늘어놓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짐 덩어리를 멀리까지 끌고 오느니 그냥 그 자리에서 도축해서 마석과 부산물만 챙기고 말지.
거기에 세계수를 향한 기도? 미궁의 초창기 아직 세계수 신앙을 저버리지 못한 엘프들이 있을 때면 모를까 요즘은 엘프 중에 진심으로 세계수를 믿는 사람은 없다.
기껏해야 옛날 옛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이어온 이브 정도려나?
반대로 말하면 먼 과거에는 진심으로 세계수를 믿는 엘프들이 꽤 있었다는 뜻이지만….
그들이 세계수에 바란 것은 세계수의 부활이었다.
어미 잃은 아이가 한탄하듯 그저 슬퍼하고 다시 돌아와달라고 애원하는 것.
그것이 당시의 엘프가 가진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괜히 종족 단위 우울증이 발생했던 게 아니란 말이지.
미궁화 되며 대수림의 주민에 관한 정의가 꼬이고 세계수를 향한 엘프의 마음이 세계수의 생각보다 훨씬 애틋했던 탓에 간단하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서는 진심으로 세계수를 믿는 사람이 사라져 사실상 달성이 불가능해진 일.
내가 쓰려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엘프 파티에 짐꾼으로 들어갔더니 몬스터를 끌고 온 약탈자에게 전멸당하는 식으로 쓸 예정이었다.
남녀역전이란 인식의 차이를 즐기는 소재. 시체 더미 사이에 숨어 간신히 살아남은 주인공은 나처럼 지구에서 빙의한 인물이었고.
상식이 부족해 세계수가 이미 죽은 신인줄도 모르고 진심으로 기도했더니 얼떨결에 소환 조건을 만족한 것.
그렇게 소환된 계층 수호자는 이기긴 했지만 잔뜩 지친 약탈자를 전부 죽이고 주인공은 상처 입은 수호자를 쓰러뜨리며 권능을 얻는다…같은 느낌?
뭐 내 경우에는 엘프 시체를 사 와서 써먹을 생각이었지만.
수많은 종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장수종인 엘프는 그 자체로 가치가 뛰어난 종족.
이를 잘 아는 엘프 중 일부는 자신의 시체를 팔아 유산으로 써먹으라는 유언을 남기곤 하거든.
물론 엘프 사이에서도 독한 놈 취급 받긴 하지만…어쨌든 합법적으로 구할 루트가 있다는 게 어디인가.
아무튼 이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한 조건을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아챈 건지.
카렌을 따라 도착한 세계수의 환영 앞. 그곳에는 황혼을 삼키는 자가 무수한 몬스터의 시체 사이에서 원을 그리며 둥글게 서 있었다.
그 원의 중심에는 이제 곧 몬스터들과 같은 신세가 될 엘프가 둘 있었는데…어쩐지 그 둘의 얼굴이 낯익었다.
“…레몬? 애플?”
아니 저년들은 왜 또 잡혀있는 거야?
꽁꽁 묶이고 싶어서 미궁 들어오는 거야?? 속박이 취미야??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달려들 각을 재고 있던 엘리가 움찔거리며 속삭였다.
“뭐야. 요나가 아는 사람?”
“네. 잘 보면 엘리도 기억에 있을걸요? 저번에 요정과 은화까지 와서 저를 데려간 사람들이잖아요.”
“아 그 약탈자들한테 잡혀있던 걸 구해줬다는.”
“맞아요. 제가 지금 쓰는 단검도 저 둘을 돌봐주는 분에게 의뢰해서 만든 건데…또 잡혀있을 줄은 몰랐네요.”
한숨을 푸욱 내쉬자 어느새 레이피어를 꺼낸 리디아가 정면을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엘리 선배. 저 제일 작은 녀석이 가장 강한 놈이랬으니 선배가 녀석을 맡아. 나는 저기서 의식을 주관하는 놈을 처리할게. 카렌 심문관은 그사이에 제물을 부탁할게.”
“합리적이네.”
“맡겨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와 카렌. 오러를 끌어올린 리디아가 슬쩍 이쪽을 돌아보았다.
“요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카렌 심문관이 인질을 데려오면 풀어주고 치료는 하되 싸움에 나서지 마. 아니 눈에 띌만한 짓을 하지 마.”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인 리디아. 그녀가 이번에는 말없이 엘리와 카렌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시선을 교환한 셋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콰앙!
귀가 먹먹해지고 지축이 울릴 정도의 굉음. 지면에는 작은 크레이터가 생겨있었으며 정신을 차려보니 셋은 어느새 저 앞까지 날아간 상황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당연히 엘리. 그녀가 예의 작은 체구 앞에 서서 진각을 밟았다.
쿵!
“네 년들은 질리지도 않냐! 그냥 구석에서 조용히 살지 꼭 튀어나와서 죽을 짓을 하는구나!”
뒤로 크게 꺾이는 한쪽 팔. 마치 활시위를 한계치까지 잡아당긴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황한 표적이 된 작은 체구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기도를 올린다.
“여신이여. 당신을 생각하는 이 애틋함에 시간의 흐름마저 잊을 것 같습니다.”
체구에 걸맞은 어린 목소리.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웅-
엘리를 둘러싼 탁한 보라색 안개. 움직임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는 걸까.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엘리의 움직임이 확 느려졌다.
하지만 엘리의 힘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걸까.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엘리를 감싼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다만 그 과정에서 힘을 쓴 탓인지 뻗어나가던 주먹의 궤적이 틀어진다.
그 풍압만으로 주변 일대가 뒤흔들릴 정도의 위력. 다만 어찌됐건 빗나갔고 이단자들은 똑바로 서 있었다.
“여신이여-!”
다시금 이어지는 기도. 이쪽은 아무래도 결판이 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엘리보다 한 발짝 늦게 도착한 리디아가 오러에 휩싸인 레이피어로 한 이단자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레몬과 애플을 죽이려던 녀석이다.
“끄흐윽….”
입에서 피거품을 문 녀석이 가진 모든 힘을 쥐어짜 쥐고 있던 무기를 레몬과 애플을 향해 던진다. 하지만.
카앙!
때맞춰 달려온 카렌의 창에 막히고 말았다.
특별한 장식은 없다. 날과 자루. 그 둘만이 달려있을 뿐이 단출한 창이었으나 본래의 목적에는 충실한 건지 상당한 예기가 느껴진다.
피로에 절어있던 카렌의 눈이 지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은 건지 재빨리 레몬과 애플을 회수해 돌아왔지만.
“요나 님. 필요하면 이걸 쓰십시오.”
“앗 네.”
포션 비슷한 효과를 지닌 성수를 한 병 건넨 카렌이 다시금 전장에 뛰어든다.
확실히 카렌의 말대로 황혼을 삼키는 자의 대부분은 상대할 만한 수준으로 보였다.
기습으로 하나 쓰러뜨린 뒤에는 대검을 붕붕 휘두르며 이단자를 낙엽처럼 쓰러뜨리는 리디아.
카렌 또한 차분하게 하나씩 심장을 찌르는 중이었다.
물론 황혼을 삼키는 자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 탁한 신성력을 두른 이들이 앞장서서 리디아와 카렌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물러나 왜곡된 신성술을 준비한다.
하지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단의 신성력은 리디아의 불꽃처럼 격렬하게 타오르는 오러에 삼켜져 제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산산조각 났으며.
가끔 이를 뚫고 오는 이가 있더라도 선명한 분홍빛을 발하는 카렌의 창에 요격당했다.
그 중간중간에 완성된 신성술도 있었지만….
“닥쳐라! 여신의 뜻을 왜곡하는 자들아!”
파앗!
카렌의 몸에서 뿜어진 순수한 신성력에 밀려 뭉개지는 왜곡된 기적.
응. 확실히 이건 카렌의 말대로 둘 중 한 명만 있어도 이길 수 있는 전력 차네.
그럼 문제는 역시 엘리 쪽인가.
엘리의 주먹질과 발길질 한 번에 지면이 뒤집히고 허공에서 폭발음이 들려온다.
리디아처럼 오러를 두른 것은 아니다. 다만 그저 강하고 그저 단단하다.
미궁의 성장 보상이 수인족 특유의 강인한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시킨 느낌.
원초적인 폭력을 쏟아내는 엘리는 내가 아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나운 투기鬪氣를 거칠게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체구는 그런 엘리와 어떻게든 합을 나누고 있었다.
보랏빛 안개는 엘리의 몸을 둔하게 하여 주먹이 빗나가게 만들었고 다른 이단자들은 한참을 걸려 간신히 하나 완성하는 왜곡된 축복이 초 단위로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녀석이 사용하는 것은 사랑의 여신의 권능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을 꿰뚫는 자색 수정창 등 뒤에서는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전사가 나타나 검을 휘둘렀고 발밑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불꽃이 일렁인다.
전부 신성력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어디서 구한 것인지는 몰라도 다른 신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수정창은 엘리의 몸에 긁힌 상처밖에 주지 못했고 반투명한 전사는 엘리의 주먹에 머리가 날아갔다. 그리고 발밑을 타고 번지는 불꽃은 진각 한 번에 지면이 갈아엎어지며 꺼진다.
차근차근 작은 체구의 권능을 무력화시키며 거리를 좁히는 엘리.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지만 위험하지는 않겠네.
승리를 확신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나뒹구는 레몬과 애플에게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이 반짝이는 눈빛. 바지까지 반짝이지만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지.
눈이 마주친 레모네이드 디스펜서와 그냥 애플이 입을 열었다.
“요나넴! 구해주러 온 검까?!”
“역시 요나넴임다!”
“아니. 나도 붙잡혔어.”
“???”
“???”
혼란스러워하는 둘.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기대를 배신하고 싶어지잖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제가 어제 좀 무거운 거 옮길 일이 있었는데…
작가 일 하면서 빈약해진 근육으로는 무리였나 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근육통이 심해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드네요.
어흑…
아마 며칠은 이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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