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0
사실 서문수린의 걱정은 합당한 것이었다·
청이 마교에서 눈이 돌아갔다가 대정선공의 가르침에 극적으로 상태를 회복했을 때 하늘의 흉성이 노여움과 아쉬움으로 붉은빛을 냈더란다·
이 별의 뜻을 읽은 서문수린이 제자가 크나큰 위기를 넘겼음에 안도하여 밤중에 제를 올리지 않았던가·
사실 그때부터 근심이 천만이었으니 여리고 착한 데에다 영 모질지 못한 제자가 저 풍진 강호 비정한 곳에서 몸이든 마음이든 다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리고 가을은 깊어가 돌아올 때는 지났는데 어째 제자는 오지 않는다·
그러다 장 보러 나간 제자가 소식을 물어오길 사천에 큰 흉사가 있어서 반란이 어쩌구 암살 모의가 저쩌구 하는데 청의 이름이 끼었다나 뭐라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서문수린이 어검비행 고절한 수법으로 사천 분지의 높은 산 천혜의 울타리를 한걸음으로 넘어 성도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서문수린은 예의와 법도를 아는 도가의 큰 어르신이기에 도착한 야밤중에 당가의 문을 두드리는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일단 방을 잡아 하룻밤 보내고· 의복을 정제하여 찾아가도 폐가 되지 않을 사시 경(열 시)에 맞추어 당가에 찾아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제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해가 중천에 떠서 천하의 모든 이가 밝아온 태양의 양기 아래 한참 부지런한 시간임에도 그저 비단금침 호화로운 침대 위에 널브러져 꿈나라를 헤메고 있는 제자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계집년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홀딱 벗어 찬 것이라고는 가슴의 붕대뿐이요 이불 걷어차 팔다리 대자로 쫙 뻗어 보는 이가 다 수치스러운 꼴이었다·
서문수린의 분노 막대가 확 치솟았다·
현경의 고수가 분노하자 그 자체만으로 대기가 진동하고 중력은 배가되어 공간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뿜어져나왔다·
그 기세에 제자가 살포시 눈을 뜨니 시선이 마주치자 초점 잡지 못한 몽롱한 표정이나마 배시시 천진한 미소를 터뜨리는 것이다·
“헤헤 사부님이다···· 보고 싶어요····”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아 쌕쌕 고운 숨소리를 냈다·
한계를 넘었던 서문수린의 분노 막대가 주춤하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애가 무사하면 됐지·
어차피 자는 모습 누구 보여줄 것도 아닌데 좀 추하면 아니 굉장히 추하면 또 어떠하랴·
게다가 못 본 사이에 얼굴은 더 곱게 어려졌으며 팔다리는 길쭉하니 환골탈태를 이룬 것이 분명하렷다·
초절정이 아닌 것은 아쉽다만 사실 깨달음을 붙잡지 못하고 날려먹으면 경지는 그대로이나 신체만 변하는 것이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놓친 깨달음은 머지않아 다시 찾아오게 되어있으니 아쉬워할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굳이 가슴에만 붕대를 차고 있나?
핏자국도 혈향도 없기는 하나 향긋한 약 내음이 비쳐 서문수린의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문수린이 손을 뻗자 청의 가슴팍의 붕대가 슬며시 끌어내려지며 안쪽을 슬쩍 비췄다·
거기에 드러나는 흉하게 실로 꿰어진 상처!
조금만 깊었으면 갈빗대요 더 깊었으면 심장까지 토막이 났을 끔찍한 궤적이었다·
얘가 아파서 약 먹고 누웠나 싶어 급히 다가가 맥을 짚어보니 이전과는 천지개벽 수준으로 발달한 건강한 혈도와 그리고 무수한 마공의 흔적···
서문수린의 분노 막대가 일시에 솟구치며 그 천장을 뚫고 폭발했다·
“네-이-년-!”
따악-!!!
—-
양쪽 눈꺼풀 안쪽으로 그렁그렁하게 눈물방울 매단 채로 머리 한구석이 볼록하게 솟은 청이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번쩍 들었다·
“계집년이 몸뚱이 마구 굴리다 아주 대문짝만하게 한 획을 그었구나· 장하다 장해·”
“그 흉터는 안 남게 해준다고 해서···”
“하? 아주 자랑이구나· 그럼 대체 덕지덕지 기워붙인 그 마기는 무엇이더냐? 마공도 후에 없던 것처럼 사라진다더냐?”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라?”
“헤헤· 제자가 사부님을 뵈어요· 보고 싶었어요· 많이요·”
청이 손 든 상태에서 자연스레 상체를 굽혀 큰절을 올렸다·
서문수린이 높은 경지로 반로환동을 이루어 외양이 귀부인일 뿐 살기야 최리옹보다도 더 오래 산 무림의 대선배였다·
그만큼 살았으니 청이 올리는 인사가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려 하는 흉내가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절절하게 그리움 담겨서 진심만 가득 채웠으니 그간에 서운함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그에 서문수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보고 싶었다는 년이 팔자 좋게 남의 집에서 퍼질러 누워 있었더냐·”
“흉이 안 남게 해준대서요· 걱정하실까 봐·”
남은 서운함도 마저 녹아나는 한 마디였다·
그렇다고 곧장 용서해 주기도 싫은 서문수린이 괜히 뾰족한 소리를 했다·
“하· 제자년 가슴 쪼개질 뻔한 것도 모르는 병신 스승을 만들려고 작당을 했구나·”
“헤헤· 사실 가슴은 이미 쪼개졌· 악!”
따악!!
청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악· 맞은 데 또 맞았어!
현경의 고수는 조준이 흔들리지 않는 법·
심지어 거리를 무시한 채로 매질을 뛰어넘어 타격하는 양자얽힘 초격공 핵꿀밤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무공은 과학마저 초월한다·
머리에 불이 나도록 문지르던 청이 서문수린의 사나운 눈빛을 보고 찔끔하여 다시 양 손을 번쩍 들어 자세를 잡았다·
“하아· 어찌 말년에 제자라는 년이 심성 하나 빼고는 마음에 차는 구석이 없구나·”
만약 지옥이 실존하여 그 안에 불타는 수많은 악인들이 들었다면 경지를 똥구멍으로 먹었다면서 쌍욕을 할 소리였다·
“그래· 그런데 대체 무슨 놈의 마공을 그리 익혔느냐? 내 분명 멀리하라 당부하였건만·”
“그게요· 제자도 익히고 싶어서 익힌 건 아니구요·”
서문수린의 앞에서는 청의 말씨도 당난아를 닮았다·
“익히고 싶어서 익힌 게 아니면· 네 말마따나 누가 칼 들고 마공 익히라고 협박이라도 하더라는 것이냐?”
“그게 진짜로 그렇게 되는 바람에요····”
서문수린의 눈가가 꿈틀했다·
생각해보니 심성 말고도 심성보다 더욱 눈부신 자질을 가진 제자였다·
어느 마두 놈이 눈독들여 마공을 익히게 만들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아니었다·
근데 그래도 그럼 하나여야지·
“아니 어느 막돼먹은 놈들이 남의 제자를 데려다가 마공을 익히게 만들었단 말이냐? 무슨 마교 놈들이 납치라도 하지 않고서야·”
“그 마교가 납치한 거 맞는데요···”
서문수린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마교라니? 그래· 지금 무사한 것을 보니 어찌 잘 빠져나온 모양이구나· 그보다는 도대체 어떤 마공을 배웠는지나 들어보자꾸나· 알아야 대처를 할 것이 아니냐·”
“어· 일단 자전마공이랑 흑살마장이랑요···”
사실 마교도 억울한 것이 마교가 강요해서 익히게 만든 마공은 저 둘 뿐·
나머지는 청이 억지로 뺏어 익힌 것들이었다·
“백팔수라검이랑 빙천수라마공이랑 혈마왕신공이랑 탕선탈의무· 정도인 것 같아요·”
“···많이도 익혔구나· 세상에 게다가 천하십대마공 중 넷을 익혔어· 이러다가 아주 열을 다 모을 기세로구나·”
“그래도 좋은 것들도 익혔어요!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역근세수경이랑 대정선공이랑·”
“잠깐· 아니·”
서문수린이 손을 내저었다·
마공이야 출처가 분명하고 마교에 납치를 당했다고 하니 혹여 도망치더라도 마인의 낙인을 찍으려 한 괘씸한 의도가 빤히 보였다·
그런데 역근세수경이라니? 대정선공은 또?
마교에 무슨 소림승하고 아미니가 사이좋게 붙잡혀 있어서 그것도 신공의 소유자들이라 전수라도 해줬단 말인가·
“음· 아니다· 그래· 그리고 또?”
서문수린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이전부터도 강호에 나가서 이상한 것들 배워오던 제자였다·
아무래도 말하지 못할 어떤 수단이 있음이라 짐작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뭐 배우면 좋으냐고 묻던 질문부터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태음옥녀신공이랑요· 소녀환희경이라고 분명 도가의 심법이라고 했는데요·”
“좀 요사스럽기는 해도 맞기야 맞지·”
“아· 그리구 이건 누가 선물로 주신 건데 익혀도 되는 건지 몰라서요·”
청이 객청의 서랍장에서 능파미보의 비급을 꺼내 내밀었다·
대충 펼쳐 파라락 훑어보던 서문수린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안면 근육이 열심히 일하는 날이었다·
“이건· 예사 것이 아니로구나·”
“능파미보라고 하나 봐요·”
“전륜마녀가 마교에 자리를 잡았더냐· 으음? 전륜마겁을 익혔다는 소리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자 청의 표정이 대답했다·
청이 모르면 세상 누구라도 얼굴 보고 안다·
서문수린이 질문을 바꿨다·
“이걸 전해준 이가 마교에 있더냐?”
“아뇨· 친왕부에 계신 분이 주신 건데요·”
“그래· 왕부더냐···· 이건 익힌 후에 태워버리도록 하렴· 세상에 피를 불러오는 물건이니·”
“아· 그 말도 하셨어요· 피바람이 어쩌구?”
“그래· 그 서책 한 권으로 문파 하나가 몰살을 당했으니 그만큼 세상 사람이 욕심을 가지는 물건이란다·”
연성파 혈사· 지킬 힘이 없는 자가 보물을 가졌을 때 일어나는 흔한 비극이었다·
“어 좋은 무공인가요?”
“천하제일의 보법이란다· 듣기로는 대성하면 그 움직임이 바람과 같아 세상 그 무엇으로도 붙잡을 수가 없다고 하니· 최악의 상황이라도 한 몸 건사할 수 있으니 능히 천하제일이라 할 신공이라 할 것이겠지·”
“그럼 우리 신녀문 꺼 하면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이미 다 외웠어요· 이름 바꾸면 되잖아요 신녀신보 같은 거·”
서문수린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자에게는 천하제일의 신공이 그저 있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마공도 무서운 줄 몰라서 같은 취급이라서 이 사단이지만·
그러나 세상에 무엇이든 한 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있겠는가·
음과 양 밝은 것의 뒤로 그림자가 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그러니 늙은이가 해야 할 일이 스승의 그림자로 제자의 그늘을 감춰주는 것이겠거니·
“그래· 그러자꾸나·”
서문수린이 비급을 챙겨 넣었다·
다른 무공이라면 모르겠으나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라서 사라진 옛 문파의 진전을 훔쳐 덧씌우는 비열한 행위라도 감내할 만한 것이다·
“아· 그래· 이야기나 들어보자꾸나· 마교 그 악종들의 소굴에서 어찌 탈출한 것이냐?”
서문수린의 눈빛이 너무 따뜻했던 통에 청의 마음도 살살 녹아 풀렸다·
그런데 스승 앞에서 늘 그렇듯이 좀 많이 풀렸다·
“아 그게요· 또 이 제자가 기막힌 활약으로 마교의 야욕을 분쇄해 놓았는데· 아! 맞다· 이것 좀 보세요· 얍· 천마 소환! 이게 바로 천마라는 놈의 본체인데요·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조잘거리는 청의 손바닥에서 천마혼이 솟아올랐다·
서문수린의 이마에도 힘줄이 솟아올랐다·
당연한 수순으로 청의 정수리에도 무엇인가 솟아오를 차례였다·
뒤이어 따악!!!
호두 쪼개지는 소리가 방문 넘어 맑은 천지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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