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8
하늘로부터 땅으로 직선을 그어 잇는다·
태산압정· 태산이 짓누르듯 묵직하게·
대지의 모양으로 직선을 그어 휘두른다·
횡소천군· 일천의 군사를 잘라내듯이·
점의 모양으로 곧게 뻗어 찌른다·
일이관지·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는다·
거창하게 포장을 해도 결국 내려베기 횡베기 찌르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청의 초식이 강맹하여 바람 가르는 살벌한 소리가 쐐액 쐐액 울려퍼졌다·
달리 어떤 깨달음이라기보다는 그저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휘두르는 까닭이다·
몸이 힘들면 잡생각도 들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몸이 좀 힘들어야 할 텐데·
인간을 초월한 근력과 체력은 도대체가 쉬이 지치는 법이 없다·
그러니 더 쎄게 더 빠르게 더 강하게·
검을 휘둘러 대기를 찢는 소리가 요란하니· 검이 만들어내는 풍압이 연무장 바닥을 쓸어내며 마른 먼지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여력이 남아 잡생각이 든다·
대체 내공이란 건 또 뭐야·
기라는 게 실존했다면 왜 저쪽 세상에는 무림이 사라지고 무공도 없는 걸까· 이런 초인이 있었다면야 무술인들이 총알 맞고 다 뒤졌겠냐고·
아냐· 잡생각 말고· 그래· 숫자를 세자·
어디에 집중하려면 숫자를 세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칼질 한 번에 숫자가 하나씩· 하나둘셋넷다서여서일고여덜아홉 하나·
아홉 묶어서 하나 둘 셋 그리고 그렇게 열 개씩 묶음이 아홉 다음에 또 하나였다·
애초에 몇 번이나 휘두르나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리를 비우고 싶어서·
그러니 차라리 낫다·
이번이 두 자리수가 몇 번째더라·
이백? 삼백? 아까 삼백을 셌었던가?
숫자를 세니 자연히 간단한 초식이라도 더 힘이 쓰인다·
힘이 쓰이기를 반복하니 아무리 인간 초월 단단한 육신이라도 서서히 숨이 차오르는 것이다·
그러자 내공이 절로 일어난다·
청이 슬그머니 업무를 보려던 내기들을 억지로 닫아 억눌렀다·
눈치 좀 챙기지? 사람이 좀 지쳐 보겠다는데·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허억 후 숨이 좀 차네·”
분명 해 지기 전에 무천각 연무장에 나와 검을 휘둘렀는데 어느새 사위가 깜깜하여 화톳불만 넓게 둘러 피어올랐다·
이제야 심장이 쿵쿵 뛰고 팔다리가 끊어질 듯이 아픈 것이 이제야 운동을 좀 했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누가 들었다면 기겁을 할 소리였다·
내공의 운용도 없이 두 시진 반을 꼬박 숨 한번 돌리지 않고 검을 휘두른 사람이 하는 소리라서·
청이 어느새 흥건한 땀을 훔칠 때였다·
“삼재검인가요? 인의 수법이 찌르기라면 남부식의 삼재검이겠어요·”
청이 반색하며 공손요예를 반겼다·
“예! 깨어났구나!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줄 알았어· 시간이 얼마나 지난 줄 알아? 괜찮아?”
“제가 제가 그렇게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얼마나 지났어요? 사흘? 나흘?”
공손요예가 깜짝 놀라 급히 되물었다·
“장난이야· 반나절밖에 안 지났어· 머리 안 아파?”
“그걸 어떻게···· 제가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나요?”
“아니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 당연히 머리가 아프겠지·”
“아···· 마치 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아요· 당연하다니 원래 이런가요?”
“사람마다 다르지만 술을 처음 마시면서 독주를 그리 들이부으면 당연히 머리가 아프지· 그걸 숙취라고 해·”
“아· 이걸 숙취라고 하는 거네요····”
청의 앞이라고 일부러 아픈 것을 감추고 있었던 모양· 원래 그렇다고 하니 이제야 내색하는데 오른쪽 눈가만 씰룩이는 것이 그쪽으로 편두통이 온 모양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지· 멀쩡한 척하면 안 돼·”
“하지만 청이 걱정하실 것 아니에요·”
“걱정하는 게 낫지· 그러다 진짜로 무슨 문제라도 있어서 나중에 쓰러지기라도 해 봐· 곁에 있으면서 몰랐으면 그게 얼마나 또 속상하고 화가 나겠어·”
남의 앞에서는 언제나 멀쩡한 척을 하는 사람이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본래 사람이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법이었으니 청을 탓하기는 애매하다고 하겠다·
그러자 공손요예가 말을 잘 들었다·
“으윽 좀 많이 많이 아파요···· 이럴 때는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물 많이 먹고· 아 차는 안 돼· 과실차 종류면 모를까· 그리고 단 거 많이 먹고· 단 물을 먹으면 둘 다 동시에 해결이니까 음 과실차나 좀 달라고 할까?”
“속도 안 좋아요····”
“그럼 해장을 좀 해야겠네· 맑은 탕에 과실차좀 듬뿍 내달라고 해야겠다·”
“꼭 지금 뭘 먹어야 하나요?”
“먹어야 괜찮아진다니까· 자자 가자·”
청이 공손요예의 손을 덥석 붙잡고는 질질 끌었다·
공손요예가 못이기는 척 끌려가며 잡힌 손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청이 무천각 시비들에게 부탁하고 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식탁이 차려졌다·
본래 중화요리가 가진 특징이 미리 준비된 식재를 빠르게 튀겨내거나 끓여내는 것이다·
중화에서 볶음이란 튀김과 크게 구분되지 않으니 중화냄비에 기름 가득 부어 튀기듯 볶아내는 것이다·
공손요예가 말린 건어물 잔뜩 집어넣어 끓여낸 맑은 탕국을 후르륵 마시고는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녹아나는 소리를 냈다·
“흐아아 와 이거 정말 좋아요· 속이 탁 하아아 좋다·”
“거봐· 원래 술 먹고 뻗었다가 일어나면 맑은 탕이 제일이지· 음· 아니면 얼큰한 국물도 좋고· 느끼하지만 않으면 음· 그러고 보니 확 땡기네·”
청은 출도 이전에는 본래 술 퍼먹으면 유명한 체인점의 치즈버거를 사다가 책상에 툭 던져두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일어나 숙취가 찾아오면 그때 해장으로 뚝딱 해치우면 끝내주는데·
생각해보니 딱히 만들기 어렵지 않을 것 같으니까 있다가 좀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고·
청이 그리 생각하며 저 역시 탕국을 퍼다 대접을 입가로 가져가려다가 멈칫거렸다·
“아 좀 벗어야지· 답답해·”
청이 면사를 훌러덩 벗어 내려놓았다·
내친김에 머리도 풀어버리니 흥건하게 젖은 머리칼이 미역처럼 축 늘어졌다·
그러자던 공손요예가 대접을 어정쩡하게 받쳐든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청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응? 왜· 예뻐서?”
공손요예가 대접을 든 채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청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한참 땀을 흘리고 난 다음이라 머리카락이 찰싹 달라붙은 꼴이 요염하기 그지없는 미모였다·
공손요예가 그렇게 넋을 놓다가 슬그머니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 원래 이 해장이란 걸 하면 얼굴이 좀 달아오르는 느낌이 드나요? 탕 속에 푹 몸을 담갔다가 나온 것 같이 그리고 또 심장도 막 뛰어요·”
그러자 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예 얘 설마···
고혈압인가? 아니면 협심증?
“그건 난아한테 한 번 봐 달라고 하자·”
“그런데 얼굴은 왜 숨기시나요? 이렇게 예쁘신데· 너무 아깝잖아요·”
“그야· 사내들 달라붙으면 귀찮잖아· 뭐 오늘 보니까 써도 달라붙던데· 아 예 동생 흉보는 건 아니고·”
술 싸움 이겼다며 아는 척을 해대니 개중 소름이 끼치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는 놈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예 노골적으로 시선을 던지는 놈도 많았으니 면사를 써서 청의 눈이 보이지 않으니 저네의 음흉한 눈빛도 안 보이는 줄 아는 얼간이들이었다·
그럼 지네들이 면사를 써야지 쓴 사람은 앞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아· 이해했어요· 그래도 아까워요·”
공손요예가 단숨에 납득했다·
그 정도 파괴력이 있는 미모였으니까·
“어차피 천년만년 감추고 다닐 거는 아니니까· 그리고 이제와서 얼굴 까기도 좀 그런데 내가 특급 요리사도 아닌데 너무 뭐랄까 좀 유치한 수작질 같아서·”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인제 와서 면사 벗어봐야 짠 본래는 미인이었습니다 하고 제 얼굴에 금칠이나 하는 꼴이었다·
더더욱 얼굴 까기가 어려워졌다고 할까·
“먹고 같이 대련이나 할까 했는데 머리 흔들리면 두통 때문에 힘들겠지?”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늘상 해오던 일이라서···”
“괜찮기는· 숙취에 뛰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있어· 한참 취했을 때 뛰면 모를까· 음 요 앞에 운하에 등불 띄워놨던데 그거나 같이 구경 갈래?”
그러자 공손요예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감사하신 말씀을 또····”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저도 모르게 부끄러운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잘했던 걸까 하고·
본래 친절하고 상냥하고 사려 깊으며 마음씨가 곱고 자애로운 데에다 포용력까지 갖춘 그리고 이제는 심지어 예쁘기까지 해 과분하기 그지없는 감사한 친구지만·
그래도 뭔가 이전보다 훨씬 거리감이 줄었다고 해야 할까· 확 다가오는 듯한·
—-
모용주희는 제압되어 끌려 나간 이후 술에 꼴아 그대로 뻗었다·
어떤 주당들은 술 먹고 부린 추태를 아주 깔끔히 잊어 기억하지 못하는 편리한 뇌 구조로 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무인들의 뇌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았으니 이성을 잃고 주사를 부릴 수는 있어도 그 기억만은 온전히 간직한 채로 눈을 떠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용주희의 마음이 또 깨어졌다·
원한에 불타는 독심으로 기워붙인 마음이 다시 깨어져 전보다 더 산산이 아니 아예 곱게 빻아 가루가 되어버렸다·
“으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악! 끄아아아아!”
슬픈 절규를 삼키는 베개만 수난이었다·
일전에는 슬픔이었다면 이번엔 절망쪽에 가까운 처절한 절규였다·
그리고 모용가의 소리는 모용준이 듣는 특징이 있었다·
“누나! 누나 또 왜 그래! 누나!”
“으악 어떡해! 이래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냐고!”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가짜 가슴을 뽑아 던졌으니 모용주희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본인이 보증까지 해 버리고 말았으니 아예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버린 것이다·
모용주희의 유난히 커다란 눈망울에서 한 줄기 이슬이 또로로 흘러내렸다·
“나 나 어떡하지? 혼례는 다 간 게 아닐까? 준아야 누나 평생 혼자 살면 어떡해? 세상에 가슴 없는 년 좋아하는 사내가 대체 어디에 있겠어·”
“괜찮아! 그럼 내가 누나랑 같이 있어주면 되잖아! 우린 가족인걸!”
“주 준아야!”
모용주희가 동생을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모용준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누이의 갈비뼈가 좀 아프다고 생각했지만 슬픈 누나를 위해서 참아내야 한다는 정도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다·
전부 거지 누나 아니 청 누나의 가르침이었다·
입 밖으로 말 꺼내기 전에 듣는 사람에게 나쁜 말이 될 것 같은지 아닌지 한 번만 더 생각을 해 보라고·
가슴이 작아서 슬픈 누나에게 뼈가 닿아서 아프다고 하면 아주아주 나쁜 말이 될 것 같았다·
귀여운 남동생의 따뜻한 위로에 모용주희가 조금은 절망을 극복했다·
게다가 모용주희에게 절망은 익숙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가슴들이 모용주희에게는 절망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래 가족 가족이 있으니까· 그리고 또 친구들도 있고·”
그래도 아주 말실수를 하진 않았으니 딱 직전에 입을 막아준 은혜로운 친구들 덕분이었다·
조금이라도 있는 것들이 이해한다며 가증을 떠는 꼴은 조금 분하지만 그래도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물론 모용주희의 아픔이 일백 점이라면 친구들은 한 팔 점 구 점 쯤 될 것이니 그 누구도 제 슬픔을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모용주희의 눈에 불이 붙었다·
“용서 못 해· 절대로 용서 안 해·”
“누나?”
“그년 절대로 용서 못 해· 남의 가장 아픈 상처를 헤집다니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가 있지? 준아야 안 그래?”
성대하게 자해 공연을 펼친 모용주희가 하는 말이었다·
“맞아! 끔찍해!”
“모자라· 끔찍한 년이라고 해· 빨리·”
“끔찍한 녀 년!”
“나쁜 년 사악한 년 천하의 악종 같은 년 가식이나 떠는 위선자···!”
“그거 다 따라해야 해?”
“나쁜 년까지만 해 줄래?”
“나쁜 년!”
“그래· 나쁜 년이야·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지· 내 약점을 건드렸으니 나도 그년 약점을 만천하에 공개해주겠어·”
남에게 얼굴 보이기 싫어서 가린 년이니 용봉지회의 모두 앞에서 들춰주면 똑같은 복수가 될 것이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냥 술에 제대로 떡이 되어 모두의 앞에서 바닥을 기는 정도에서 봐주려고 했는데·
그러자 모용준이 소리쳤다·
“나도 도와줄게! 내가 뭘 하면 돼?”
“아냐· 준아는 이런 지저분한 일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누나 곁에 좀 있어줄래?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준아는 누나 편 들어줄 거지?”
굳이 얼굴 가린 년의 면사를 들추는 행위라면 거의 동귀어진에 가까운 수였다·
상대의 아픈 상처를 후벼파는 아주아주 악독한 년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천인공노한 만행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면 더더욱 용서가 안 된다·
그년은 똑같이 하고서도 선심쓰는 척 저는 고고한 여협이 되어버리고 어째서 나는 작은 가슴도 가짜였던 병신년이 되어버렸냔 말이다·
모용주희의 속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그나마 절규가 되어 밖으로 토해내지는 않았으니 그래도 위로가 되는 동생 덕분이었다·
“응! 나는 절대로 누나 편이야!”
“그래· 우리 준아· 이젠 정말 준아밖에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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