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6
청이 작전 회의에 참여한다고 하니 막 떠오른 장면은 이러했다·
모형으로 멋들어지게 만든 당가의 전경·
그리고 일차 이차 삼차로 이어지는 편제 및 교대의 체계적인 작전 계획으로 복잡한 칠판과 잔뜩 붙은 종이들·
심각하고 묵직하게 이어지는 분위기·
그리고 그 끝에 전의를 끌어올리는 멋진 대사까지·
그러나 현실은 와장창이었다·
대충 그려진 지도를 둘러싸고 당가 어르신들 모두 모여 팔다리 주무르면서 잡담이나 하는 광경이었으니까·
뭐지 작전 회의라고 안 했나?
청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어르신 한 분이 당난아를 보며 예뻐 죽겠다는 눈빛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흔히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는 그 눈빛이었다·
“아아야 잠을 못 잤느냐? 허허· 친구와 밤을 새워 이야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러자 당난아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귓불 끝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하하 부끄러울 것이 무에 있겠느냐· 본래 좋은 친구를 사귐에 당연히 한 침상에서 누워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진정한 친구가 아니겠느냐·”
어르신은 그 이유를 달리 본 모양이었지만·
“이 늙은이도 소싯적엔 친구들과 많이도 함께 누웠단다· 함께 누워 별을 보며 이야기하더라면 풍찬노숙의 어려움이 별것 아니었으니· 그 시절이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아름다웠구나·”
“그러니 아아도 젊은 날에 친구와 많이 웃고 울고 다투고 또 누워 이야기하거라· 손백부와 주공근이 그러했듯이·”
“유씨 삼형제가 그러했듯이·”
“백아와 종자기를 빼놓을 텐가?”
“관중과 포숙 역시 한 침상을 썼고·”
“노요와 마력도·”
“예끼 이 사람아· 노요와 마력은 지어낸 사람 아닌가·”
“그야 모르는 일 아닌가? 이름이 그게 아니되 전해 듣고 쓴 이야기일 수도 있지·”
어르신들 수다가 아옹다옹 친하게 이어졌다·
청이 이참에 미심쩍은 바를 다시 확인했다·
“그 친구 사이에는 한 침상을 쓰는 게···”
“그럼· 진정한 친우를 맞이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모름지기···”
당난아가 거짓말은 안 했지만 속이긴 했다·
그게 친구와 한 번쯤 한 침상을 써 보고 싶다는 앙큼한 이유였으니 참작을 해 줄 수는 있을 것이지만·
사실 한 침상에 누워 같은 이불을 덮는다는 말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뜻이다·
가정이 어려우니 한 침대 위에 한 이불 덮고 사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똘똘 뭉쳐 이겨낸 사이가 보통 끈끈하겠는가·
원래 서로 잘 사는 친구들은 형제간에도 각방 쓰면서 부대낄 일이 없다·
당가의 어르신들은 어릴 때도 잘 살았으니 또 다른 뜻으로 하는 말이었다·
땅이 침상이요 하늘이 이불이라며 무림행에 어울리며 노숙을 같이했다는 말을 돌려 표현한 것이다·
어르신들이 당난아의 악랄한 사기 행각을 알지 못했으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 결국 참으로 진솔한 태도였다·
젊은이가 아는 거 물어봐서 신이 나 대답하는 그 특유의 태도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청도 완전히 의심을 접었다·
대신 반성했다·
장명이가 많이 실망했겠는걸·
이번에 돌아가면 같이 자야 하나?
그치만 장명이는 미성년자고···
국법이 지엄한데 어찌 미성년자와 한 침상을 쓴단 말인가·
어쩌면 세계의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는 역천 파세의 위험천만한 행위가 될 수도 있었으니·
“그런데 작전 회의는요?”
“허허· 작전이야 진즉 세워 마치지 않았겠니· 본래 위험에 대비하기는 미리 준비하여 상시로 경계하여 온 일이니 인제사 작전을 짜겠다고 분주하면 그야말로 망해도 싼 일이지·”
미리 주요한 위험에 대비한 계획이 다 있어서 그리 손볼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성세한 가문의 저력이었다·
“그럼 굳이 왜 여기 모여들 계시는데요?”
“그렇다고 가문의 어른들이 한량같이 놀고 있어서야 아이들이 방만하여 정신을 못 차릴 것인즉 우리부터 심각해야 아래가 본받지 않겠느냐·”
“아····”
“다만 아아의 친구라면 당가의 외인이라 할 수 없으니 작전을 알아야겠지 않느냐·”
“그럼 아아와 한 침상을 쓴 친구인데·”
“아아의 친구라면 어쩔 수 없지·”
“우리 아아에게도 드디어 친구가···”
“아니 뭐라는 거에욧!”
당난아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청이 적어도 하나는 알았다·
얘 역시 친구 없구나·
친구 없는 애한테 친구 해주는 것도 선업으로 쳐줄까?
오죽하면 가문 어르신들이 거의 딸 보는 눈빛으로 지켜보겠어·
“흠 흠· 어르신들 그쯤 해 두시지요·”
당가주 당투죽이 상황을 가볍게 정리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당가타는 사지란다· 준비 없이 발을 들여서는 살아서 나갈 수 없으니· 아아가 화단에 발을 들이지 말라 당부해 주지 않았더냐?”
“네· 함정을 종류별로 쫙 깔아두었다고····”
당가에는 쓰잘데없이 화단이 많았다·
담벼락의 앞뒤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공간이 나온 장소에는 큰 돌들로 둘러 화단을 조성해 놓았다·
평시에는 독초 따위를 기르거나 독물을 풀어 키우는 데에 쓰고 전시에는 곧장 질려를 뿌려 적을 저지하는 데에 썼다·
“다른 식객분들에겐 객청에 방어 계획을 전달해 드렸다마는 네가 정파무림의 정통한 식구이기도 하고· 게다가 딸아이의 친구라 외인이라 할 수 없지· 그러니 본 가문과 함께 적을 맞이하겠느냐?”
“네· 그럴려구 남았으니까요·”
그러자 당투죽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아에게 이런 좋은 친우가 생기다니···”
종잡을 수 없는 중년의 감수성이었다·
“당가타는 난공불락의 요새란다· 화포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포대를 제거하기만 하면 능히 일만의 군세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독에 더해 진법까지 설치가 된 당가타는 중원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라고 자부할 정도였다·
게다가 당가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무천대제 이후 제대로 드러난 일이 없었다·
당가가 의술에 주력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독으로 발전하기 힘들다는 판단 또한 포함된 것임을·
문제는 화포였다·
일단 당가타로 들어와야 독을 찌르건 마시게 하건 하독할 수 있는 것이다·
멀리서 화포 빵빵 쏴서 집안이 쑥대밭 폐허가 되어버리고 나면 진법이고 독이고 뭐 하나 써 볼 기회조차 없다·
“그러니 화포만 제거하고 나면 우리가 이기는 것이다· 그러니 위치를 특정할 때까지 최대한 충돌 없이 버텨야 한다·”
그래서 전투는 말싸움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사천당가는 정파무림의 일원이다·
게다가 의술을 무료로 베풀기도 하고 또한 농약을 개발 개량하는 얼마 안 되는 단체기도 했다·
농약으로 인한 곡물과 과실의 생산량이 얼마나 증대되는지는 질소 비료 이전 농업의 분기라고 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당가의 높은 선업이 여기서 비롯했다·
물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의술은 무료 농약은 저렴하니 두둑한 인망을 사는 당가를 대뜸 공격하기란 황실의 입장에서도 퍽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잘못하면 정파 무림이 벌떼같이 일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동조하는 양민들까지 나타나게 되면 황건적 홍건적에 이어 당건적이 출몰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현재의 관부가 워낙에 하는 일 없이 빼앗기만 하여 인심을 잃은 탓이 제일 크기는 하지만·
그러니 감찰사는 공격에 앞서 최대한 꼬투리를 잡아 확실한 역모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할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흠·”
당투죽이 민망한 듯이 헛기침을 했다·
“뭔데요?”
“···빌미를 주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최대한 대치를 이어가며 자리 잡은 화포들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곧장 포대를 제거하고 적을 끌어들여 섬멸한다·
다만 그 버티는 과정이 적지 않은 수모가 될 것이라고·
작정하고 시비를 걸러 온 놈들에게 먼저 손을 써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안 그러면 깽값으로 역모죄를 물어야 하니까·
삼국지에서도 그렇듯이 중원 사람에게 명분이란 체면이요 체면이란 또 생명과도 같은 것이 아니던가·
조져야겠다고 대뜸 칼을 뽑아들었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공적 개새끼 취급이니 남들의 눈치 봐서 적당히 칼질해야 하는 것이다·
무림이 사실 깡패들 집단에 불과함에도 나름 크게 충돌 없이 역사를 이어가는 거의 유일한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물론 대뜸 싸우자는 놈들도 있기는 했다·
때 되면 쳐들어오는 마교 놈들이 그랬다·
그래도 마교는 명분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조상의 복수란 예로부터 잘 먹힌 명분이니까·
그보다는 혈교 새끼들이 제일 악질이었다·
광인 이상성욕자 약쟁이 식인종 등등 세상 개잡놈들 전부 다 모인 집단으로 그냥 세상을 피로 물들이고 싶다고 혈사를 일으키니 한 번 발호하면 아주 난장판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관부가 그런 식일 수는 없었다·
명분의 다른 말은 정통성이다·
관부의 약점은 항상 정통성이었다·
당장 황조를 갈아치우자며 일어나 팔왕재림 오호십육국으로 대륙 분할이 났던 역사가 있었으니까·
사정을 전해 들은 청이 생각했다·
아· 무림이라고 그냥 대뜸 쳐라 막아라 하고 투닥투닥 생사결을 벌이는 게 아니었구나·
의외로 복잡한 구석이 있네 하고·
—-
청의 선업 점수는 현재 삼천 점을 넘겼다·
이 기막힌 상승에는 첫 번째 위기를 극복한 보상으로 얻은 천 점의 선업치가 주효했다·
임무창에 화합의 길이니 숨겨진 최대 업적이니 어쩌니 호들갑 그 자체를 글씨로 떨어대며 준 선업이었다·
이러면 위기를 넘긴 보람도 있다고 할까·
그러면 무공이 세 개·
청이 다시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혹시 어찌 될지 모르는 결전인데 선업교환 아끼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일단 역근세수경은 좀 애매하지 않나?
근골을 키워주고 단전과 혈맥을 튼튼하게 가꿔주는데 큰 효능이 있는 무공·
그러나 이미 신체 능력은 사람을 초월한 상태이며 단전과 혈맥은 튼튼한 게 아니라 아주 무적이라 온갖 내공이 흘러도 멀쩡한 상태다·
익혀봐야 사부님한테 자랑할 거리 하나 생기는 게 전부인데·
그러면 별로 효과도 없는 무공을 굳이 익혀야 할 필요가···
있지!
사부님 좋아하실텐데 이걸 안 익혀?
교환할 무공이 세 개나 되는데 개중 하나는 효도하는 셈 치구·
청이 나중에 아까울까 봐서 곧장 교환했다·
뇌가 뒤집어지는 기분에 으걱어걱 정신 나간 벙어리 흉내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단전 내에서 도가의 적폐 세력들이 다시 환호성을 울렸다·
대정선공이 반갑게 부처님 손 모양을 내미니 역근세수경 또한 같은 모양의 손을 높이 들어 서로 짝 마주쳤다·
“으에에···”
청이야 그저 머리속이 탁하니 한참이나 그리 누워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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