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27화
‘아, 이대로 지는 건가?’
점점 무력해져 가는 골든 나이트와 자신을 보며 엘은 절망했다·
그리고 그런 엘의 다짐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듯, 지크릴이 공격을 멈추고는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제법 잘 견디는군· 하지만 그것뿐인가 봐?”
엘은 신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큭! 난 포기하지 않아·”
“호, 근성은 마음에 든단 말이야·”
지크릴이 웃음을 흘리며 만신창이의 엘과 골든 나이트를 훑었다·
그러더니 돌연 어조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
엘이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안이라니? 다 이겨 놓은 상황에서 무슨 제안이란 말인가?
의아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제안? 무슨 속셈이지?”
“아아, 속셈이라고 하지 말아· 단지 네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널 초빙하려는 거니까·”
그러면서 지크릴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격양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넌 선택된 것이다· 위대하신 그분에게!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그분에게 넌 직접 선택되어 신세계의 새로운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받은 것이다· 너의 뛰어난 능력! 그것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써 보지 않겠나?”
“····”
지크릴의 말에 엘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말에서 느낀 아득한 절망감 때문이다·
지크릴은 분명 ‘그분’이라 칭했다· 즉, 그가 속한 조직에서 그가 제일 높은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과 골든 나이트를 압도하는 실력자가 최고 지위자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지크릴이 말하는 뉘앙스를 들어보면 그자는 직위만 높은 게 아니라 실력 또한 높은 것이 분명하다·
즉, 엘이 모르는 엄청난 실력자가 지크릴의 배후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궁금증을 물었다·
“그분이라면··· 너보다 강한가?”
지크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분은 지상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다· 역사상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9클래스 마스터에 이르신 분이기 때문이지· 그분의 존함은 루이아스, 앞으로 대륙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으로 추앙받으실 분이다·”
“9클래스 마스터····”
엘은 할 말을 잃었다· 9클래스 마스터, 그것으로 모든 게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지크릴이 저런 표정으로 말할 정도면 진실임이 분명하다· 즉, 엘 자신은 9클래스 마스터가 속한 조직에 속하길 권유받은 것이다·
그건 둘째 치더라도 세상에 9클래스 마법사가 현존하고 있었다니!
어릴 때 곧잘 그랜드 마스터와 비유하던 경지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멸망을 관여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경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자 엘의 생각은 삽시간에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 대세는 기울지 않았는가·
지크릴에게 이 정도로 당했는데 그 뒤에 있는 루이아스란 자는 얼마나 강할까· 그런 자에게 맞서는 건 자살 행위다·
모든 걸 지키기 위함이다· 실피르를 지키고, 세레나를 지키고, 카이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엘의 마음이 서서히 기울어 갔다· 지크릴의 말에 현혹되고 있던 것이다·
상대의 힘은 얼핏 들은 것만 해도 엄청나다·
7클래스 마스터인 자신이 도저히 생각지도 못할 만큼· 그런 적에게 맞서 싸우는 건 어리석은 이나 하는 짓이다·
지크릴는 시시각각 변하는 엘의 표정을 보다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엘이 마음을 굳힌 듯하자 물었다·
“그래, 결정을 내렸나?”
“나는····”
엘이 대답하려던 찰나,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아스란 그 이름, 이곳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군·”
“아니···?”
“이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크릴과 엘이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푸른색 오러가 지크릴의 주변에 생겨났다·
마치 공간이 왜곡된 듯한 현상이었다·
“큭!”
대응할 준비도 없이 닥쳐오는 공격에 지크릴은 순간적으로 방어 마법을 전개하며 블링크를 전개했다·
그리고 멀찍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한 번 묵직한 저음이 울렸다·
“대단하군· 과연 흑탑주란 말인가···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그 정도의 저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말과 함께 한 사내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공간의 굴절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내가 공간의 힘을 거두면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이윽고 드러난 사내의 모습· 30대 초반에 폭풍 속 고요함의 기세를 지닌 그 사내는 엘이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다·
“앗!”
엘이 사내를 보며 놀라자, 사내는 엘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그렇군요, 아이넨스 님·”
그렇다·
모습을 드러낸 검사는 다름 아닌 대륙 5대 신검 중 하나인 공간을 지배하는 신검의 주인, 아이넨스 슈그르빌이었다·
제10장 슈그르빌의 도움, 상급 마족 베르아문트
아이넨스의 등장으로 장내는 침묵에 빠져 들었다·
지크릴을 공격한 단 한 번의 공격·
그 공격 하나로 아이넨스의 실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넌 누구지?”
지크릴은 본능적으로 아이넨스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간파했다·
방금 전 공격·
지크릴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삽시간에 꿰뚫려 죽음을 면치 못할 공격이었다·
그 공격은 빠르고··· 기이하며··· 무서웠다!
그것을 생각하니 지크릴은 등골에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여태껏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면서 무섭다고 생각한 것은 루이아스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오늘 눈앞의 검사에게 2번째로 무섭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만!’
지크릴은 방금 전 공격을 생각하고는 아이넨스를 자세히 훑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그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겠다· 혹시 네가 대륙 오대 신검 중 하나인 디멘션 소드의 주인인가?”
지크릴의 시선은 정확히 디멘션 소드에 향해 있었다·
공간을 격하고 날아오는 기이한 왜곡 공격·
그런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디멘션 소드밖에 없다·
“바로 알아차리는군· 그렇다, 이것이 바로 오대 신검 중 공간을 지배하는 신검, 디멘션 소드다·”
“오호··· 전설의 검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영광이군·”
그런 지크릴의 반응에 아이넨스는 신경 쓸 것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방금 전 네가 루이아스를 언급하는 걸 들었다· 루이아스가 네 상관인가?”
지크릴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네가 마스터를 어떻게 알고 있지?”
그의 반응에서 아이넨스는 자신의 질문이 맞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맞나 보군· 좋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었는데?”
지크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러자 아이넨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루이아스는 내가 죽일 자다· 그러니 이름을 아는 건 당연하지·”
“죽인다고? 그럴 자신이 있나?”
“물론이다·”
거침없이 대답하는 아이넨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지크릴·
그는 돌연 큰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후하하하!”
명백한 비웃음·
그에 기분이 상한 아이넨스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왜 웃는 거지?”
“너무나 어이가 없으니까· 네놈이 어떻게 마스터의 존함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을 죽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
그것은 확신이오, 믿음이자, 불변의 법칙이었다·
지크릴의 확신 어린 어조에 기분이 상했는지 아이넨스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잊었나? 난 신검의 주인이다·”
“그깟 신검으로 마스터를 죽일 수 없다· 무기를 믿고 오만을 떠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것이지·”
아이넨스와 지크릴의 사이에 극도로 험악한 기운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아이넨스는 30대의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에 올랐으며, 전설의 가문 슈그르빌가에서 신검을 다루는 모든 비전을 이어받은 자다·
지크릴은 한때 대륙을 절반이나 초토화시킨 흑탑의 탑주이며, 엄청난 위력의 흑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일대일 대결로는 대륙에서 그를 상대할 이가 채 열이 되지 않을 정도니 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들이 서로 대치하며 기운을 개방하자 무시무시한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아이넨스가 엘을 향해 말했다·
“인사는 나중에 제대로 해야겠군· 일단 너와 골든 나이트는 저 히드라를 처치하는 데 힘을 기울여라· 난 이자를 처치하겠다·”
“···알겠습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순간 지크릴의 권유에 넘어갈 뻔한 자신을 책망했다·
분명 지크릴의 제안은 매력적이다·
상대의 조직에 9클래스 마스터가 있다면 대륙은 앞으로 그의 뜻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에게 협력하는 것은 어쩌면 엘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모두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크릴은 자신을 죽이려 한 이다·
그가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분명 자신이 지닌 여러 재주를 탐내서 그러는 것일 터·
즉, 모든 밑천이 털리면 그대로 토사구팽 당할 확률이 높았다·
쓸모 있을 때 대우를 해 주고 쓸모가 없어졌을 때 외면한다·
이것이 사회의 진리임을 엘은 전생에서부터 너무나 많이 겪어왔다·
‘내가 실수했던 거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자신을 죽이려던 상대의 제의를 받아들일 뻔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