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21화
그 순간 그는 세레나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나에게 있어 성국과의 싸움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어· 비록 불필요한 피를 보고 희생을 내기도 했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 나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 난 앞으로도 우리들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또다시 맞서 싸울 거야· 그것이 내 의지야·”
“····”
세레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에 바빴다·
이 세상 그 어떤 남자가 이런 말을 해주겠는가!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면 한 나라와 싸워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멋진 말을, 어찌 그냥 넘길 수 있는가!
세레나는 이 순간 너무나 고마운 엘을 향해 발꿈치를 살짝 들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엘은 그런 세레나의 입맞춤에 조용히 응했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안 지금 이 시간, 그들에게 있어 지금 이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
입을 맞춘 그들은 조용히 떨어져 서로를 살짝 외면했다· 막상 이런 분위기가 되니 무척 어색하고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엘이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위로할 겸 카이나와 실피르가 집무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깨어난 세레나를 보고는 놀라는 한편 기뻐하며 이야기 나누기에 바빴고, 엘은 그 모습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가족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전생에서부터 느껴온 그는 가족이란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단지 그것을 지키기 위한 힘과 금력이 필요할 뿐·
세레나가 깨어나고 신의 의지가 깨어진 이상 성국이 엘을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엘은 위험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언젠가 찾아왔단 8클래스 흑마법사, 그가 이곳에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난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꾸욱·
엘은 굳세게 주먹을 움켜쥐며 의지를 다졌다·
8클래스의 영역·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그 경지에 올라야 했다·
엘은 깨어난 세레나를 바라보며 그 의지를 다시 한 번 불태웠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지금, 뒤숭숭한 정국임에도 엘의 기분은 누구보다 행복했다·
제8장 카르메인 왕국의 부흥
길었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금탑과 성국간의 전쟁이 끝났다·
전쟁의 결과는 놀랍게도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은 금탑의 승리였다·
금탑은 블리어드 제국의 8클래스 마법사 게이런즈를 죽이고 다이어드 공작을 사로잡는 공을 세워 그 이름을 대륙에 널리 퍼뜨렸다·
때문에 대륙 사람들은 금탑의 존재를 대륙 10대 마탑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10대 마탑이란 대륙에 존재하는 10명의 8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을 말한다·
8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은 7클래스 마법사가 세운 마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그 힘은 몇 배에 달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자리를 금탑이 차지하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게이런즈를 잃은 황탑은 10대 마탑에서 제외되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잔인하기 그지없는 평가였다·
침공군이 사로잡히자 성국은 다시 쳐들어갈 듯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돌연 금탑과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사람들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이상 피해를 입었다가는 대륙 서부와 중부에 미치는 성국의 영향력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전력 보존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아무리 성녀라는 존재가 중요하다지만 힘없는 성국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왕국은 그 어떤 곳도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성국의 이름을 딛고 금탑의 이름은 한층 더 높게 평가되고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전쟁이 끝난 지 1달이 되어 갈 무렵, 조용했던 대륙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쟁의 조짐이 아니라 누군가의 초대에 의해 술렁였던 것이다·
대륙이 술렁인 이유, 그것은 얼마 전 대륙 10대 상단에 들어선 디벨 상단이 대륙 각지의 유명 인사들에게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초대장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번에 자신들의 상단이 야심차게 준비한 이벤트가 있단다· 특히 귀부인들이 좋아할 만한 이 이벤트는 앞으로 대륙에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초대장을 쓰면서 디벨은 이미 여러 루트로 정보를 흘렸다· 이번에 카르메인 왕국에 엄청난 투자를 하여 그곳에서 특별한 일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뭘까?’
디벨 상단의 초대를 받은 귀족들은 머릿속에 의문을 품으면서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였다·
대륙 10대 상단주의 초대· 비록 작위가 없다고 하지만 디벨 상단의 이름값은 이미 웬만한 귀족을 금력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대륙 돈의 흐름 판도를 비틀어 버릴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이, 그것이 바로 대륙 10대 상단인 것이다·
때문에 디벨 상단의 초대를 거절하기 어려운 귀족들이 대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는 곳, 그곳은 대륙 중부에 위치한 카르메인 왕국의 수도 라이엘이었다·
* * *
데이브 백작은 대륙 서남부에 위치한 오스턴 왕국의 귀족이다·
오스턴 왕국은 국토의 절반이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해상 왕국이며, 대륙에 풍부한 어류를 공급하는 상업 국가이기도 한 곳이다·
데이브 백작은 그런 오스턴 왕국의 섬을 영지로 가지고 있는 귀족으로, 그의 영지에서는 무척 많은 어류가 잡히고, 마법사가 그걸 냉동 보관하여 대륙에 팔음으로써 무척 부유해진 귀족이기도 했다·
그가 이번에 카르메인 왕국에 오게 된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부인 때문이었다·
그의 부인 메드린이 우연찮게 상단에서 정보를 전해 듣고는 남편인 데이브 백작을 졸라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데이브 백작은 해산물을 팔기 위해 가문 자체에서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 상단의 기본은 당연히 정보! 그 정보 루트를 통해 이번에 초대장을 보낸 디벨 상단이 카르메인 왕국에서 대대적인 패션쇼를 하려고 함을 알 수 있었다·
여태껏 귀족들에게 있어 패션쇼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왕국에 존재하는 유명한 디자이너에게 옷의 제작을 일임하여 입는 것이 다반사였던 시대였다·
그런데 패션쇼라니?
각국의 디자이너를 모집하여 그들이 만든 옷을 전시한다는 것에 옷에 관심이 많은 귀부인들은 물론 상당수 귀족들의 마음을 끌었다·
귀족들은 잘 알고 있다· 옷은 곧 그 귀족의 얼굴이 된다는 것을· 가령 사교 파티가 벌어질 때도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독창적인 예복을 입느냐에 따라 그 파티의 주인공이 결정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데이브 백작은 메드린의 성화에 마지못해 승낙하기는 했지만 내심 패션쇼라는 것에 관심이 갔다·
우선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여 데이브 백작 일가는 단번에 라이엘로 이동했다·
“아니?”
그들은 워프 게이트를 벗어난 순간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라이엘의 모습은 그들이 예상했던 황량한 도시와는 전혀 다른 화려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턴 왕국과 카르메인 왕국은 그 영토나 군사력에 있어서 거의 비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재정은 극과 극이라 할 수 있었다·
풍부한 해산물을 바탕으로 바다의 각종 자원으로 부를 축적한 오스턴 왕국은 왕국 중에서 상당히 부유한 축에 속했으며, 반대로 변변한 자원도 없는 카르메인 왕국은 왕국들 중에서도 상당히 가난한 축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화려함이라니? 카르메인 왕국에는 분명 이렇게 도시를 꾸밀 여력이 없을 터, 그렇다는 건·
‘디벨 상단이 투자를 했나 보군· 그것도 상당히·’
한눈에 보아도 귀족들을 노리고 도시를 만든 게 분명했다· 퇴폐적인 유흥업소는 다소 적었지만 귀족들이 가족 단위로 편안하게 쉬어 갈 고급 여관이 줄지어 여러 곳 존재했다·
그리고 여관에서 고용한 듯한 어린 아이들이 줄지어 나와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데이브 백작의 일가가 눈에 띤 듯, 줄지어 달려와 호객 행위를 하였다·
‘흠! 어디····’
데이브 백작은 여러 아이들 중 가장 말솜씨가 괜찮은 아이를 따라 여관에 들어갔다·
본디 그는 이런 여관을 평가하는 데 있어 무척 냉정하다· 가령 여관의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음식은 어떠한지, 서비스가 어떠한지 꼼꼼한 편인지라 그에게서 후한 점수를 받기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런 그도 라이엘에 존재하는 여관의 서비스에 크게 만족을 표했다·
종업원들의 태도가 깍듯했고 요리 또한 만족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대단하군· 이 정도 서비스라면 귀족들이 다음에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 패션쇼라는 것이 크게 성공한다면 이곳은 단숨에 패션 도시로 그 이름을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상인 출신 귀족답게 그는 이곳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기대감에 달아올랐다·
여관도 이 정도로 만족스러운데 과연 패션쇼라는 건 어떻게 준비했을까?
절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디벨 상단이 초대한 장소로 향했다·
디벨 상단이 귀족들을 초대한 장소는 얼마 전 완성된 거대한 건물이었다·
총 4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한눈에 보아도 무척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왕궁과도 멀지 않아 왕궁에서 근위병을 지원하는 듯 카르메인 왕국의 근위병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