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맥을 관리하는 방법 (4)
최수정이 허공에서 튀어나오자 나유리는 누구나 들을 만큼 크게 혀를 찼다.
“무슨 일인가요 수정 씨?”
“아 별건 아닌데. 너네 수련실에 가는 거지? 나도 같이 수련할 사람 찾고 있었거든.”
100퍼센트 핑계다.
최수정은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동공을 이쪽으로 향하며 히죽 웃었다.
“···수련이요? 당신이?”
“왜 그래~? 나도 늘 열심히 수련해!”
엣흠! 목을 가다듬은 최수정이 공중에 떠 있던 몸을 착지시켰다.
“그래서 그런데 나도 같이 수련해도 될까?”
아 얼마든지요. 새로운 인맥은 언제든 환영이야!
‘나’는 최수정이 숨긴 흑심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더욱 성장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기쁘기 그지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이야! 이름이 뭐야?”
“최수정!”
“잠깐 나현 씨! 이 사람은···!”
유리가 반대하려는 순간 묵묵히 대화를 듣던 덤덤이가 말을 얹었다.
“동료는 많을수록 좋지.”
그럴 줄 알았다. 하여간 성실한 자식.
“왜? 동생아 너도 막 끼어들었잖아. 한 사람쯤 더 늘어도 문제는 없어.”
사기꾼도 말을 얹었다. 물론 이참에 최수정과 안면을 익혀야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겠지.
나이스 서포트 주인공들!
나유리는 찜찜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다수결에 따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듯 마지못해 최수정을 받아들였다.
최수정은 곧장 사기꾼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나도 네 이름 알아. 나유한이지?”
“어. 너는 최수정이랬지?”
“귀여운 수정아~ 라고 친근하게 불러 줘!”
“아니 만나자마자 그러긴 좀.”
오오 역시 히로인 후보. 흥미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벌써 저렇게 매력 어필을 하는 건가?
소설 속 히로인 중 하나가 생각보다 빠르게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나도 좀 더 존재감을 어필해야 하는 걸까?
아니지 나는 서브 중에서도 서브 히로인 정도의 포지션을 원하는 건데 지금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메타 포인트는 더 많이 벌고 싶은데. 사기꾼에게 받아먹을 것도 많고.
···할 수 없지. 정말 하긴 싫지만····
‘질투하는 히로인’ 작전이다.
나는 토끼 같은 우리 고아원 동생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저기 너무 그러면 유한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사기꾼이야 속으로 히죽히죽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겠지.
나유리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과시하듯 나와 팔짱을 꼈다.
“자기들끼리 붙어 있으라 하고 우리끼리 가죠 나현 씨 시우 씨.”
“그래도····”
나는 그들을 힐끔힐끔 보며 ‘나 너네 신경 쓰고 있어요’ 하는 티를 마구 냈다.
“호? 호오?”
그것이 최수정의 구미를 당긴 듯 최수정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기꾼을 꼭 끌어안았다.
그래 너 가져. 제발.
···아 아니 정신 차리자.
나는 지금 질투하는··· 사기꾼을 사랑··· 못 해 먹겠네. 아무튼 짝사랑하는 히로인 컨셉이다
“흐억.”
사기꾼은 붉어진 얼굴로 머뭇거렸다. 아 참 좋으시겠어요. 스킨십에 내성 없는 모솔 녀석은 이래서 안 된다.
“아!”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다.
최수정은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도발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사기꾼 같은 쓰레기 매물을 두고 다른 여자와 싸움을 하는 장면을 연출해야 한다니. 하··· 정말 괴롭다····
“····”
착한 ‘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차마 더 뭐라 할 수도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 정도 리액션이면 적당하겠지.
그때 앞만 보고 걷던 덤덤이가 최수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은 수련하러 가는 중이니 너무 그러진 말아 줬으면 좋겠어. 꼭 다른 목적으로 합류한 것 같아 보이잖아.”
그 말에 최수정은 흐흥 웃더니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이었어! 나현아 미안!”
“아니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어라 유한이랑 너랑 사귀는 거 아냐?”
최수정이 능청스레 말했고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거예요?”
나유리가 폭발했다. 하여간 어그로 끄는 실력이 정말 대단하다.
한바탕 따지려는 나유리를 말리고 진정시키고 달래며 수련장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온몸에 진이 다 빠져 있었다.
“1번부터 100번까지는 개인 수련장이고 단체 수련장은 그다음부터야. 내가 101번 방을 예약해 뒀어.”
“가자.”
“야호~!”
“가죠 나현 씨!”
진을 뺀 건 나뿐이었다.
나만 고생했다 나만. 주인공들은 둘 다 그냥 닥치고 있더라. 이럴 때 합 맞지 말라고 이 자식들아.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단체 수련장에서 나는 최수정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기꾼에게 다가갔다.
“그 유한아! 우리 태그로 연습해 볼래?”
태그.
이 세계에서는 두 명이 합을 맞추어 수련하는 걸 뜻한다.
나는 사기꾼에게 다가가 그 녀석의 귀에 입을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일부러 최수정을 의식하는 것처럼 힐끔힐끔 보면서 말이다.
“오늘 중요한 곳에 가잖아. 대비해 두면 좋을 것 같아.”
“아 그래야지.”
참고로 나유리는 사기꾼의 뒤에서 그를 죽여 버릴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왜 불타는 지옥이 유리 뒤에 보이는 것 같은지 모르겠다. 동공은 왜 풀려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진정해. 어허 주먹 쥔 손 풀어.
그러나 최수정은 거기에 쉽게 기름을 부어 버렸다.
“뭐야 뭐야? 둘이 같이 연습하게? 역시 썸은 타는 거지?”
“아 아니야!”
사기꾼은 가만히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뭐라고 좀 해 봐.
“아니에요.”
그때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절대로 아니에요.”
“으응? 그치만-”
“세계가 멸망해도 아니에요.”
고맙다. 나도 그렇게 생각 중이야.
내내 깐족대던 최수정은 나유리의 기백에 밀리고 말았는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 최수정의 꼬리가 펑 하고 부풀었다. 수인 혼혈이라 그런지 제법 고양이다운 면이 있구나.
“동생아 질투해?”
너는 왜 이 심각한 상황에 또 난리야 이 미친 사기꾼 자식아!
나유리의 목이 삐걱거리며 서서히 사기꾼을 돌아봤다.
난 여기에서 나가게 해 줬으면 좋겠다.
진화될 것 같았던 불꽃이 다시 타오르려는 찰나.
“시뮬레이터 준비 다 됐어.”
덤덤이가 끼어들었다.
정말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사기꾼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의 성실함 덕분에 살았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 나유리가 진지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죠.”
우리는 모두 닥치고 그 뒤를 따랐다. 거역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단 5인조 시뮬레이션으로 짜 뒀어. 배경은 도시에 나타난 돌출형 게이트.”
나는 방금 그 꼬라지를 보고도 태연하게 브리핑을 이어 나가는 덤덤이의 명경지수에 감탄했다.
어쨌든 수련실의 가장 큰 강점은 이런 시뮬레이션 기능이다.
환각 스킬을 이용해서 수련자들이 실제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디테일한 상황 설정도 가능하며 뛰어난 인공 지능이 돌발 상황을 연출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레벨을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실전과 같은 경험을 하기에는 좋다···고 태블릿에서 봤다.
“돌출형? 초반부터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거 아냐? 정지형으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사기꾼은 그 와중에도 정지형인 히든 피스 던전의 연습을 하고 싶은 듯 정지형 던전을 제안했다.
“정지형은 드무니까 아예 처음부터 돌출형에 익숙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덤덤이가 진지하게 그 말을 받는다.
둘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꼴은 제법 그림이 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차분한 인상의 흑발 벽안의 미청년과 고양이상의 흑발 적안의 미청년이니까.
사기꾼과 덤덤이의 논의에서도 드러나듯 이 세계에서 게이트의 형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마지막 한 마리를 처치할 때까지 몬스터가 끝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 웨이브식의 ‘돌출형 게이트’.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는 나올 수 없지만 우리가 그들이 사는 환경에 침입하는 던전인 ‘정지형 게이트’.
돌출형 게이트는 특히 ‘탑’에서 가까울수록 많이 나온다. 위험도가 높은 만큼 헌터들의 주 일거리이자 수입원이기도 하다.
정지형 게이트는 무작위로 아무 데나 열리는 게이트인데 항간에선 ‘잭팟’ 게이트라고도 부른다. 언제든 후퇴할 수 있어서 사냥이 편한 데다 보상도 빵빵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사기꾼과 내가 이따가 갈 던전도 정지형 게이트다.
소설에 따르면 사기꾼은 정지형의 이 ‘후퇴 가능한 점’을 이용해 꼼수를 부릴 작정이다.
어쨌든 둘의 토론은 꽤 길게 이어졌다. 말없이 듣기만 하던 나유리가 문득 걱정스러운 듯 나를 본다.
“나현 씨 괜찮겠어요? 나현 씨는 이런 본격적인 수련실은 처음인 걸로 알고 있는데····”
확실히 나는 레벨 1에 시뮬레이션 경험도 없는 F급이다. 이런 시뮬레이션에 익숙한 각성자 사회 출신의 나머지들에 비해서는 불리하겠지.
걱정해 주는 마음이 기꺼워 미소가 나왔다.
“수련장은 수련하라고 있는 곳이잖아? 뭐든 열심히 해 보지 뭐!”
니 오빠는 날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저 토론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강나현은 처음이니까 정지형이 낫다’는 핑곗거리로 써먹기 바쁜데.
역시 인격이 다르다. 빙의 전 인격으로 생각해 봐도 어떻게 이게 남매인지 궁금하다. 혹시 좋은 건 나유리가 싹 다 가져간 게 아닐까?
“그리고 앞으로도 수련은 계속 다 같이 할 거잖아. 도움이 되려면 처음부터 열심히 해야지!”
나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나를 이 파티의 고정 멤버로 각인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도 수련을 같이하는 멤버가 자연스럽게 파티 멤버로 자리 잡기도 했으니까.
···이렇게까지 친분을 빌미로 주요 인물들에게 붙어야 하는 내 신분이 좀 비참하긴 한데 어쩔 수 없다.
나는 밀려들어 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활짝 웃었다.
그때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덤덤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게 인사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나현 씨?”
“응! 지금 갈게!”
나는 묘한 위화감을 넘겨 버리고 다시 나유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