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0
본래 장수는 선두에 서지 않는 법이었다·
군을 지휘해야 할 장수가 나를 따르라 외치며 호기롭게 돌격하면 그 모습이 보기는 좋았다·
하지만 그러다 화살 맞고 드러눕기라도 하면 군대의 사기는 일시에 박살이 나고 지휘자를 잃은 병법이 그대로 물거품이었다·
그러니 장수가 선두에 서는 것이 전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이기심이지 절대 미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가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지존 호소인이 직접 원정에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
높은 왕좌에 근엄하게 앉아서 그저 아랫것들이 가져다 바치는 천마혼을 취하면 그만이다·
심지어 현 지존은 마교 지도자들이 운영하는 회의에조차 부르지 않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호소인이 위험할 수 있는 천마혼 원정에 한 자리 떡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야말로 이상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마교 지존이 여기에 있었다·
왜냐하면 천마혼이란 감히 사람이 운반할 수 없는 자격 없는 자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교의 신물이기 때문이었다·
지존이 직접 취해야 하는 물건이었으니까·
남의 물건을 탐낸 청이 그 대가를 치렀다·
갑자기 바닥이 꺼져버린 것처럼 대지가 중력으로 잡아당기는 추락의 아찔함 온 영혼을 집어삼켰다·
청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편·
청의 신체는 또 신체대로 수난이었다·
손아귀를 반쯤 파고든 천마혼에서 매캐하고 묵직한 질감의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졌다·
파천마기·
마신 앙그라 마이뉴가 세상의 절망들을 뭉쳐 빚어낸 악의의 결정이었다·
마기가 청의 신체를 집어삼키고 사방 천지로 뻗어나가 회오리치며 휘돌았다·
그리하여 묘실 한복판 우주의 형상을 한 암흑이 장엄한 소용돌이를 그렸다·
그 모습에 지승주가 고개를 저었다·
이송 시에 신교 요인의 대가리를 깰 때부터 언제고 날뛰다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미련하게 제 죽을 줄도 모를 줄이야·
파천마기는 사람이 다룰 수 없는 기운이다·
그나마도 마를 품은 혈통으로 어려서 특별한 시술로 혈맥을 보하고 신맥의 기본공을 연마하여 단련해야만 겨우 천마혼을 품는 그릇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가 파천마기를 품으면 악의 그 자체인 거친 마기를 감당하지 못한 신체가 산산이 조각이 나 터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몸 잃은 마기는 천마혼으로 되돌아오니 그저 아무 의미도 없는 개죽음이 될 뿐이었다·
지승수가 그렇게 혀를 쯧쯧 찰 때였다·
“안 돼···”
곁에서 최리옹이 털썩 주저앉았다·
지승주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전마군만 안쓰럽게 되었다·
지승주는 진법 속에서 청의 시체를 보았다·
신화전을 본뜬 환상 속의 장소에 피투성이로 널브러진 시체였다·
그러나 청은 멀쩡히 살아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청이 밉다 못해서 환상으로 만들어 죽인 줄만 알았다· 아니면 시간 취향의 마두가 즐긴 흔적이겠거니·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환상의 주인이 바로 자전마군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청을 대하는 바가 석연치 않더라니·
진법 속에 정신이 완전히 뒤틀려버린 것이다·
청과 죽은 딸이 뒤섞여 하나가 되었으니 그 딸의 시체가 청의 형상을 하게 되었겠지·
덕분에 딸이 죽는 두 번이나 목격하게 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최리옹은 진작부터 죽은 노인이었다·
그보다는 못난 지존을 토닥여야 할 때였다·
지존은 아직도 잃어버린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지승수가 지존에게 다가갈 때였다·
“오오 천마께서!”
“천마께서 강림하신다!”
흥분한 외침들·
지승주의 고개가 팩 돌아가고 곧 어린 마뇌가 눈을 부릅떴다·
우주의 형상으로 휘돌던 마기가 찰나의 순간 한 점이 되어 수축되었다·
너무 검어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뒤이어 두 갈래로 치솟는 어둠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펴니 사나운 화염처럼 검게 타오르며 묘실을 가득 메웠다·
거대한 날개다· 날개가 눈을 뜬다·
제멋대로의 순서대로 수천의 눈들이 흉악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작고 크고 기울어진 각자의 눈들은 눈동자의 갯수조차 제멋대로였다·
어떤 눈의 눈동자는 하나요 또 둘이요 또 셋이며 또 그보다 많은 것들도 존재했다·
검은 장벽처럼 펼쳐진 날개를 편 여인·
날개에는 수천의 눈과 그보다 많은 눈동자·
그 신화적인 악의의 현신을 마주한 교인들이 무릎을 땅에 붙였다·
짧으나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른다·
어느새 날개는 자취를 감추어 보이지 않고·
그 가운데 소녀가 사람의 첫 숨을 내쉬었다·
천마재림·
신교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
눈을 뜨자 주변이 이미 깜깜했다·
청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다! 천마혼!”
드륵 밀리는 소리와 함께 콰당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청이 고개를 돌려 살피다 다섯 다리에 바퀴 달린 의자를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라····
청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암막 커튼으로 빛 한 점 들지 않는 방 그저 모니터가 어설프게 비추는 불빛만으로 침침한 방 안이었다·
생소하여 낯선 기분이지만 동시에 익숙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청이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엘이디 전등이 순식간에 어둠을 몰아냈다·
싱크대 옆에는 138L 들이 냉장고가 하나·
청이 반사적으로 냉장고를 열어 자연스럽게 맥주 한 캔을 꺼내들었다·
철컥 뚜껑을 따고 입에 나발을 부니 차갑다 못해 시린 맥주가 식도를 할퀴며 파고들었다·
“캬아· 시워언 하다· 후·”
찬 맥주가 빈속을 후볐다·
그제야 멍한 정신이 또렷하게 자리를 잡았다·
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개꿈이야?
게임 속에 들어가다니·
청이 일단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열 시 이십삼 분이었다·
가만 있자·
내가 야간 교대였나 주간 교대였나?
주야 교대는 중대 사항이었다·
취침 시간과 관련이 되어있으니 며칠이라도 생체 리듬을 유지하려는 그나마 몸을 보전하는 생산직의 지혜였다·
주간 교대면 지금 자야겠고 야간 교대라면 밤을 새고 아침에 자야 하니까·
그런데 근무표가 도대체 기억이 안 났다·
당연하지 그게 몇 년 전인데·
아니 몇 년은 무슨· 꿈속에서나 그렇지·
근데 진짜 몇 년은 지난 기분인데·
청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청이 책상을 훑었다·
익숙한 스마트폰을 들어 기억나지 않는 패턴을 저도 모르게 슥슥 그었다·
뭘 잘못 터치한 모양인지 잠금이 풀리자마자 곧장 카메라 어플이 켜졌다·
화면에 비치는 예쁜 소녀의 얼굴·
“어?”
청이 놀라서 스마트폰 액정을 살폈다·
오른쪽 귀 위로 머리카락이 한 뭉탱이나 풀려 나풀거리는 것이었다·
청이 능숙하게 머리를 풀고 다시 묶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묘한 것이···
-여인의 몸이로군? 신맥에는 여인이 태어나지 않을 텐데?
갑자기 들린 음성이었다·
청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고운 목소리였다·
화면에는 게임 속 풍경이 비쳤다·
유려한 화풍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소녀가 비치고 하단의 레터박스에는 말을 마친 대사가 지워지며 새로운 문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청이 레터박스 안의 지문을 읽어내렸다·
[천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천마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여인의 몸이로군? 신맥에는 여인이 태어나지 않을 텐데?”
천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가슴팍에 묵직한 것을 매달아서인지 어깨춤이 영 찌뿌둥했다· 덕분에 선 자세도 어쩐지 어색하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수십 번의 삶을 살았으나 여인의 몸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신체를 관조한 천마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근육은 한철을 꼬아 만든 듯하여 능히 산을 들어 올릴 용력을 품었고 힘줄은 질기나 또한 유연한 것이 천마가 아는 사람의 한계를 진작 뛰어넘었다·
그리고 단전의 광활함은 그간 겪은 어떤 신체보다도 경이로워 감히 인간의 것이라고 칭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역대 신체들 중 파천마기를 온전히 감당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체가 조금씩 상하니 천마가 강림하여 오래도록 지상에 있지 못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 몸은 어떠한가·
파천마기를 온전히 제 안에 가두고도 아직도 여유가 남아 다른 것이 존재할 정도였다·
천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단전에서 휘몰아치는 파천마기를 피해 상단전으로 꼭꼭 숨어든 진기가 있었으므로·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음양으로 통일되지 않아 상극으로 부딪쳐야 마땅한 진기들이 기묘하게도 하나로 단단하게 뭉쳐 상단전 구석에 진을 쳤다·
마치 무언가를 지키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리 중요한 위치는 아니었다·
천마가 금세 신경을 끄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여인이면 또 어떠하랴· 마음에 꼭 드는 몸이로군· 이런 신체를 하고서는 고작 절정이라· 어지간히도 재능이 없었던 모양이지?”
수십의 교인들이 꿇은 묘실이나 감히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고요한 장소기도 했다·
이 정적을 깨고 우두둑 하고 비틀리며 뼈가 부대끼는 소리가 흐르기 시작한다·
천마의 신체에서부터 나는 소리였다·
뻐가 자리를 잡고 근육이 다시 꼬여 붙으니 꿈틀거리며 살가죽이 올록볼록 튀어나왔다·
이를 환골탈태라 했다·
뼈를 바꾸어 가장 완벽한 형태를 취한다는 말그대로 초절정에 이른 신체가 다시 조립되어 가능한 최고의 형태로 탈바꿈하는 현상이다·
달리 말해 육체의 최적화라고 할 수 있었다·
천마가 환골탈태의 도중임에도 계속 걸었다·
실로 놀라운 기예였다·
환골탈태의 순간에는 누구나 무방비했다·
모든 관절이 이탈하여 뼈가 자라거나 깎이며 근육이 풀렸다가 압축되어 붙는 과정이다·
초절정 이후 생에 단 한 번을 겪는 일이다·
고통과 더불어 몸이 재조립되는 기묘한 감각 속에 당황해 정신을 놓을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천마는 이미 익숙해질 만큼 겪었다·
환골탈태가 이루어지면서도 한 번을 비틀대지 않고 걸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마침내 천마가 다시 여인의 형상으로 조립을 마쳤을 때는 어둠마저 부끄러워 흑의 장막을 사릴 듯한 절세의 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뇌 있나? 이번 대의 마뇌는 누구지?”
“천마강림 만마앙복· 소인 지승주입니다· 이 영혼과 미래의 주인을 뵙습니다·”
지승주가 나서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천마가 희고 늘씬한 손가락을 뻗었다·
아름다운 손이 지승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호라· 아직 어린 마뇌로구나· 이리 젊은 마뇌는 오랜 삶을 통틀어 처음이야· 그렇기에 오래도록 곁에 둘 것이니 내 더욱 기껍구나· 앞으로 잘 부탁하도록 하마·”
천마의 말은 부드럽고 자애로웠다·
신교의 긴 역사 그 자체이자 현인신이신 천마지존의 말씀이었다·
“예 천마지존이시여·”
지승주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떨렸다·
그때였다·
“천마지존이시여! 여기에 신체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취하실 제대로 된 신체입니다!”
감히 허락받지 않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파라락 짓쳐 드는 늙은이가 있었다·
지존의 목덜미를 쥐고 바닥에 메쳐놓고는 그 위를 짓누르며 무릎을 꿇더니 이어 불경하게 발언의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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