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7
“저 정말로 프러포즈일 줄이야…!”
1층의 계층 수호자가 실존했던 건가!(X)
이제와서 세계수의 권능이라니!(X)
“?”
뭐지.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브어 번역기의 내용과 실제 대사가 바뀌었다는 것을…!
“헉!”
내가 드디어 돌아버린 것인가 싶어 오들오들 떠는 사이.
어느새 관전 모드로 들어간 건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완두콩 튀김을 우적이는 레몬과 애플.
둘의 반응을 보고 깨달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이 이브 씨? 그게 무슨….”
“…어머? 제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지요?”
입막음 당하기 싫으면 모른척 해라(X)
엿됐다! 제발 모른 척해주세요!(O)
“….”
어느새 이브는 평상시처럼 수상쩍은 미소와 째진 실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어찌나 태평한지 내가 조금 전에 잠깐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들은 건가 고민했을 정도로.
하지만 바닥을 나뒹구는 만드라고라의 붉은 즙 범벅 단검을 보고 깨달았다.
전부 진실이라는 걸. 그리고 이브어 번역기는 한 번도 고장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쇼파에 앉은 채로 한쪽 다리를 꼬아 자세를 잡고는 씨익 웃었다.
“이브 씨.”
“잠시만요. 일단 만드라고라부터 정리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방금 프러포즈라고 하셨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입꼬리는 끌어올렸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는 이브의 표정.
서슬 퍼런 실눈과 태생에서 비롯된 격의 차이 그리고 여왕으로서의 경험이 만들어 낸 카리스마가 합쳐지자 상당한 위압감이 된다.
마치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파고들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본능의 경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넘어 등골을 따라 얼음을 쏟아붓기라도 한 것 같은 감각이었지만….
나는 이브라는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엘리처럼 이브 또한 내 손에서 태어난 아이. 당연히 지금의 이 분위기가 허세라는 것쯤은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하여 벌벌 떨거나 한발 물러나는 대신 머리를 굴렸다.
주어진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진실을 유추하는 것은 탐정의 영역이지만…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자잘한 소재를 재밌게 엮어내는 것은 작가의 영역 아니겠는가.
아직도 전개 중인 바실리우스 단검 제작의 대금 대신 약속한 소원권 권능 발현 이후로 묘한 레몬과 애플의 태도 프러포즈 발언 틀리지 않은 번역기 허세.
이 모든 것을 주제로 이브를 찔러보기 좋은 내용을 지어냈다.
“어디 보자…그러고 보니 이브 씨에게는 하나 약속한 게 있었죠. 이 힘을 단 한 번 이브 씨를 위해 사용하겠다고요.”
머리에 씌워진 물푸레나무 왕관을 툭툭 두드리며 그리 말했다. 착각의 프로(아님)답게 평정심을 유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브.
“예에. 그랬었지요.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요나 씨의 가능성 믿고 투자한 거랍니다. 실제로 이렇게 빨리 답을 보여주셨고요.”
어디에 써먹어야 잘 써먹었다고 소문이 날까(X)
찬탈자와 전직 여왕 플레이 각 떴나!(O)
이브의 속마음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과연. 그동안 많이 외로웠던 거구만.
이브의 남녀관계에 대한 설정은 단 하나. ‘처녀’.
즉 이브가 처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실제로 유니콘의 뿔이 가장 크게 반응하기도 했고.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처녀란 단순히 처녀막의 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남자도 마음에 담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야한 일은 해본 적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철저하게 이성과 격리된 채로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 수 있겠는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만약 그게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해답이 바로 눈앞에 있다.
이브 니르바나 이그드라실.
대체 어떤 연유로 이 남녀역전 세계에서 처녀로 천년을 살아온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내가 젊은 육체를 가진 채 아주아주 오랜 기간 동정으로 살아야 한다고 상상해 보면 이브의 심정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내가 약속한 일회성 소원권을 갖고 있는 이브가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헤에. 이브 씨는 제가 단 한 번 세계수의 권능을 이브 씨를 위해 쓰겠다고 한 약속을 어디에 쓰시려는 건가요? 프러포즈? 설마…저랑 결혼하는데 그 귀한 기회를 날리시는 건가요?”
“…갑자기 프러포즈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어디 한번 지껄여 봐라. 목이 계속 붙어있을 수 있다면(X)
제발 다른 이야기 하면 안 될까요(O)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맞게 찾아온 것 같네. 다른 이야기라니. 당연히 절대 안 된다.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이브. 그녀를 향해 한층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똑똑히 들었는데 모른 체 하실 생각인가요? 아 일단 말해두는데 제가 약속한 건 어디까지나 세계수의 권능을 이브 씨를 위해 쓰는 거랍니다? 이브 씨의 말에 뭐든 따르는 게 아니라”
내 태연한 태도에 움찔거리는 이브. 그런 그녀를 향해 보란 듯이 바실리우스의 힘을 사용했다.
우웅-
얼마 남지 않은 신성력을 모조리 가져가는 물푸레나무 왕관. 동시에 가게 곳곳에 비치된 화분 속 식물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내가 앉아있는 쇼파 주변을 휘감은 풀 줄기. 의미심장하게 자라난 녹음에 이브가 침을 꼴깍 삼킨다.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번역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렇게나 쉬운 상대는 또 없을 테니까.
“가장 먼저 떠올리신 게 프러포즈라…이브 씨는 지금껏 저를 그런 눈으로 보고 계셨던 건가요?”
“글쎄요. 어떨런지….”
네까짓 게 감히 나를 재단하느냐(X)
들켰다들켰다들켰다들켰다(O)
겉으로는 여유롭게 음험한 미소를 짓는 이브. 하지만 이젠 믿는다. 지금의 이브는 들켰다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것을!
평소라면 이쯤에서 한번 물러났겠지만 오늘은 역으로 한발 깊게 들어서기로 했다.
쇼파의 팔걸이 쪽에 몸을 기대듯 비스듬하게 누웠다.
자연스레 말려 올라가는 옷자락. 흐트러지는 호흡과 벌어지는 옷깃 사이로 드러난 쇄골.
작은 체구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퇴폐미를 이미지하며 몸짓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이브의 가는 실눈이 내게 집중된 순간. 은근한 목소리로 재차 이브에게 물었다.
“아이 참. 숨기지 않아도 좋답니다? 저와 이브 씨의 사이잖아요. …이런 것도 공유하는 관계 말이죠.”
거기까지 말하고는 아닌 척 허리춤의 유니콘 단검을 만지작댔다.
여차하면 검을 뽑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자꾸 진동하며 백광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거지.
검집에 들어가 있다고는 하나 워낙 격렬한 반응인지라 집중하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단검이 내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달리 말해 나는 아직 동정이에요 어필을 하고 있다는 거다.
일전의 와! 동정! 이라면 내심 연호하던 이브라면 분명 반응이 올 터…!
꿀꺽.
예상했던 대로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침을 삼키는 이브. 음험하게 찢어진 실눈 때문에 알아차리기 어려웠지만 그녀의 시선은 내 전신을 선명히 핥고 있었다.
오랜 경험이 헛된 것은 아닌지 입만큼은 멋대로 떠들고 있었지만.
“요나 씨? 이런 말씀 드리기 참 그렇지만 너무 무례한 것 같지 않으신지요? 갑자기 쳐들어와 저를 이리 몰아가시다니….”
지랄은 거기까지다(X)
와 몸매!(O)
“몰아가다뇨. 그리 말하면 제가 나쁜 사람 같아 서운하네요. 저는 그냥 알고 싶은 거예요. 이브 씨가 제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엘프에게 세계수의 권능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이죠.”
이번에는 뒤에서 구경만 하던 레몬과 애플을 향해 짧게 눈짓했다. 그와 동시에 손목과 발목 언저리를 휘어감는 얇은 덩굴 식물.
바실리우스로 꾸준히 성장시키던 주변 화분의 식물 일부가 내가 있는 쇼파에 닿은 것이다.
이 근방의 식물 대부분의 제어권을 갖고 있는 내게는 팔짱을 낀 것과 비슷한 감각이지만…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촉수에 휘감기는 모습과 비슷할 터.
옅은 미소를 유지하며 가만히 이브를 바라보았다.
이브 또한 둘러대듯 말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고.
…뭐 그 시선이 조금 음흉하긴 했지만 나는 나대로 엘프답지 않은 이브의 풍만한 가슴팍을 감상했으니 쌤쌤이다.
한참을 말없이 대치하던 우리 둘이었으나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이브였다.
그녀가 항복하듯 양팔을 가볍게 들어 올린 자세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요나 씨와 저는 파트너. 기어이 들으셔야겠다면 그걸 말릴 수는 없겠죠.”
이젠 돌이킬 수 없으니 각오해라(X)
좀 더 키워서 잡아먹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나(O)
실로 노골적인 속내에 경악하는 것도 잠시. 이브가 감고 있던 눈을 크게 떴다.
벌어진 눈꺼풀 사이에 있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였다.
진실의 눈까지 발동한 이브가 짐짓 스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인간인 요나 씨에게는 생소한 일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먼 과거. 멸신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의 저희 엘프가….”
“네네. 이브 씨가 여왕이던 시절의 이야기죠?”
“…?”
선수를 빼앗긴 이브가 일시 정지라도 걸린 것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맞다. 이거 일단은 비밀이었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졸면서 간신히 쓴거라 오탈자가 많을 수 있읍니다…퇴고는 내일 할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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