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7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다·
루비어스 백작 가문을 지탱해 오던 것들이, 그리고 미래의 힘이 되어 줄 이들까지 모두 죽어 버린 것이다·
“어째서 내 대에 이런 일들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어 버리고 싶었다·
어찌 안 그러하겠는가·
간신히 영지 부흥의 길이 보였다· 미래에 전력이 될 견습 기사들이 있었으며, 금전이 있어 영지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영지를 지키고 수호해야 할 기사들이 대부분 죽어 나갔다·
상대의 정체를 알면 어떻게 방비라도 해 보련만, 정체도 모르는 상태였다·
“····”
엘은 그런 로웰린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도 아파 오는 걸 느꼈다· 아직 그녀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엘의 사촌 누나가 된다·
가족처럼 생각했기에, 지금 로웰린이 슬퍼하는 것이 자신의 슬픔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로웰린에게 다가간 엘이 입을 열었다·
“복수하고 싶으십니까?”
그녀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어떤 복수를 원합니까?”
“피에는 피로! 피의 복수를 할 거예요·”
“····”
엘이 조용히 로웰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웰린도 시선을 들어 엘을 바라보았다·
잠시 시선 교환을 하는 두 사람· 로웰린의 의지는 굳건해 보였다·
이윽고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피의 복수, 백작님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예?”
놀라 고개를 드는 로웰린을 일별하고 엘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격전이 벌어졌던 곳· 적이 시체를 모두 회수했지만 치열한 싸움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엘이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캐스팅을 시작하더니 이내 큰 목소리로 전개어를 외쳤다·
“서먼 소울(Summon Soul)!”
파아앗!
전개어와 함께 엘의 앞에 검은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 엘이 펼친 마법은 서먼 소울이라는 7클래스 영혼 마법으로 그 장소에 머물고 있는, 혹은 죽은 시체에서 떠난 영혼을 실체화시키는 영마법이다·
그것은 영혼을 소환만 하는 것만이 아닌 마법 전개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마법이기도 하다· 주 쓰임새는 가족을 잃은 이가 영혼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자 사용하는 게 다반사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휘몰아치자 모든 시선이 엘에게 집중되었다·
마법을 전개한 엘은 그들의 시선을 받아 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떠난 가련한 영혼이여· 지금 내 앞으로 와 모든 것들을 말하고 떠나소서·”
그와 함께 엘의 앞에 여러 가지 흐릿한 영상이 나타났다· 바로 마법에 의해 소환된 영혼들인 것이다·
그 영혼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과거 이 터에 죽은 영혼들도 있었고, 오늘 격전에서 죽어 나간 루비어스 백작가 기사들과 침입자들의 영혼도 있었다·
다른 영혼들은 상관하지 않고 엘은 침입자로 보이는 검은 갑옷을 착용한 영혼에게 다가갔다· 엘이 그 영혼에게 물었다·
“그대의 정체는 무엇이지? 무엇 때문에 루비어스 백작 가에 침입한 것이냐?”
엘의 물음에 영혼이 시선을 옮겨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 ····
잠시 침묵에 빠졌던 영혼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그대가 금탑주인가?
기사의 물음에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금탑주 엘리미스다·”
– 그렇군· 살아 있었다면 그대의 힘을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대의 힘이 생생하게 느껴지는군· 정말 대단해· 우리가 사람을 잘못 건드렸는지도····
영혼의 나직한 독백에 엘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알고 싶은 건 영혼의 정체와 그 소속이다·
그 감정은 그대로 엘의 어조에 묻어 나왔다·
“나는 그대의 정체와 소속을 물었다· 내 물음에 답해라·”
그에 영혼이 실소를 지었다·
– 정말 무섭군, 죽은 우리를 불러내어 정체를 알아내려 하다니·
하지만 서먼 소울에 소환된 이상 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영혼은 저항이라도 하듯 뜸을 들였지만 이윽고 자신의 정체와 소속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 내 이름은 라이켈· 로드멜 백작가의 기사로서 죽기 전에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기사였다·
자신을 라이켈이라 밝힌 기사의 말에 엘과 로웰린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로드멜····”
“로드멜 백작가!”
로드멜 백작가라면 제2왕자파에 속한 귀족으로, 제2왕자파의 세력이 밀집된 왕국 동부의 강성한 귀족 중 한 사람이다·
엘이 계속 물음을 던졌다·
“로드멜 백작의 단독 범행이라 보기에는 어렵군· 그가 아무리 백작이라지만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을 리 없으니 말이야· 이번 일에 다른 귀족들도 함께했나?”
라이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번 일은 로드멜 백작님과 미칸 백작, 그리고 아드보카 백작님이 함께 계획하셨다고 들었다·
“미칸 백작··· 아드보카 백작···!”
모두 제2왕자파에 속한 귀족들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아낸 엘이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그럼 이것은 제2왕자파의 소행인가, 아니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일인가?”
– 그것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일의 진행이 체계적인 걸로 보아 그럴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렇군· 알겠다· 그럼 이만 사라져라·”
파앗!
엘이 마법을 유지하고 있던 마나를 거두자 라이켈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영혼들에게 볼일이 사라진 엘이 마법을 해제하려 할 때, 로웰린이 엘을 만류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탑주님!”
그녀의 외침에 엘이 멈칫했다·
“왜 그러시죠?”
“저희 가문을 위해 싸우다 죽어 간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요····”
절실한 그녀의 마음이 엘에게 와 닿았다·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인사 정도는····’
“그렇게 하시죠·”
“고맙습니다, 탑주님·”
자리를 비켜 주는 엘을 향해 고개를 숙인 로웰린이 루비어스 백작가 기사 제복을 착용한 이들에게 향했다·
2명의 정식 기사와 10명의 견습 기사가 흐릿한 현상을 유지한 채 로웰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웰린이 그들을 바라보며 나직이 불렀다·
“크리먼 경, 케이멜트 경····”
그리고 견습 기사의 이름도 하나하나 모두 부르는 로웰린· 그녀는 물기 어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고마워요· 정말··· 제가 못난 탓에 여러분을 지켜 주지 못했네요·”
로웰린의 말에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크리먼이라 불린 기사가 입을 열었다·
– 그런 말을 하셔선 안 됩니다, 백작님·
“네?”
크리먼의 말에 로웰린이 반문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기사는 주군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 그것이 정식이건 견습이건 간에 저희는 주군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있는 영혼들을 가리키고, 살아 있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 보십시오· 저희가 후회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저희는 주군을 지키기 위한 검· 그러다 죽은 것이기에 한 점 후회가 없습니다· 부디 저희들로 인해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군이시여!
뒤에 서 있던 영혼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의 예를 취한 것이다· 그리고 로웰린에게 외쳤다·
– 후회하지 마십시오, 주군이시여! 저희의 희생을 바탕 삼아 더욱 성장하시옵소서! 나아가 루비어스 백작가를 왕국 제일 가문으로 만드시어 우리의 희생이 헛된 것이 아님을 온 세상에 알려 주십시오!
“····”
그들의 외침에 로엘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이러한 감정을 몇 번이나 느껴 봤을까·
죽어서까지 충성을 다하는 가문의 기사들· 로웰린은, 지금만큼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리고 떨려 오는 손을 필사적으로 꽉 쥐었다·
로웰린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애써 악물며 그들에게 말했다·
“오늘만··· 오늘만 울겠어요· 이건 여러분들의 희생이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먼지가 들어가 우는 것이에요·”
그와 함께 로웰린의 눈에서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
울음을 터뜨리는 로웰린의 모습을 그들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영혼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 그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분위기가 전염된 것일까· 살아남은 기사들도 하나둘 기사의 예를 취했다·
부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해 주는 주군·
그런 주군을 모시는 것만큼 그들에게 있어 영광스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숙연한 분위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정말 슬프지만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기도 해요·”
카이나가 엘의 곁으로 다가와 말하자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런 충성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주군이 된 사람으로서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지·”
그러자 카이나가 매직 나이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인님의 기사들도 저럴 거예요· 분명히요·”
왠지 뭐랄까, 위로 아닌 위로 같아서 엘은 나직이 웃었다·
“그래, 고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