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9
본래는 개봉부 앞 거대한 운하의 시작점에 띄운 수만 개 연등이 장관이라고 했다·
하지만 운하 위에 배를 띄우고 널빤지를 이어 비무대를 설치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아쉽게도 그 광경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운하의 지류들에는 여전히 계속 띄워놓는 중이었다·
유유히 동동 흐르는 등불을 보는 재미가 있었으니 청이 공손요예의 팔짱을 척 끼고 따라서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그러고 나니 벌써 달이 저편에 떠서 해시 말쯤에 이르렀다·
“서문 소저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요· 술을 마신 것도 처음이고 서문 소저랑 같이 마셔서 더 좋았어요· 해장? 해장도 좋았고 운하의 연등도 너무 예뻤어요· 같이 걸어서 더 좋았구요· 그으 괜찮으시면다음에도이렇게같이어울려주신다면천녀는진실로삼생의영광으로여기며길이길이가슴에품고-”
“진정하고· 밤이 늦었는데 위험하게 어딜 가게? 오늘은 자고 가·”
“그래도 실례가 안 될까요?”
“나 말고 다른 손님도 없던데 뭘·”
그리하여 공손요예가 무천각에 다시 발을 들였다·
손님용 침의를 입고 침대에 누우니 새삼 마음이 벅차오른다· 친구네 집은 아니었지만 그 비슷한 곳에서 자는 것 역시 처음이었으니·
삶이 통째로 수련이 전부였던 공손요예에게는 모든 경험이 다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물론 청이 듣는다면 술 먹고 뻗어서 반나절이나 누웠으니 당연히 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겠지만·
공손요예가 누운 채로 고민했다·
혹시 지금 서문 소저에게 같이 이야기하자고 부탁드려도 될까? 그게 폐는 아닐까?
잠이 안 오는 건 내 사정이지 서문 소저는 오늘 많이 피곤하실 텐데·
하지만 처음으로 친구 집에서 자는 날인데 그냥 넘기기는 너무 아쉽지 않을까· 하물며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데·
부탁드리면 친절하신 서문 소저는 받아주시겠지만 하지만 피곤하실 거야·
혹여라도 청했다가 눈치 없는 년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해·
공손요예 일생일대의 고민이었다·
그렇게 갈팡질팡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슬쩍 문이 열리더니 그 틈 사이로 빼꼼 들여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서문 소저?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음· 그게· 혹시 같이 자도 될까? 방도 넓고 침상도 넓은데 혼자 있으려니 좀·”
공손요예가 대답하려는 때에 청이 다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 뭐시야 중원에서는 친구랑 같이 한 침상에서 자야 진정한 우정이라니 어쩌니 들었거든? 요즘 들어 조금 미심쩍기는 한데 어쨌거나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니까·”
실제로 동상이몽이란 말이 있어서 같은 상황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상태를 말했다·
그러한 것을 굳이 같은 침대에서 다른 꿈을 꾼다고 표현했으니 친한 친구 사이에도 의견이 같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친구 사이의 동침이 아무 흔한 일이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청의 눈이 또로로 구르며 눈치를 보았다·
“그 같이 자도 괜찮을까? 내가 원래는 안 이러는데 오늘은 유난히 좀 그렇네···”
“그럼요·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말인걸요· 어서 들어오세요·”
“앗싸· 역시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청이 히히덕거리며 들어와서는 침상에 올라 이불 속으로 쏙 파고들었다·
이불 속에 부풀어오른 덩어리가 꾸물꾸물 가까워진다 싶더니 갑자기 공손요예의 코앞으로 머리가 뿅 솟아올랐다·
“하아· 좋다· 역시 누가 있으니까 좋네· 혹시 불편하진 않지? 누구랑 같이 자는 게 불편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
“아니에요· 저도 꼭 친구랑 같이 나란히 자 보고 싶었으니까요· 오히려 먼저 권유해 주셔서 감사한걸요·”
그러자 청이 정감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좋다·”
그리고는 이불 밑에서 꿈지럭꿈지럭 뭔가 부산을 떨더니만 얼마 지나지 않아 쌕쌕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손요예가 다른 사람이 자는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까무룩 빠르게 잠드는 사람도 또 처음이었다·
낮에 실컷 잠을 잔 탓에 잠이 오지 않는 공손요예만 조금 야속함을 느꼈다·
모처럼 같이 자는데 이야기라도 좀 해주시지 않고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제 위로 묵직한 것이 슥 올라오는 것이다·
“서 서문 소저? 그 다리가·”
몸을 혹사시키고서 밤 내내 돌아다니기까지 했던 청이 편안한 침상 위에서 완전히 골아떨어졌으니 들을 리가 있나·
이내 청이 으음 하고 몸을 뒤척이더니 아예 척 몸을 기대는 것이다·
이러니까 진짜 자매 같다·
공손요예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청을 안아주려다 문득 손끝에 닿는 촉감에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저 저기· 서문 소저? 어 왜 왜 옷을·”
그러나 청은 꿀잠이었다·
공손요예만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내 그렇게 뻣뻣하게 굳은 채였다·
—-
당난아가 무천각에 올랐다·
청이 무천각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같이 점심 먹고 용봉지회에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깜짝 놀래켜 줄 요량으로 꼭대기 층에 오르고 나니 무천각 시비가 복도 문을 막고 선 모습이 보였다·
“청아는 안에 있어?”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오셨다고 기별을 드릴까요?”
당난아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잔다고? 흐흐 그럼 깨워줘야겠네?”
“저 손님· 귀빈께서 주무시는 데에 함부로 들어가시면···”
“내가 청아 제일 친한 친구거든? 나중에 청아한테 물어 봐· 친구 드는 거 막았다고 오히려 화를 낼 지도 모른다?”
“그러하실 분은 아니셨습니다만···”
그러면서도 시비가 비켜서진 않았다·
그야 귀빈께서 허락하지 않은 손님이라 여인이라 해도 함부로 안으로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아· 몰라· 비켜· 나 당난아야· 해어독화 당난아· 대 사천당가의 적녀인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네가 감히 앞을 막아?”
“아· 당난아 님이시군요 혹시 방문하시면 들여보내주시라 미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비의 표정이 밝았다·
진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으니까·
미리 청이 말을 해 놓았기에 망정이지 사실은 진상이 맞기는 하다·
“청아는 어디 아 저기 신발· 신발·”
당난아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
신발이 있기는 한데 두 켤레다·
청의 발은 당연히 두 개고 손에다 신는 취미는 없으니 두 개는 청의 것인데 나머지 두 개는 청의 것이 아니리라·
그나마 둥글둥글하니 여인의 신발이라서 다행이었다·
“뭐야 어떤 년이야? 감히!”
당난아가 문을 발칵 열어젖혔다·
청은 원래 잠귀가 밝지만 안전한 곳이라 판단되면 그냥 세상모르고 잔다·
무려 무림맹 안의 또 으리으리한 전각 꼭대기 화려한 객청은 아주 안전한 장소였다·
공손요예도 잠귀가 밝은 편이지만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다 새벽이 밝아 하늘에 그 어둠이 가실 때쯤 겨우 잠든 판이었다·
침상 위에 딱 붙은 머리통 둘을 발견한 당난아의 눈에 불꽃이 확 튀었다·
“이 년놈 아니 년년들이!”
당난아가 이불을 팩 잡아당겼다·
잘 때의 복장이 복장이라 살결에 갑자기 바람이 드는 바람에 청이 찡그리며 눈을 떴다·
“아 내 이불···· 뭐야 난아잖아· 이불 줘· 춥단 말야· 추운 건 아닌데· 따뜻한 게 좋아·”
“너 너! 청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같이 자자고 하면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피하더니! 그래 놓고는 딴 여자를 침상에 들여!?”
“대사가 좀 그렇지 않나· 누가 보면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침부터 소리를 꽥꽥 지르고···· 아 해 떴네·”
청이 몸을 일으켜 부시시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엉덩이춤에 깔고 뭉갠 침의를 더듬어 대충 위로 걸쳤다·
그리고는 아직까지도 씩씩 거친 숨 내뱉으며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당난아의 못된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렇게 서운했나? 그럼 오늘은 같이 자· 아니 잘 됐다· 아예 당분간 같이 지내자· 숙소도 넓은데 혼자 쓰려니까 좀·”
“어? 진짜?”
“음· 미안한데 가족은 어차피 사천에 돌아가면 매일 볼 거 아냐? 그러니까 개봉에 있을 때는 나랑 좀 있자· 그 싫어?”
당난아가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며시 찌그러진 눈썹이며 어딘가 불안한 낌새로 올려다보는 청의 표정은 이상하게 낯설고 생경하니 뭐 세상에 지금 청아가 내 눈치를 보는 거야?
그러고 나니 당난아의 광대가 승천했다·
그래· 역시 제일 친한 친구 놔두고 저런 불여시를 들였으니 미안하긴 한 거겠지·
그런 사고의 흐름이었다·
—-
공손요예는 외박을 했으니 가족에게 가야 한다고 떠났고 청이 당난아의 팔짱을 척 끼고 용봉지회 회장에 들었다·
여중제일주당이 왔다며 아는 척을 하는 후기지수들 사이를 척척 헤쳐나가며 누군가를 찾나 싶더니 한참 검에 대한 예찬을 쏟아내고 있는 남궁신재의 옆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오 검우 왔는가·”
“응· 그런데 혹시 무천각에 대련하러 안 올래? 요즘 검을 휘두르는데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서 한동안 검이나 좀 휘두를까 하는데·”
“오! 검우가 드디어 검에 진심이 들었나? 그런 기쁜 일이라면 이 검우가 양팔 걷고 도와야겠지· 어떤가 검우? 지금 당장 한 판 할 텐가?”
“좀 있다가· 비무회 전까지 이제 안 올 생각이라서· 오늘은 인사나 돌리고 가려고· 갈 때 같이 갈래?”
“좋군! 안 그래도 대련이 급해 손이 간지럽던 참이었다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뒤편에서 몸을 풀고 있을 터이니 돌아갈 때 찾아주겠나? 아 무천각 앞으로 목검을 좀 주문해 둬야겠군· 각오는 되었겠지?”
“물론이지·”
청이 배시시 웃으며 검집을 앞으로 내밀었다·
검우가 제 검을 툭 부딪치고는 신이 난 발걸음으로 밖으로 향해 쌩 달려 나갔다·
당난아가 옆에서 혀를 찼다·
“대련이 그렇게 좋나? 쟤도 보면 제정신이 아니야·”
“다른 데 빠지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리고 나선 또 층을 훑으며 아는 얼굴을 찾아다니니 여러 종류 도복 입은 제자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창빈을 발견했다·
“아 정말로 술맛 떨어지는구만· 도대체 여인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땀내 나는 사내들끼리 모여 이게 대체 무어냔 말이야· 자고로 술이라 하면 여인이 따라주는 것이 제맛이니···”
“그래? 자· 한 잔 받고·”
“음· 오셨소·”
어전히 어정쩡한 존대였다·
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무천각에 머무르고 있거든? 친구들 모아다 대련이나 하며 지낼까 하는데 창빈이도 놀러 와·”
그리고는 이건 어르신으로서 하는 말이니까 흘려듣지 말고 꼭 놀러 오라고 당부를 건넨 후 또다시 지인 탐색에 나섰다·
그러고 보니 향이는 안 왔나 싶어서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고 있자니 이상하게 회장에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오늘 청룡회였나? 사내들밖에는 없네?”
“오늘 따로 열린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뭐지···?”
당난아도 이상하다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곧장 알 수 있었는데 한 층 올라가니 와글와글 온 여인들이 전부 몰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혹시 단 과자의 장인이 즉석 과자 제조라도 하고 있나 하고 어리둥절 계단참에 서 있자니 돌연 우르르 발소리가 요란해졌다·
그리고 이내 여인들이 좌우로 쫙 갈라지나 싶더니만 천하제일미남의 옥면이 모습을 짠 드러냈다·
“이제 오나 청? 보나마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게으름이나 피웠겠지· 그래도 이리 얼굴 보니 좋군·”
웬일로 질색하며 입에도 안 올리는 이름까지 부르면서 반가운 척이었다·
평소에 청을 부르기로는 오로지 ‘너’ 하나뿐이었으니까·
그에 여인들의 시선이 일점으로 모이니 청의 면사를 뚫어버릴 듯한 흉흉한 기세였다·
동시에 수근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청이래 청· 너 들었어?
못 들었어· 안 들었어· 안 들었다구·
이름으로 부르잖아· 이름으로· 말이 돼?
얼굴 보니까 좋다잖아!
친구 친구인거겠지· 난 몰라· 못 들었어·
청의 청력이 보통을 넘었으니 흉흉한 분위기 속에 속삭이는 소리도 쏙쏙 들어온다·
아· 이건 좀 부담스럽네·
생각해 보니 이래서야 친구 혼삿길 막을 안 좋은 소문이 퍼지게 생기지 않았던가·
“팽 공자님께서 오셨군요· 본래 이러한 자리는 피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그래도 한번은 와야 하지 않겠나· 그래 어제는 잘 들어갔나? 갑자기 가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더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좀 어떤가?”
그에 꺄아악 비명 비슷한 것들이 터졌다·
그야 어제는 잘 들어갔냐는 말은 어제 함께 있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인들 사이에서 살기까지 피어오르는 통에 청의 눈썹이 꿈틀꿈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죄송합니다· 당분간 쪼오금만 양해해 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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