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18화
저 깊고 깊은 곳·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광휘 아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며 절로 빛을 발하는 은빛 머리칼에 더없이 아름다운 한 여인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은발의 미녀, 세레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주변을 둘러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이곳은 어디···?”
무척 친숙하면서도 어딘가 접근하기 힘든 그런 분위기 속에 세레나는 문득 자신이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무척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왜 그런 느낌이 드는 지 궁금하니?”
의아한 기분을 느끼던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허공에서 고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시죠?”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레나가 한차례 몸을 움찔하며 목소리의 주인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 공간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 경계의 자세를 취한 채 말이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답니다· 나의 아이, 세레나여·”
더없이 차분해지는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세레나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지만 경계의 자세는 풀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적의는 없는 듯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제게는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부디 모습을 드러내어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저는 궁금한 것 투성이랍니다·”
그녀의 물음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말하니 제가 실수한 것 같군요· 나를 용서하세요·”
파앗!
그 말과 함께 새하얀 빛이 강렬하게 뿜어졌다·
“읏!”
워낙 눈부신 빛에 세레나가 순간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빛이 잠잠해지자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앞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인 듯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경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더없이 성스러운 모습· 당장이라도 허리를 굽혀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여인에게서는 아무런 위엄도, 기세도 발산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그 누가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의 독특한 분위기가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시지요?”
세레나는 여인을 처음 봄에도 이상하게 여인이 친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래 전 알고 있던 사이라고 할까? 그런 느낌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
세레나의 물음에 여인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세레나에게 손을 뻗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나의 아이여·”
“···!”
여인의 말에 세레나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 그녀의 전신이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세레나를 향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세레나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난 분명 평범한 농가 출신인데····’
자신에게는 분명 부모가 존재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녀가 될 거라 하여 노예 상단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전까지 그녀를 줄곧 집에 가두었던 그런 부모가 말이다·
그런 세레나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그게 아니랍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여인은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무엇을 말하시는 것이죠? 어찌 제게 아이라고····”
다소 격양된 듯한 세레나·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언젠가 기이한 목소리가 듣고 잠에 빠졌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정신을 잃었던 그 기나긴 시간이, 잠을 잤다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때의 기이한 목소리 역시 눈앞의 여인과 관계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랬기에 여인을 추궁하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곳은 어디인가요?”
세레나의 물음에 여인은 천천히,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곳은 정신세계· 즉, 나의 힘으로 발현된 그대의 정신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세계?”
세레나에게 있어 그 말은 처음 듣는 것과 같다·
몸 멀쩡히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살아온 자신이 갑자기 왜 이런 이상한 곳에 존재하게 된 것인가? 그런 그녀가 채 묻기도 전에 여인은 그녀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그대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내가 불러들여서랍니다·”
이쯤 되면 세레나도 어렴풋 눈치 챘을 테지만 여인은 세레나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여인의 말에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물었다·
“도대체 왜 이곳으로 저를 불러들인 것이죠?”
“그건····”
잠시 말끝을 흐리는 여인· 그녀는 세레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대는 저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랍니다·”
“인간? 그렇다는 건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건가요?”
세레나의 물음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무언가를 물으려던 찰나, 세레나는 순간 뇌리에 무언가가 번쩍이는 것을 느꼈다·
“아!”
그리고 기억해 냈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왜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지·
세레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평소 모습에 걸맞지 않는 더듬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서, 설마····”
“그래요·”
여인이 세레나의 말을 끊고 나섰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정체를 말했다·
“대륙의 모든 생명체가 저를 칭하는 이름, 가이아· 제가 바로 가이아 여신입니다·”
“···!”
세레나가 경악에 할 말을 잃고 가이아를 바라보았다·
* * *
가이아 여신·
태초에 창조된 신계, 천계, 마계, 중간계, 정령계 중 신계를 총괄하는 여신이다·
이 세상을 창조한 주신이 사라지면서 신들 중 가장 강하고, 모든 신들을 포용할 줄 아는 가이아 여신에게 신계를 지배하는 권한을 준 것이다·
신계에는 가이아 여신을 비롯한 12명의 신과 12신을 받드는 신족들이 존재한다·
신들은 각각 대자연의 조화에 간섭하며, 중간계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간접적인 힘을 행사한다·
그중 중간계 생명체들의 신앙이 가장 깊은 신이 바로 가이아 여신이다·
그녀는 흔히 대지의 여신으로 칭해지지만 넓은 포용의 여신으로도 불리며, 지금껏 대륙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녀의 뜻을 받드는 성녀나 성자를 내세워 대륙의 위기를 잠재웠다·
과거 마왕을 베었다는 슈그르빌가의 검사도 가이아 여신의 선택을 받아 신검을 얻었기에 마왕을 벨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받는 여신이고,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고귀한 여신이다·
그런 여신이 이곳에 강림하다니?
세레나는 심각한 괴리감에 이해가 전혀 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신이었기에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 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이아 여신에게서 은은하게 퍼지는 기운은 세레나의 불안정한 기분을 절로 편안케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조화를 담당하는 여신이었기에 그 존재감만으로도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
가이아 여신이 자신의 소개를 한 뒤 그 공간은 조용한 침묵에 잠겼다·
세레나는 경악에 빠져 뭐라 말을 할지 몰랐던 것이고, 가이아 여신은 그런 세레나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세레나를 바라보던 가이아 여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당신을 선택했는지 궁금한 것인가요?”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대한 마음을 안정시키며 궁금증을 물었다·
“물론이에요· 여신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제가 성녀로 선택되었다는 뜻, 하지만 저는 어렸을 적 부모님에게 엉터리 이론으로 성녀가 될 것이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제가 성녀라니····”
세레나의 음성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경악이 한껏 서려 있었다·
생각해 보라·
어렸을 적부터 엉터리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이 성녀가 된다는 말을 들어오며 자라왔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임이 확실히 밝혀졌는데 그 순간 자신이 성녀로 선택받았다면?
분명 믿기 힘들 것이다· 어디까지나 거짓으로 알아 왔던 사실이 진실이 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일뿐더러, 이것은 단순히 흔치 않은 일로 치부하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신님이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레나의 할 말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분명 성녀는 열다섯 살 이후 그 자질을 보인다고 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신성력을 발휘한다거나 알지 못하던 지식을 알게 되거나요· 하지만 제게는 그런 현상이 없었어요· 저를 선택한 건 혹시 여신님의 실수가 아닌가요?”
전지전능한 신에게 실수란다·
세레나는 방금 전 한 자신의 말이 심각하게 오류가 있었음을 느꼈지만 이대로 자신이 성녀라는 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녀란 건 대륙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에게는 소중한 것이 많다·
어느 순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게 된 엘과 어머니 같이 믿고 따르는 실피르, 그리고 친동생과 같은 카이나·
어릴 적 불운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지금의 가족은 더없이 소중하고 더없이 따뜻한 삶의 활력소였다·
그런데 지금 그들을 버리고 성녀가 되라니· 이는 그녀에게 있어 절대 가이아 여신의 실수라 치부하고 싶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