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상 사태에 대처하는 방법 (19)
나는 덤덤이를 돌아봤다.
그는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짙은 주홍빛을 그 얼굴에 드리우고 있었다.
붉게 물든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문득 어느 날 요새에서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그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알게 되니 자꾸만 눈에 밟히고’
요새에서 조급해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눈에 밟히니 마음에 걸리고’
그러다 그의 나약함을 알게 되었다.
그가 강한 척하려는 순간 나는 되레 그가 강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음에 걸리게 되니 좋아지게 돼서.’
그래서 마음에 걸린 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 자각한 마음을 내뱉었다.
‘좋아하니 진심으로 웃는 모습이 가장 예쁘다는 걸 알아서’
그래. 나는 그가 단순히 나의 말을 받아 주면서 인형처럼 잔잔히 웃어 주는 걸 바란 게 아니었다.
내가 널 의지하길 택한 순간 역설적이게도 나는 너도 날 의지하길 바랐다.
‘그래서 네가 웃을 수 있으면 해서.’
그래서 언제나 평온한 척하는 그 얼굴에서 진심 어린 미소를 끌어내고 싶었다. 나도 딱히 너와 다르진 않았던 거야.
“탑 안에 있는 거? 글쎄. 몬스터와 보물?”
그는 눈을 장난스레 빛내고 있었다. 마치 친구와 비밀 이야기를 하는 순진무구한 소년처럼.
그는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모험이 있다고 생각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자랑스레 보여 주듯 말하는 그에게 나는 기묘한 충격을 받았다.
엉엉 우는 모습까지 봤음에도 이제야 나는 그가 그 나이 또래의 소년처럼 보였다. 언제나 무덤덤하지 않은.
그가 탑을 본다. 꿈을 꾸는 소년의 얼굴을 한 채로.
“···있잖아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어쩌면 이기적인 이야기일지도 몰라.”
나는 문득 소설 속의 그를 떠올렸다. 게이트를 없애기 위한 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협력하던 그를.
그의 그런 성향은 마치 절대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설정처럼 느껴졌다. 늘 표정 변화 없이 제 책임에 몰두하는 그를 그래서 덤덤이라 칭했다.
“그래도 너에게 말하고 싶어.”
평소의 그는 늘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기계 장치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들어 줄래?”
나는 생기 넘치게 반짝이는 덤덤이 아니 박시우를 보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박시우가 웃었다.
그건 여태까지 본 적 없었던 정말 환한 미소여서 나는 비로소 그가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본 기분이 들었다.
* * *
어렸을 때 내가 칭얼거리면 할머니는 탑을 오를 때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곤 했어.
무한히 순환하는 폭포 먹으면 몸이 다양하게 변하는 버섯들 하늘을 나는 가오리와 온몸에 보석이 박힌 고래.
다가오는 수많은 고난과 미지. 그 이상의 기쁨과 사람들의 환호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등을 기꺼이 맡길 수 있는 동료들.
“할머니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셨네.”
그래. 환상적인 모험이었어. 동경할 만한 모험이었지.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던 철없던 나는 꿈을 꿨어. 언젠가 나도 할머니처럼 공략대를 꾸려서 저 탑을 모험하고 싶다고.
···부끄럽지만 그랬어.
“그게 뭐가 부끄러워? ···남한테 빈대 붙어서 돈을 벌겠다는 발상이 훨씬 더 부끄러운걸.”
···그런가.
그 후 탑이 봉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게이트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할머니가 슬퍼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죄책감에 시달렸어. 사람들은 할머니를 비난하면서도 자신들을 지킬 사람을 찾았지.
용사가 필요했어.
하지만 이제 필요한 건 탑을 오르는 용사가 아니라 게이트를 닫는 용사였고 나는 용사가 되기로 했어.
그리고 나는 푸른 황혼에게 선택받았어.
이른 각성이었지. 모두가 기뻐했어.
내가 카메라 앞으로 나서면 다음 날 기사가 나왔어. 모두가 안심했어.
그래서 나는 용사인 채로 8년을 살았어.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내가 용사라는 사실에 너무 빠져 있었던 걸지도 몰라.
용사는 마땅히 게이트를 없애야 해.
용사는 마땅히 모두를 위해야 해.
용사는 마땅히 앞서야 해.
용사는 마땅히···
“개소리 말라 그래.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고마워. 이번에 그 생각이 바뀌었어.
나는 뭘까? 나는 뭘 위해서 용사를 하고 있었던 걸까? 용사가 아닌 나는 뭘 원할까?
그런 생각을 했어.
게이트로 인해 죽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그건 내가 용사가 아니더라도 할 일이야. 할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품은 내 꿈이야. 그 꿈을 이루고 싶어.
그리고···
아니야.
“바보.”
····
“그거 말고도 더 있잖아.”
···그건
“말해 봐. 뭘 이제 와서 망설여?”
···그것도 그런가.
···꿈을
* * *
“어릴 적의 꿈을 이루고 싶어졌어.”
푸른 사파이어색 눈이 울 듯이 일그러진다.
“이상하지?”
“뭐가 이상해?”
“···내 꿈이. 이런 상황임에도.”
나는 저 멀리에 있는 탑을 보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이 세상엔 정말 별별 이상한 일이 다 일어나.”
환생이나 빙의. 뭐 그런 거?
“근데 어릴 적 꿈을 이루고 싶다든가 금지된 구역에서 모험을 하고 싶다는 꿈 정도가 이상할 것 같아?”
내 말에 박시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동료도 가지고 싶어.”
“그럼 혼자 가게? 그러다 객사한다?”
“탑의 끝도 보고 싶어.”
“대충 평생 오르면 끝이 보이지 않을까?”
“···너와 함께 탑을 오르고 싶어.”
그 말에 나는 무심코 박시우를 돌아봤다. 박시우는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곤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공략대에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뒀다고 해.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곁에 뒀어.”
그 손은 조심스럽게 내 앞에서 멈췄다.
“나는 너를 곁에 두고 싶어. 바보 같은 이야기지만 함께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 순간 바보 같은 꿈을 꿔 버렸다.
새로운 풍경에서 그의 곁에서 모험을 하는 나를 떠올린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꿈을 꾸게 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이 정도 꿈은 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버려서.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좋아.”
나는 씨익 웃었다.
이건 정말정말 생산성 없고 바보 같은 이야기다.
“모든 게이트가 사라지면 실직자니까. 미리 취직해 둘래.”
그래서 심장이 뛰었다. 나를 둘러싼 어떤 현실도 이 꿈에는 끼어들지 못했기에 심장이 뛰었다.
“박시우 나를 네 ‘공략대’의 첫 동료로 받아 주겠어?”
내 말에 그가 웃었다.
“물론이야.”
관람차가 정상에 올라 있었다. 온 세상이 미니어처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순간이 금방 잊힐 환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네 웃는 얼굴도 맞잡은 손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나는 웃었다.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바보같이 웃었다.
덜컹.
환상은 여기까지라는 선고처럼 우리가 탄 관람차가 아래를 향해 내려간다.
해는 완전히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하지만 나와 덤덤이의 장난스러운 미래 계획은 한동안 이어졌다. 우리는 괜히 소곤대며 언젠가 함께 세울 공략대의 규칙을 미리 정했다.
그렇게 현장 실습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끝났다.
* * *
놀이공원에서 돌아가는 길.
“둘이 뭔가 가까워지지 않았어?”
“그런가?”
민재윤이 무언가를 감지한 듯 강나현과 박시우를 보며 말을 붙였다.
“가까워진 건 너희 둘 아냐? 이제 거의 절친 같은데?”
“정말? 좋아!”
“저 저 절친···! 나 나야 상관없지만! 재윤이가 원한다면!”
“우리 절친 아냐···?”
“윽···! 마 마 마 맞아! 맞으니까 그렇게 시무룩해지지 마!”
신바란과 민재윤은 금세 다시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둔 채로 박시우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무겁게 느껴졌던 성검도 지금만큼은 가볍게만 느껴졌다.
저 멀리 탑이 보인다. 하지만 박시우는 탑을 보지 않았다. 그는 놀이공원을 봤다.
정확히는 대관람차를 봤다.
랜드 마크라는 말에 걸맞게 거대한 대관람차가 둥근 원을 그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좋아 절친이 된 걸 축하해~.”
강나현이 박수를 짝짝 치는 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박시우는 괜히 대관람차의 원을 따라 손가락으로 창에 원을 그렸다.
강나현은 박시우가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생각했지만 박시우는 숨기고 있는 비밀이 하나 더 있었다.
어느새 그의 마음에 스며들어 와 단단히 열매를 맺어 버린 뒤늦게 자각해 버린 어느 마음에 대한 비밀이다.
박시우는 강나현이 얼마나 촉박하고 여유 없는 삶을 사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바람에 손해 보고야 마는 바보 같은 면모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근데 나 좀 외롭다····”
“아앗!”
“미 미안해!”
“농담이야.”
박시우는 강나현이 민재윤과 신바란을 신경 쓰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가 스스로의 마음을 고백한다면 그녀는 그를 신경 쓰고 만다. 불필요할 정도로. 그녀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그건 그가 이길 수 있는 방식이었으나 그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었다.
“박시우 뭐 해?”
그래서 그는 지금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지금은 친구로 만족하자.
괜찮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제 마음을 자각하지 못한 나유한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자신이.
“이리 와.”
좋아해. 네게 더 깊은 마음을 품게 되었어. 나와 오래도록 함께해 줘.
“그래.”
언젠가 너에게 이 말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튀어나오려는 갈망 어린 말을 삼키며 박시우는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고백을 조용히 삭였다.
* * *
[시스템 업데이트 중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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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업데이트 중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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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업데이트 중 : 100%]
[시스템 업데이트 완료]
[‘이야기의 파편’이 활성화됩니다.]
[현재 수집한 이야기의 파편 : 3개]
* * *
“미안하다.”
이것이 나와 민재윤이 요새를 벗어나기 전 신바른에게서 들은 한마디였다.
그 말을 들은 민재윤은 아주아주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그 말에 신바른은 죄책감 어린 얼굴로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 보여 준 활약을 근거로 해서 너희들이 안전한 인간임을 보증했다. 내 이름으로 증명해 뒀으니 곧 감시가 해제될 거다.”
“감사합니다!”
민재윤의 말에 신바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더군.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다오.”
그 말에 나는 괜히 투덜거렸다.
“그렇게 막 퍼 주다가 잘못 걸리면 큰일 나요.”
“괜찮다. 너희들이니까.”
“···”
“나현아 얼굴 빨개졌어.”
시끄러. 알아. 나는 민재윤의 말에 괜히 손등으로 뺨을 식히며 고개를 획 돌렸다.
신바른은 쓸데없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왠지 더 재수 없게 느껴졌다.
저 인간 신바란이랑 대화를 한 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해탈이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다.
“···어쨌든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요새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