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4
그리하여 현재·
“앗 저것 좀 보세요 공자님· 봄꽃이 참으로 어여쁘게 피었답니다·”
“꽃잔디 사이 핀 영산홍이 그야말로 군계일학 화룡점정 홍일점이로군요· 마치 모용 소저와 같이-”
“공자님! 보세요! 노루에요 노루!”
“···네놈 옥기린···”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을 보고하는 금양검화 모용주희였다·
그리고 아드득 이빨 가는 소리는 흑룡조가의 후계자 조학체 조 형이었다·
검화에게 어떻게든 아첨하며 수작을 걸어보고 있지만 거의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무시를 당할 때마다 팽대산을 보며 이를 갈아대는 것이 여인의 환심을 사겠다고 같은 사내를 적대하다니·
조 형은 사내끼리 있으면 참 호탕하니 좋은 형이신데(기루에 가자고 조르지만 않으면 더 좋은 형이겠지만) 여인만 일행에 들어서면 갑자기 모든 사내를 원수처럼 여기는 기이한 습성이 있었다·
어차피 여인들은 더 잘생긴 사내 만나면 훌쩍 떠나버리고 말 것인데·
그러나 우정은 그렇지 않은 법이니 차라리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든 힘써 보겠다만·
그 외에도 조 형의 여동생 조양양이 안 보는 척 열심히 얼굴 훔쳐보느라 바빴다·
조양양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또 모용주희가 냉랭하니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분위기를 흐리는 통에 고개를 왼쪽으로 창밖만 내다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래서 여인들은 딱 질색이다·
그나마 있는 사내는 저 꼴이고 차라리 떠버리 짐승현자와 사고뭉치 황보 형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래 차라리 이 자리에 검치라도 있으면·
차라리 그놈의 반검 소리를 듣는 게 낫다·
도저히 이건 못 버티겠다·
창빈 형님 형님이 그나마· 아니지·
생각해보니 여인이 둘이나 있으니 창빈 형님은 벙어리 흉내나 낼 것이다·
팽대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시간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내일이면 장원시에 도착해 모용세가 가솔들과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소도시 무관이라봐야 오대세가 식솔들 세 무리나 수용할 큰 규모가 아니다·
게다가 한 무관이 귀한 손님 전부 차지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가문끼리 따로 묵어가게 될 터·
그러면 모용가도 조가도 떨어질 수 있었다·
“앗 공자님! 저기 보세요! 구름이 모양이 참으로 신기하지 않나요? 마치 음· 마치 뭐랄까 뭔가 닮았으니 어쨌든 신기하여라·”
“음 굳이 빗대자면 뱀? 밧줄? 저런 평범한 형태에서도 독특함을 발견하시다니 역시 검화께서는 관찰력이-”
“앗 공자님! 저기 지나가는 분들 보세요! 연인이실까요? 아· 나도 저렇게 연인과 봄날을 거닐어 보면 좋겠다아· 누구 없나아·”
“···네놈 옥기린···”
옥기린이 앞머리를 아주 천천히 꾹꾹 누르며 쓸어냈다·
—-
모용성익이 밤중에 아들과 함께 산책에 나섰다·
그러나 여자 거지가 있다는 자리에는 그저 거적떼기 두 장 겹쳐서 깔려있을 뿐이었다·
“아· 먼저 수련하러 갔나 봐요· 이쪽이에요·”
그러고는 수련장이라고 하는 으슥하여 사람 들지 않는 공터로 향했다·
그리고 모용성익이 그제야 청을 보았다·
“허어····”
모용성익이 탄식을 흘렸다·
천하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모용성익이 고작 면사 하나를 꿰뚫어 보지 못하겠는가·
달밤 아래 절세의 가인이 검무에 취해 열중하였으니 하늘 아래 어떤 미인도도 담아내지 못할 진귀한 광경이었다·
솔직히 발랑 까진 딸년이 틈만 나면 자기가 중원오화 중 제일이니 어쩌느니 하는데 이래서야 완전 글러 먹었다·
게다가 검무는 눈에 익어 흔한 월녀검의 식을 그리지만 담긴 묘리가 시시각각 변화하니 검에 심상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둔과 중의 묘리는 감탄이 나올 만큼 훌륭한 것이나 아쉽게도 쾌와 환의 묘리가 그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검술의 네 묘리 중 둘이나 이루었다·
초절정 중에서도 중용이니 뭐니 묘리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놈팡이가 수두룩했다·
강호가 넓다고 하더니 도대체 이런 인재가 어찌 거지꼴을 하고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밤중을 사르는 노을빛 진기라고 하면 모용성익도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으니·
“흠흠·”
모용성익의 인기척에 청이 고개를 돌렸다·
꼬맹이 온 것이야 진작에 알았으나 일부러 기척을 감춘 모용성익을 그제야 보았다·
“꼬맹아 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왜 헛기침이나· 앗· 아준의 아버님 되시나요?”
“그래· 아들이 폐를 끼친 것 같아 나왔더니· 그나저나 눈에 익은 진기로구나· 혹여 신녀문의 신공인 주양세심경이 아니더냐?”
아준이 아버지라면 모용세가 가주다·
다만 청에게는 모용세가의 가주보다 친구네 아버님이었으니 예의를 바짝 차렸다·
“예· 서문수린 도고께 사사하였습니다· 다만 사정이 있어 신녀문에 적을 올리지는 않았으니 신녀문 외문제자 서문청이라 합니다·”
“아· 서문수린 선배님의!”
동시에 모용성익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백 호위 이 자식을 그냥·
눈빛에 청아한 현기가 넘치다 못해 철철 흐르는 지경인데 거지가 뭐 어쩌고 저째?
호위라는 놈이 눈깔이 삐었으니 험난한 강호 속에 제대로 아들을 수호할 수 있겠는가·
물론 면사를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백 호위는 억울할 수 있다·
그리고 백 호위 앞에서는 청이 배 긁으며 퍼질러 누워있었을 뿐이지 서문수린표 미인예절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 그런 꼴을 하고 있느냐· 내가 알기로 여광 아니 대모 선배님께서 그러한 꼴을 절대 허락하실 분이 아닌데·”
“앗· 그· 소녀에게도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답니다· 그 저기 비밀로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순간 미인의 품위가 깨어지고 악동 같은 면모가 슬쩍 엿보였으니 딸 보는 기분에 모용성익이 나지막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선배님 성격이 오죽하시더냐· 네게도 나름으로 사정이 있어서 정체를 숨겼을 텐데 괜히 늙은 놈이 끼어들어 밝히게 했구나·”
“아니랍니다· 친우의 아버님이신데 아드님이 거지와 어울린다고 하면 세상 어떤 춘부장께서 지켜만 보시겠어요? 오히려 부정이 아름답다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예의와 태도가 깍듯하니 참으로 어엿한 강호의 여협이 아닌가·
모용성익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의복의 완성은 얼굴이라서 면사를 뚫어보는 모용성익이 보기에는 거지같은 의복에도 나름 어울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내 보아하니 네 성취가 보통이 아니로구나· 팔다리를 보아하니 환골탈태를 이룬 듯한데 아쉽게도 벽을 넘지는 못한 모양이구나·”
“예· 솔직히 말씀드려서 소녀가 조금 얕잡아 본 방만함이 있었사온데 얼마나 높은 벽인지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허허 한 번 엿본 너머이니 금방 찾아올 것이다· 음? 그런데 연치가 어찌 되느냐?”
“묘령으로 딱 방춘을 이루었답니다·”
나 스무 살이요 하고 청이 뻔뻔하게 철판을 깔았다·
사부님이 부탁하셨는데 철판 아니라 금강석판이라도 깔 수 있는 청이었다·
묘령이라 하면 여인에게 한정하여 쓰는 말로 스무 살 안밖의 나이를 말한다·
청의 고향에서는 ‘정체를 모른다’라는 뜻으로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허어· 선배님께서···”
모용성익이 감탄을 삼켰다·
여광견 늙은 괴물이 늙어서 기운이 빠졌는지 통 강호에 소식이 없다고 했더니 이런 괴물을 키우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다·
화산파 장문인이 여광견의 방년 쯤 되는 제자에게 신검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별호를 내리며 노망이 났느냐 소리를 들었다던가·
실제로 보니 충분히 자격이 있는 성취였다·
게다가 이제 겨우 스무 살 아이가 아닌가!
벽 너머를 엿보고 환골탈태를 이룬 성취라면 미래의 여중제일인은 당연하거니와 천무지체인 아들과 천하제일인을 다툴 천하의 기재였다·
“과연 정파의 홍복이로다· 아준이 네가 아주 좋은 친구를 사귀었구나· 자네에게도 그래 내 모자란 아들이지만 잘 부탁하겠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드님께서 이미 헌헌한 대장부이시니 걱정하실 연유가 없으시지요·”
“그래· 사정이 있다고 하니 금일 밤에 나는 너를 보지 못하였다만 만약 무림대회에 가는 일정이라면 가솔들이 소화문에 머물고 있으니 함께 가려거든 언제든 찾아오려무나·”
모용성익이 품에서 작은 목상(나무 상자)을 꺼내 열어 손님패를 뽑아 청에게 건넸다·
당연히 특급 그것도 가주 이름의 특급 패다·
이걸로 오대세가의 무제한 자유이용권 중 네 개가 한 사람에게 모였다·
아직 손님패를 안 준 제갈이네 말고는 가주의 손님패 하나 후계자의 손님패 둘 그리고 청은 당가의 은인이었다·
“흠· 친우들끼리 어울리는 데에 내 눈치 없이 끼어들었구먼· 내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밤길이 어두우니 살펴 가시어요·”
“하핫 그래· 너희도 조심하거라·”
모용성익이 완전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경쾌하게 자리를 떠나 소화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드는 생각이·
그런데 외문제자면 혼인이 가능하지 않던가?
천하의 기재 둘이 혼인하면 그 자식은 지고하신 무천대제 선배님을 뛰어넘는 고금제일인이 탄생하는 게 아닐까?
“이 자식이· 혼인하잘 때 받았어야지·”
여광견을 사돈어른으로 두는 건 두렵지마는·
—-
그리고 흑점주와 서문수린에 이어 분노에 타오르는 또 또 한 명·
“흑점 놈들이 어찌 감히· 하·”
최리옹이 인상을 팍 구겼다·
수상한 놈들이 금자를 내밀며 견포희의 정보를 캐고 유인하려 들었다·
하지만 설가상회는 신교 비작부의 최정예 무사들이 파견되어 상시 수호하는 천마신교 호북지부다·
매수를 시도한 놈들이 화수목금토 오행의 원리(불 물 가시와 몽둥이 쇠집게 땅)로 진실을 토해냈으니 그 배후가 바로 흑점 놈들이었다·
그렇다고 최리옹이 막 흑점에 단신으로 쳐들어가 모조리 도륙을 내버릴 만한 절세의 고수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같이 화를 내 줄 집단을 알았다·
“이보게 어린 교우야·”
“예 어르신·”
“미안하지만 신교의 비각에 좀 전해 주겠나· 아주 급한 일이라 대지급으로 부탁하네·”
말이야 점잖아도 사실은 그냥 명령이었다·
거기에 대지급이라면 전령들의 필사적인 이어달리기 계주로 빠르게 교의 수뇌부까지 닿아야 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그래도 하나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신교가 중원에 진출하면서 감숙성 가욕관 너머 주천시를 접수하고 비각의 장원을 세웠으니 그 끔찍한 사막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정도일까·
자귀 연락소야 어차피 다음 도시까지만 전하면 그만이라 사막 걱정까지야 하지는 않지만·
“알겠습니다· 대지급으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최리옹의 서신이 천마신교의 비각을 향해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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