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과거와 마주하는 방법 (4)
소름이 끼쳤다.
평소라면 그만하라며 배에 주먹 한 대라도 날렸을 텐데 그놈의 컨셉 연기 때문에 그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만면에 즐겁기 짝이 없다고 쓰여 있는 여우의 얼굴에 차마 욕을 하지 못하고 마주 웃었다. 서비스직의 비애다.
“존경이라니 부끄러워.”
“아하하. 부끄러워하는 누나라니 이것 참 희귀한 광경이네.”
아하하 하하하하.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겉으로만.
나는 친한 척 부드럽게 여우의 손을 잡으며 경고의 의미로 힘을 꽉 쥐었다.
여전히 여우는 처웃는 낯이었다.
“너무 그러지 마?”
“글쎄?”
안 그러겠다는 말은 안 한다 이자식.
나는 뒤에서 보이지 않게 여우의 발을 콱 밟았지만 여우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저 저 두꺼운 얼굴 낯짝 봐라.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냈는데?”
“열심히 종교 생활하고 일했지.”
“종교 생활··· 은 그렇다 치고. 일?”
“응. 난 가주님의 비서거든.”
원작 소설 속 니카 발데르는 분명 능력 부족한 녀석들 뿐이라며 비서를 두지 않았는데.
‘나’라는 이레귤러 때문에 진행이 달라진 거라고 추론하면 자의식 과잉인 걸까?
“고생이 많네. 그··· 종교 생활까지 하기 힘들지 않아?”
“전혀.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고생쯤이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힘내야지.”
뭔 소리야.
“그러니 누나도 우리 탑신교에-”
“거절할게!”
“다정한 누나가 이리도 매정하게 거절하다니··· 나 너무 슬픈데.”
이 자식이 진짜.
나는 거짓 울음을 자아내는 여우를 보며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나를 실컷 놀리던 여우는 텔레포트 존에 도착할 즈음에야 나를 놓아줬다.
나쁜 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유한이 내 근처로 슬며시 다가왔다. 나유리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귀엽네.
나는 여우를 버리고 나유한과 나유리의 손을 맞잡았다.
나유리의 얼굴이 단박에 기쁨으로 가득 찼고 나유한은 놀랐는지 잠깐 굳었다가 이어 뻣뻣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하네~”
안 들려 이놈아. 여우의 징징거림은 무시했다.
우리는 텔레포트 존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내게 차이고서도 여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일행에게 적극적으로 아는 체를 했다.
“아 안녕 수정 선배? 씨? 흠···”
“네 입에서 선배란 말을 들으니 소름이 끼치네. 냉큼 꺼져~”
“그럼 수정 선배 하나 선배. 여전히 탑신교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우리 둘 다 사이비엔 관심 없어. 포교는 그만해줘.”
“그럼 동족으로서 친교를 다지자는 쪽으로는 어떠십니까?”
그 말에 최수정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에게 대꾸했다.
“그걸 네가 말하다니 웃기네. 발데르 가의 수족인 너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는 대화를 보면 둘과 안면이 있던 걸까?
최수정과는 발데르 가라는 인연으로 간접적으로 엮여있다 쳐도 이하나와는 대체 무슨 사이지?
“아는 사이예요?”
“방학 때 여행 가서 만났어. 사이비 종교를 전파하려고 들어서 때려 줬지만. 후배님 이런 애 가까이 하지 마. 물들어~”
최수정은 장난스레 말을 마무리했지만 나름 진심인 듯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우를 보는 시선에는 약간의 적대감까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수정
우리는 이상한 사이비 만났어~ 짜증나~
동족이니 뭐니 헛소리나 해대길래 걷어찼어.
···전에 보낸 메시지에서 그랬었지.
아무래도 그때 포교를 한답시고 입을 마음대로 놀렸다가 최수정의 지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 ‘발데르’ 가문이니까 여러모로 최수정에겐 여우가 불편하게 느껴지겠지.
그나저나 그놈의 탑신교가 뭐기에 여우를 저토록 홀린 걸까. 어떻게 수를 써서라도 빼 와야 하나? 골이 아파 온다.
소설에서도 안 나온 저 종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자 도착이야.”
여우가 지치지도 않고 최수정에게 말을 걸고 최수정이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텔레포트 존에 도착했다.
존 안에 얌전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교장이 무언가 장치를 조작했다.
기이잉- 쿵.
복잡한 마법장치들이 다양하게 교차하며 몇 분간 세밀한 마법진을 그려간다.
원래 텔레포트는 이처럼 굉장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고차원적인 이능이다.
그래서 이동 아이템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텔레포트를 퍽퍽 써대는 와일드헌터가 괜히 위험한 취급을 받는 게 아니라니까···
···뭐 그건 메타 시스템을 통해 이동 아이템 정돈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나도 마찬가지인가?
교장이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고 바깥에 있는 조정자가 외친다.
“곧 이동합니다! 대기해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약간 긴장하여 마법진을 벗어나지 않았는지 주위를 살피고 착실히 도열한다.
이윽고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며 그 안에 있던 우리를 이동시켰다.
이동은 순간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아까와 비슷하지만 묘하게 다른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최종 목적지까지 가자. 걱정 말렴. 바로 근처니까.”
교장이 후후 웃은 후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끌었다.
나는 아까처럼 나유리와 나유한의 손을 양손에 잡고 그 뒤를 쫓았다.
여우는 이제 최수정을 찔러보는 건 그만뒀는지 내 쪽으로 슬슬 다가오고 있었다.
최수정이 괜찮을까 싶어 그쪽을 살펴보니 그녀는 펑 부풀어 오른 꼬리를 이하나의 손에 맡겨서 손질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시비를 털었나 본데····
여우한테 너무 내 선배들을 건들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었지만 이 자리에 나유한이 있는 이상 슬프게도 나는 여전히 햇살캐를 연기해야만 했다.
난 여우를 슬슬 피해 박시우가 있는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시우는 뒤를 힐끔 보더니 말없이 나와 나유한의 손이 연결된 곳을 끊으며 내 뒤로 이동했다.
고맙다 시우야.
“흐음?”
박시우에게 가려진 여우의 비음이 들렸지만 나는 모르는 척 하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유한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것저것 신경 쓰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갑자기 교장이 우리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 ‘꿈의 편지’ 건에도 연루된 바가 있지? 그 건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단다.”
“꿈의 편지··· 행운의 편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나유한이 냉큼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학교에 한바탕 난리가 났더구나? 일단락됐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선생님도 자세히 조사해 보았지. 그건 알고 보니 에렌토스의 개인소유물이더구나. 어떻게 아카데미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아직까지 불명.”
“불명···”
“저주의 발생부터 역으로 경로를 쫓으려 해도 ‘누군가 가방에 넣어뒀다’ ‘어느새 책상 위에 있었다’ 등 미싱링크가 많아서 말이지. 혹여나 누가 처음으로 아카데미에 편지를 반입했는지 알고 있다면 언제든 제보해줘.”
그녀가 부드럽게 제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칭찬해줄 테니.”
“알겠습니다.”
“네!”
···젠장 교장이 나유한에게 나긋하게 대해주는 걸 보다 보니 원작 소설에 나온 교장의 모습이 괜히 오버랩되잖아! 칭찬 그만해!
소설에서의 ‘그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려버린 나는 오그라드려는 손을 필사적으로 펴며 웃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이 남성향의 향기가 너무 괴로웠다.
교장의 말대로 각성자 관리 본부는 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우리는 훈장 수여식이 진행되는 건물을 찾아 조심스레 들어갔다.
과연 훈장 수여식이라는 말이 손색이 없었다.
딱 봐도 포스가 넘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헌터들이 둥근 테이블들 주변에 앉아있거나 돌아다니며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우와····”
화려한 참여진의 면면에 질려 나도 모르게 나온 감탄사에 교장이 후후 웃었다.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그냥 선배들이니까. 예의만 좀 차리면 돼.”
“그냥 선배들····”
그때 헌터 두어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TV 광고에 자주 얼굴을 보이는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교장님!”
“응 다들 오랜만!”
저 사람들이 어떻게 그냥 선배들이에요···?
무리인데요.
나는 교장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걸출한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런 위화감을 느낀 건 나뿐이었던 걸까?
각성자 사회 출신이 대부분인 우리 일행들은 이 행사장에 있는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듯 꽤 친숙하게 어울리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박시우 나유리 신바란의 주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하물며 그 내성적인 민재윤 또한 마침 아는 사람이 있었던 듯 그들과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최수정이야 출신 성분상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어쨌든 그녀도 이하나와 쭉 함께 있을 생각인 듯했다.
아 방금 신바른이 신바란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여간 저 시스콤도 어지간히 애가 탔나 보다.
나는 가만히 그 자연스러운 친교의 장을 바라보았다.
각성자 사회 카르텔.
사실 말만 들어봤지 그다지 실감이 나진 않았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확인하니까 조금····
“어때? 거리감이라도 느껴져?”
“그럴지도.”
내 옆에서 툭 내던지듯 묻는 여우의 말에 대답하며 난 씁쓰름하게 웃었다.
나야 뭐 일반인들 중에서도 최하층에서 자란 데다가 정부 지원 각성자니까.
“근데 넌 아는 사람 없어? 발데르 가문이라며? 유명한 가문이잖아?”
“난 여태까지 그림자로서만 활약했어서. 이번 훈장 수여식에서 공개적으로 소개될 거라 아직까진 존재감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너랑 있을 수 있는 거지. 기뻐죽겠지?”
“···그래. 고오맙다.”
“고마우면 우리 탑신교로-”
“그건 거절할게.”
“네가 오면 바로 구원자가 될 수 있을 텐데. 아쉽네.”
“왜 또 헛소리를 하지? 구원자란 건 또 뭐야?”
“입교하면 알려줄게.”
진짜 얘를 어쩌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능숙하게 대처하는 나유한을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지.
그래도 뭐 옆에 여우가 있어서 그런가. 그다지 외롭지는 않았다.
그때 여우의 디바이스가 진동했다. 화면을 들여다본 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 곧 우리 골칫덩이께서 도착하실 것 같아서.”
여우가 메시지를 나눌 사람이라면··· 니카 발데르인가?
나는 내 ‘메타시스템’을 밝히며 니카 발데르에게 접근하기로 했던 계획을 떠올렸다.
-메타시스템.
나조차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내 능력.
아마 그녀는 이 능력에 대해 끝까지 파고들고 싶어 하겠지.
감출 건 잘 감추되 최대한 이득을 취해야 한다. 나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때 저쪽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나유한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쪽으로 제법 가까이 왔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할 일은 다 한 건가?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자 머뭇거리던 그의 발이 나를 향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식장의 거대한 양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여우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이런····”
“내가 왔느니라-!”
쿠웅-!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화려한 백금발이 문에 의한 바람에 흩날린다. 샹들리에의 빛에 비친 자신만만한 눈이 자수정색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머리 색을 닮아 아름다운 백금색의 귀와 푹신한 여우 꼬리가 살랑이며 반짝였다.
“나의 약혼자는 어디에 있느냐?”
발데르가의 가주 나유한의 약혼자 니카 발데르의 등장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식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니카 발데르?!”
“발데르의 새 가주? 왜 여기에···?”
···확실히 그녀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거나 적어도 비밀리에 초대받은 손님인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타고난 지위에서 비롯된 저 자연스럽게 당당한 태도가 부러워질 정도로.
그 누구라도 그녀를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 온몸에서 흘러넘친다.
니카는 주변의 상황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회장 안을 둘러보더니 이내 나유한을 찾아냈다.
나유한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니카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어정쩡하게 멈추어 있는 나유한의 앞에 당당히 선 니카는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 약혼자가 큰 공을 세웠다 하여 와봤느니라. 미하엘!”
“네 네.”
내 옆에 있던 여우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성큼성큼 니카 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쪽은 내 비서 미하엘이다. 잡다한 일은 미하엘에게 맡기면 되느니라.”
“···그래.”
나유한에게 말하듯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 자리에서 여우가 자신의 수족이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 같았다.
나유한은 제게 팔짱을 끼는 니카를 떨떠름하게 내려다 봤지만 굳이 팔짱을 풀지는 않았다.
하긴 대외적으로는 확실하게 약혼자로 보여야 할 테니까.
나는 그냥 ‘나유한을 짝사랑하는 강나현’답게 충격받은 표정을 짓기로 했다.
울 듯이 일그러진 표정··· 실연당한 표정··· 가짜라는 걸 알지만 괴로워하는 듯한 메소드 연기···!
좋아 이거다!
과연 스스로 느끼기에도 기깔나는 표정이 나온 듯했다. 힐끔 내 쪽을 훔쳐보는 나유한이 말없이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좋아. 이걸로 캐릭터 어필도 잘 됐겠다 슬슬 물러나자.
니카와의 접촉은 훈장 수여식 이후를 노려봐야-
“호오.”
···근데 왜 자꾸 나한테 다가오세요···?
내가 조심스레 한 발짝씩 물러날 때마다 니카는 두 발짝씩 다가왔다.
이런 자연스럽게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가려고 했는데 니카 때문에 다 흩어졌잖아!
뭐 뭐지.
“무 무슨 일이신가요···?”
나는 일단 당황해서 파들파들 떠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공지진하는 내 모습에도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온 니카는 손끝으로 살포시 내 턱을 들어올리며 나를 살폈다.
“네가 바로 어디선가 엘릭서를 구해왔다는 녀석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