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8화
그럼에도 엘은 일어났다·
이미 전신 가득 피 칠을 하고 있지만 지킬 것이 있는 그는 꺾일 줄을 모르는 의지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이른 듯하다· 당장 움직이는 것조차 벅찼으며, 게이런즈는 언제라도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듯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게이런즈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엘을 향해 말했다·
“이제 한계인가 보군· 꽤 오래 버텼어· 후후후!”
그러면서 그가 마법을 전개하려던 찰나, 한줄기 간절한 고음이 들려왔다·
“안 돼, 엘리!”
“안 돼요! 이대로 쓰러지면!”
“엉?”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게이런즈와 엘의 시선이 목소리의 진원지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실피르와 카이나가 있었다·
엘이 게이런즈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외친 것이다·
당장이라도 다가올 듯한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엘은 외쳤다·
“난 괜찮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지금 그녀들이 이곳에 온다면 게이런즈에 의해 허망하게 희생당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녀들도 트롤 킹을 중심으로 성기사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
팽팽하기 그지없는 전투에 그녀들이 빠진다면 단번에 전투 상황이 기울 것이 분명했다·
전신 가득 피를 흘리며 외치는 엘의 모습을 보며 게이런즈가 웃음을 지었다·
“후후! 눈물 나는 가족애로군· 정말 보기가 좋아· 하지만 그것뿐이야·”
게이런즈가 마법을 뿜어냈다·
그 마법을 엘은 몸을 틀어 가까스로 피했다·
“큭!”
하지만 원활한 움직임이 불가능했기에 엘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런 엘의 모습에 게이런즈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만 포기하는 게 어떤가? 승부는 이미 났는데 말이지·”
“난 포기하지 않아·”
엘이 몸을 곧추 세우며 말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흠!”
상황이 절망적임에도 전의가 꺾이지 않은 엘을 보며 게이런즈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바꾸고는 엘에게 말했다·
“후후!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께서 이런 말씀도 하셨지· 금탑주를 생포해 오고 그의 어머니 또한 생포하라는 말을· 과거의 정혼녀를 데려오라고 해서 왠지 궁금했지· 여색을 탐하기에는 지금 그녀의 나이가 삼십 대 중반이기에 말이야· 헌데 오늘 보니 왜 그런 것인지 이해가 되는군· 과거 블리어드 제일의 미녀라는 호칭을 얻을 만해· 안 그런가? 후후후! 아들을 잃은 채 황제 폐하께 넘어간 그녀의 표정이 궁금하군·”
“네놈····”
엘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을 얼마든지 모욕하든 그런 건 넘겨 버릴 수 있지만 실피르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게이런즈도 그걸 알면서 엘을 자극한 것이다·
그는 엘을 보며 말했다·
“뭐, 이제 가지고 놀기도 질렸으니 슬슬 끝내 주마·”
게이런즈의 손이 붉게 빛날 때, 돌연 마법이 그에게 쏘아졌다·
그는 재빨리 양손을 교차하며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콰앙!
“큭!”
마법의 폭발과 함께 게이런즈가 비틀거렸다·
그의 앞에는 엘이 마법을 전개한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의표를 찔러 게이런즈를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맹수의 분노에 불을 지핀 것과 같았다·
게이런즈의 눈에 무시무시한 분노가 서렸다·
“네 이노옴!”
방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자신에게 일격을 먹이다니!
그것은 게이런즈의 자존심을 금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게이런즈는 엘을 완벽하게 끝내 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확실하게 끝내 주겠다·”
게이런즈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극도로 분노한 그는 가장 확실한 8클래스 마법을 전개하여 엘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상황에 따라 엘을 죽일 수도 있다고 알카이드 황제에게 말했기에 게이런즈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골든 나이트의 비법 같은 거야 서먼 소울로 캐내면 되니 말이다·
허공으로 올라간 게이런즈가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엘을 확실하게 끝장내 버릴 8클래스 마법을!
우웅! 파아앗!
게이런즈가 캐스팅을 시작하자 엄청난 양의 마나가 그의 주변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자연의 법칙조차 흔들어 버릴 수 있는 힘, 그것이야 말로 재앙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8클래스 최강의 화염계 마법 헬 파이어가 캐스팅되고 있는 것이다·
“···!”
엘은 게이런즈가 8클래스 마법을 캐스팅 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기회를 얼마나 노렸는지 모른다· 게이런즈가 큰 마법을 사용하기를, 빈틈이 드러나는 8클래스 마법을 캐스팅하는 그 순간을 말이다·
엘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주먹에는 1골드짜리 동전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마법, 제련제강의 마법을 전개했다·
그의 손에 금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올 플리체·”
전개어를 외치자 금빛 화살이 엘의 손에 쥐어졌다·
엘은 그것을 힘껏 게이런즈에게 던졌다·
쐐액!
금빛 화살이 광채를 뿌리며 빠른 속도로 게이런즈에게 쏘아졌다·
그것은 정확히 게이런즈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헬 파이어 캐스팅에 몰두하고 있는 게이런즈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아까 전 골드 피닉스를 막아 내느라 세이지 실드도 써버렸으니 필시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
엘의 얼굴에 한줄기 빛이 생겨났다·
게이런즈만 물리친다면 성국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한층 더 쉬워진다·
황금 화살이 게이런즈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엘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캐스팅을 하던 게이런즈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씨익·
명백한 비웃음·
그것을 본 엘의 가슴에 불안감이 싹텄다·
아니다 다를까, 게이런즈는 캐스팅하던 도중 한 손을 뻗으며 마법을 전개했다·
“세이지 실드!”
8클래스 최강의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 지금 그것이 다시 한 번 게이런즈에 의해 전개된 것이다·
더군다나 캐스팅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황금 화살은 그대로 게이런즈의 세이지 실드에 부딪쳤다·
푸캉!
그 위력은 소드 마스터조차 물러서게 만들었지만 8클래스 최강의 방어 마법 세이지 실드를 꿰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동안 세이지 실드를 관통하기 위해 애쓰던 황금 화살이 점점 기세를 잃더니, 이윽고 소멸하고야 말았다·
“이럴 수가!”
엘은 자신의 회심의 일격이 막혀버린 것을 보고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어찌 안 놀라겠는가!
분명 골드 피닉스를 막을 때 세이지 실드를 전개했다·
캐스팅 없이 전개한 것은 메모라이즈를 한 마법을 전개했다는 뜻, 그렇다면 세이지 실드는 여분이 없을 텐데····
그 순간 엘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엘은 게이런즈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게이런즈를 바라보는 엘의 눈에서는 꺾이지 않던 전의가 서서히 수그러들고 있었다·
회심의 일격을 실패한 것에 패배를 직감한 것이다·
그런 엘의 기색을 읽은 걸까?
게이런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엘의 전의가 꺾인 걸 그도 느끼고 있었다·
“후허허, 드디어 포기한 것인가! 아무렴· 하지만 너무 늦게 포기했어· 후후후!”
게이런즈는 언제나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는 메모라이즈를 할 때도 유사시 몸을 뺄 수 있는 텔레포트와 방어 마법인 여분의 세이지 실드를 저장해 놓는다· 그렇기에 방금 전 엘의 회심의 일격도 세이지 실드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이제 남은 세이지 실드는 없지만 지금 이 공격으로 끝장을 본다면 그런 것도 상관없게 된다·
언제나 목숨을 우선시했기에 엘의 회심의 일격을 막아 낼 호구책을 지니고 있을 수 있던 것이다·
“얌전히 죽음을 기다려라!”
게이런즈의 캐스팅에 의해 헬 파이어가 조금씩 그 찬란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지옥의 불꽃·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수만에 달하는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헬 파이어는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캐스팅이 지연되고 있다·
“큭! 마나의 흐름을 꼬아 놓았군· 워낙 교묘해서 눈치 채지 못했군 그래·”
왜 마법이 좀 더 느리게 캐스팅되는지 알아차린 게이런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마법만 완성시킨다면 상관없으니까·
그때, 엘이 지면을 박찼다·
그리고 게이런즈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냐?”
게이런즈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붉은 기운이 맺히더니 엘에게 쏘아졌다·
피슉!
게이런즈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엘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마법이 빗나간 건 그의 실수가 아니다· 헬 파이어 캐스팅 때문에 정신이 분산되어 제대로 적중시키지 못한 것이다·
엘은 그의 마법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정면으로 게이런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 엘의 모습에 게이런즈가 순간 멈칫했다·
마치 죽으러 오는 듯한 엘의 모습에 정면으로 공격을 퍼부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이런즈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