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1화
제1장 성국의 출진
블리어드 제국이 성국과 정식 협정을 맺은 날로부터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성국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금탑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소드 마스터조차 진입하지 못하는 금탑의 다크 포그의 존재는 성국에게 있어 가장 뼈아픈 실책 중 하나다· 바로 금탑주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렇다고 주 국가의 협정을 비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금탑주에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면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성국의 준비는 놀랍게도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10만에 달하는 성군이 완벽하게 정비된 것이다·
이즈음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이 협정을 맺은 사실은 서서히 대륙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대륙 도처에 깔려 있는 디벨 상단의 정보망으로 정보를 얻는 엘이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힘을 합쳤단 말인가····”
엘은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이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에 신음을 흘렸다·
블리어드를 지배하던 오스칼 대제가 물러나고 새로운 황제로 알카이드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솔직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알카이드 같은 사람은 결코 원한을 잊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이를 갈며 그 원한을 키워 나가는 축에 속한다·
때문에 행여 그가 성국과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지금 현실로 닥쳐 온 것이다·
그것도 군대도 아니고 기사도 아닌 제국 최고의 전력 클라이언 공작과 게이런즈를 지원한다고 한다·
제국을 상징하는 무적 근위병을 지원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야말로 제국을 이루게 하는 근간인 초인 2명을 모두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게이런즈는 공격 부대에 편성해서 말이다·
“후우··· 힘들겠어·”
차라리 10만 군대를 파견했다면 엘이 이 정도로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크 포그를 적극 활용한다면 병사들쯤은 삽시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와 8클래스 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천 군대 이상의 가치를 지닌 그들의 힘은 절대적 고수를 상대하기 어려운 엘에게 치명적인 비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게이런즈가 공격 부대에 가담하다니· 클라이언 공작보다 더욱 까다로운 존재가 바로 그인데····
“그걸 알고 그랬겠지만····”
8클래스 마법사의 존재를 생각하자 엘의 얼굴이 흐려졌다· 얼마 전 보았던 8클래스 흑마법사가 떠오른 것이다·
단전호흡으로 인해 내심 8클래스 마법사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왔던 엘이다·
하지만 그 자신감을 산산이 부숴 버린 흑마법사와의 만남· 그것은 엘에게 충격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마나 프레셔는 7클래스와 8클래스의 현격한 차이를 몸 전체로 느끼게끔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8클래스 마법사의 합류는 엘로 하여금 깊은 근심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단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야겠어· 교황이 내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것은 내가 대비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니까· 가능한 써먹을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서 막아 내야지·”
그러면서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군이 준비하고 블리어드 제국의 지원군을 합쳐 이곳에 도착하려면 약 10일 정도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는····
설사 대륙 전체와 맞서 싸우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이겨 내야 한다·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비장의 수를 준비해야 한다·
성국과 블리어드 제국 연합이 깜짝 놀랄 만한 비장의 수를····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엘은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 * *
한편, 고심에 빠져 있는 엘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형용하기 힘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 실피르는 엘을 바라보며 자신도 시름에 잠겼다·
“엘리····”
그녀는 필사적으로 금탑을 지키고자 하는 엘이 늘 안쓰러웠다·
어찌 그런 마음이 안 들겠는가·
엘의 나이 이제 스물한 살이다· 다시 말해 남들이라면 여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려 갈 그런 시기다·
그런데 엘은 어떤 시간을 보냈던가·
이곳에 정착한 뒤 늘 금탑을 노리는 세력들로부터 싸워 왔다· 성녀를 되찾으려는 성국과 영문 모를 목적을 지닌 흑탑으로부터····
어디 하나 쉬운 세력이 없었고, 그들의 틈바구니 아래 그동안 금탑을 지켜온 엘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힘들어 보였다· 그녀 또한 성국의 침공에 대한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랜드 마스터 다이어드 공작,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 그리고 대신관 6명과 은십자 기사단, 홀리 윙 기사단, 10만에 달하는 성군····
제국끼리 전쟁을 벌일 때도 이만한 전력을 움직이지 않을 만큼 침공군의 전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알카이드, 당신이····’
실피르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서렸다· 이번 성군에 바람을 불어넣은 존재, 알카이드 황제에 대한 분노가 타올랐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그가 이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황제 자리에 오르기 무섭게 성국에 지원을 약속하여 금탑을 공격하다니·
그 이면에는 알카이드 황제의 추악한 욕망이 숨어 있는 것임을 모르고 있을 실피르가 아니었다·
알카이드는 결코 자신을 쉽게 포기할 자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 추악한 속에 엘에 대한 원한마저 품고 있지 않은가·
그랬기에 저만큼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게 한 것이리라·
그런 전력을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금탑 홀로 맞서야 하다니· 대륙에 존재하는 그 어느 마탑도 이 전력을 상대로 버텨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엘은 지금 그 전력에 맞서 싸우려고 한다· 자신의 소중한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실피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더 이상 너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게 하지 않을게· 나를 믿으렴·”
굳은 의지가 빛나는 그녀의 눈!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연구해 오던 것이 있었다·
얼마 전 완성한 그것!
이제 그것을 사용할 때가 온 것이다·
* * *
엘의 예상대로 10일이 흐르자 성군은 출진 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
이번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다이어드 공작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이들을 훑어보았다·
실로 대단한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포함하여 초인으로 불리는 이가 2명, 성국 최고의 두 기사단에 10만에 달하는 성군· 가히 제국을 침공할 만한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사뭇 경건한 분위기 속에 굳은 믿음을 바탕으로 전의를 내뿜는 성군을 바라보다, 다이어드 공작은 문득 한편에 서 있는 게이런즈를 보게 되었다·
웃는 인상은 서글서글하다·
본래 얼굴은 무척 괴팍하지만 웃고 있으면 영락없이 인상 좋은 노인이었다·
하지만 다이어드 공작은 그런 게이런즈의 진짜 모습을 잘 알고 있다·
목적을 위해 누구보다 잔인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잔혹함을·
올곧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다이어드 공작은 그런 게이런즈의 면면을 누구보다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에 이르기까지 겪어 온 세월이 그로 하여금 연륜이라는 걸 쌓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종하기 싫다고 하여 세상 모두를 자신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법·
꼴 보기 싫은 인물이라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배기이고, 금탑주를 잡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인물임이 분명했다·
다이어드 공작이 생각에 잠겼을 때 교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광휘에 휩싸인 교황이 등장하자 성군들의 눈이 빛나며 그를 주시했다·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교황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성군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에 장내는 조용한 침묵이 잠겨들었다·
교황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봐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성군이었다· 이들이 있다면 저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는 제국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성군의 기세는 훌륭했다·
지금도 보라, 무려 10만이 넘는 인원이 한자리에 있지만 쥐죽은 듯 조용하지 않은가·
이 정도로 단련된 성군이라면 필시 성녀님을 모시고 올 수 있으리라·
10만여 쌍의 시선을 받으며 교황이 은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출전하기 전 성군의 사기를 충분히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성전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빛의 자식들이여, 드디어 때가 찾아왔다· 여신님의 가호를 받아 대륙을 구원하실 성녀님을 모실 기회가! 저 가엾으신 성녀님은 지금도 오만무도한 금탑주의 손아래 갇혀 어떤 고통을 받고 계실지 모른다· 그대들은 흔들릴 필요가 없다· 정의는 우리다· 우리가 정의라 이 말이다· 그대들은 대륙을 구원할 성녀님을 탈환할 빛의 성군이며, 여신님의 보호 아래 있는 여신님의 자식들이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 쌓아진 반석으로 인해 여신님의 축복은 자손만대까지 닿을지니, 가라! 가서 여신님의 위대함을 알려 주고 대륙에 우리 가이아 성국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라!”
와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교황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은 대륙의 한축을 담당하는 성국의 지배자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