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7
“사람이 절망하는 게 언제인지 알아?”
“유니콘은 존재해도 오리너구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요?”
“아냐! 아무리 시도해도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을 때야! 그리고 오리너구리는 존재해!”
“네네. 베니가 그렇다면 그런 걸로 치죠.”
지금 이 순간에도 아공간 반지 속에는 어디다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짐승의 눈물이 잠들어 있긴 하지만 베니를 놀리는 게 재밌으니 모른 척하기로 했다.
씩씩대는 베니의 모습을 감상하며 손을 척 내밀었다. 그러자 그림자 괴물이 촉수를 길게 뻗어 어디선가 꺼내온 크림 파이를 손 위에 올려주었다.
“오. 고마워.”
-크릉.
즐거운 울음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이는 녀석. 나도 좋고 그림자도 좋고 모두가 행복한 세계에 혼자 서러운 사람이 있었다.
“그거 내 거잖아?! 서브 냉장 마도구에 숨겨뒀는데 어떻게 알고 꺼냈어!”
-킁.
그런 것도 모르겠냐는 듯 코웃음 치는 그림자 괴물. 이에 방방 뛰는 베니를 향해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무슨 실험을 한 거예요? 일단 베니가 하라는 대로 다 했고 그러다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져서 졸립고 배도 고픈데…결과는 별로였나요?”
“으윽. …미안.”
“방금 전의 크림 파이로 용서해 드릴게요. 그보다 지금은 결과가 중요하죠. 저도 실험 참가자니까 이 정도는 알려주셔도 괜찮잖아요?”
“그건 그래.”
고개를 끄덕인 베니가 널찍한 쇼파 위에 몸을 던졌다. 상당히 푹신한 곳인지 부드럽게 파묻히는 작은 체구.
조금 궁금해져 한번 앉아보러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크르릉.
가지 말라는 듯 내 허리에 촉수를 감는 그림자 괴물.
등인지 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녀석의 몸 위에 앉는 것도 편안하긴 하니 그냥 이대로 있기로 했다.
베니가 잔뜩 지친 표정으로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말려 올라가는 드레스 자락.
발목 부근만 보이던 살결이 어느새 오금 근처까지 보일 지경이 되어서야 멈춘다. 안쪽 허벅지가 보일랑 말랑한 자태로 말을 잇는 베니.
“우선 가장 먼저 실험해 본 건 이 녀석이 왜 너를 좋아하는지야.”
“냄새 마력 신성력 목소리 얼굴 그 외에도 이것저것 해보긴 했죠.”
“응. 그런데 전혀 모르겠어. 네가 없을 때면 모를까 있을 때면 너한테만 반응하더라고.”
“이게 다 저의 빛나는 매력 때문 아니겠습니까. 어서 칭찬해주세요 베니.”
“…결국 이 부분은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넘어갔네. 그 뒤에 시험해 봤던 건 기분 상태에 따른 변화였지.”
“제 말도 넘어가시는 건가요? 그래도 뭐어. 저는 관대하니까 봐 드릴게요. 기분이 달라지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었나요? 평소 데이터를 몰라서 저는 차이점도 모르겠던데.”
“응. 상당한 차이가 있었어. 전체적으로 반응속도는 좋아졌는데. 힘은 약해졌더라. 그리고 몸에 흐르는 산성 체액의 농도도 옅어졌고 이빨도 뭉툭해졌어.”
“…약해진 거 아니에요?”
“조금 달라. 약해진 게 아니라 약해지려고 한 거지. 쉽게 말해 최대한 발톱을 숨기고 혹시라도 누구 할퀼까 조심하는 고양이 같은 느낌?”
“오.”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내 엉덩이에 깔린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핏발이 잔뜩 선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깜빡.
2개로 분열했다.
깜빡깜빡.
아니 이제 4개.
자꾸 늘어나는 눈동자에 낄낄거리고 있자니 베니가 살짝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징그러워? 난 얘랑 오래 함께했고 친구였다는 생각도 있지만 이렇게 직접 보고 있으면 징그러운데.”
“아니 뭐어. 징그럽긴 한데 보다 보면 나름 귀여운 면도 있잖아요. 당장 이 눈알 늘리는 것도 제가 좋아하니까 신나서 마구 증식시키는 거죠.”
어느새 몸체의 절반을 빼곡히 채운 작은 눈동자. 환 공포증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저 말고 다른 반응을 보인 상대는 없나요?”
“으음. 이 정도는 아니어도 엘리 언니랑 리디아 상대로는 좀 얌전하긴 했어. 아 다른 고위 모험가 앞에 서면 다 그랬네.”
“고위 모험가 앞에서라면 다 비슷한 반응이었나요?”
“조오금 다르긴 했지? 고위 모험가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사람들 앞에서는 더 얌전해졌으니까. 예외적으로 성직자만 보면 으르렁대긴 했지만.”
“성직자를 안 좋아하는 건 아무래도 황혼을 삼키는 자에게 당한 기억이 남아있어서겠죠?”
“황혼을 삼키는 자 때문인 건 맞을 거야. 근데 기억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네.”
고개를 갸웃거린 베니가 몸을 뒤척이며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기껏 말아 올라간 치맛자락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대신 복숭아 같은 아담한 엉덩이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흠…팬티라인이 슬쩍 보이는군. 제대로 입고 있다. 역시 노팬티 여신 사랑사랑이 이상했던 거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베니가 고양이처럼 상체는 바짝 붙인 채 엉덩이만 위로 쭈욱 끌어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흐으읏…하아아아아….”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실로 박음직한…아니 바람직한 자세였다.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내 노골적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니는 태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너무 많거든. 무엇보다 황혼을 삼키는 자에게 보이는 반응이 무언가 생각해서 나오는 거라기에는 너무 본능적이야.”
“하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흔적이 섞였을 테니 기억이 있더라도 뒤죽박죽 섞여 큰 의미가 없겠죠. 무엇보다 꼭 예전의 기억 때문이 아니더라도 싫어할 이유가 있잖아요.”
그림자 괴물로서 다시 태어난 이후에도 황혼을 삼키는 자의 실험은 계속됐다. 베니에게 이식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그날까지.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괴롭히는 놈이 있다면 그 녀석을 두려워하거나 엿같아하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는가.
그림자 괴물 같은 경우에는 후자였던 거겠지.
“그나저나 다른 고위 모험가 앞에서 비교적 얌전해지는 건 좀 신기하네요.”
“내가 보기엔 단순히 힘의 차이를 느껴서인 것 같아. 지능이야 짐승보다 똑똑하지만 본능은 짐승 수준이거나 그 이상으로 날카롭거든? 강자 앞에서 꼬리를 마는 건 흔한 일이지.”
“으음. 글쎄요. 그렇게 따지면 저나 베니에게 보이는 태도가 이해 안 되는걸요? 제 생각은 좀 달라요.”
그림자 괴물이 나를 좋아해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구는 건 사실이지만 베니를 싫지만 따른다거나 좋아해서 하는 말을 들어준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틱틱대는 거다. 한때 친구였으나 역겨운 괴물이 되어버린 무언가를 대하는 베니처럼.
그렇다면 나를 좋아하는 이유도 간단하지.
“제가 이 아이를 좋아하니까 얘도 저를 좋아해주는 거 아닐까요?”
“…뭐?”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니에요. 진심이지.”
진지한 얼굴로 눈깔 괴물이 되어버린 그림자 괴물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 봤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징그러운 풍경.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애정을 갈구하는 절박한 몸짓처럼 느껴졌다.
“그림자가 생긴 게 좀 그렇잖아요. 아마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애정을 받아본 적 없는 게 아닐까요? 그나마 나은 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갖고 대해주는 베니였고요.”
“….”
입을 다물고 무언가 고민하기 시작하는 베니. 먼 과거의 일은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 같이 다니며 받은 시선은 잘 알겠다.
다들 그림자 괴물을 싫어했다. 무서워했고 징그러워했으며 꺼려했다.
막 태어나 그런 시선만을 받았으면 나라도 삐뚤어지지.
내 말을 들은 베니가 조금 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너는 아니라는 거야?”
“저도 여전히 징그럽다고 여겨요. 무섭기도 하고요. …다만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뿐이죠.
그림자 괴물의 재료가 된 아이들이 겪고 그림자 괴물이 되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슬픈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내 설정을 한가득 끌어안고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이것저것 섞어보는 행위 그 자체는 솔직히 신나지 않는가.
무엇보다 끔찍하게 생겼으면 좀 어떤가. 내가 직접 만든 아이는 아니어도 내 세상 위에서 살아가는 아이라는 건 확실한 것을.
조심스레 그림자 괴물의 몸통을 쓸어주고 단단한 이빨을 토닥여 주었다.
얼핏 보면 금방이라도 내가 잡아먹힐 것처럼 위험한 구도.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믿음이 있다.
실수로 다치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일부러 나를 다치게 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름?”
“그림자 괴물이 이름은 아니잖아요? 뭐어 무슨 생각으로 아직도 이름을 안 붙여줬는지는 알겠지만요.”
베니에게 있어 그림자 괴물은 ‘흉한 것’이었으리라.
당장은 힘이 필요하니 빌리지만 언젠가 떨어뜨리고 극복해야 하는 그런 존재.
“그러니 우선 이름을 붙이죠.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그 뒤에 이것저것 알아보도록 해요.”
“…응.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너무 무심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모험가 생활을 곁에서 지금까지 쭉 지켜준 녀석이잖아?”
잠시 고민하던 베니가 입을 열었다.
“샤도우. 응. 너는 이제부터 샤도우야.”
그림자 괴물의 그림자를 따온 것이 쉐도우. 하지만 쉐도우라고만 부르면 멋이 없고 어감도 미묘하니 살짝 꼬아서 샤도우.
“어때? 마음에 들어?”
-….
그림자 괴물. 아니 샤도우가 베니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할짝.
뾰족한 이빨 사이로 기다란 혀를 내밀어 그녀를 핥았다.
“꺗!”
베니가 그토록 바라던 습성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축축해…냄새나…이잉….”
물론 잔뜩 젖어버린 베니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촉촉한 베니칩 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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