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3
사실 청은 그냥 져 준다는 셈으로 사과를 건넸을 뿐이었다·
술 대결에서 모용주희가 창대하게 폭발해버린 이후로 딱히 앙금이 남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괜히 볼 때마다 으르렁거리면 피곤하기도 하고 또 준이 얼굴 봐서도 이쯤 해결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게다가 모용주희가 이리저리 모욕을 발사하고 다녔음에도 다들 어휴 한숨이나 쉬면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니 더욱 그렇기도 하고·
계속 부대끼는 후기지수끼리 서로 눈깔을 뜨고 증오하는 독기를 품어도 딱 그뿐이었으니 두고보자 내가 개망신을 주고 말 테다 하는 앙증맞은 복수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용주희의 자동 비아냥은 대단히 위험한 말버릇이었다·
사파의 마녀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그대로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뭐 이참에 버릇이 고쳐진다면 나중에 사람 목숨 하나 살릴 수도 있는 거고·
어쨌거나 청은 용봉지회에 참석한 목적을 달성했다·
앞으로는 무천각에 쭉 머무르며 수련과 휴식을 번갈아 자신을 가다듬기로 마음먹었으니 같이 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하고 고지하기 위해 참석한 마지막 용봉지회가 아니었던가·
게으른 서문청에서 벗어나 준비된 인재이자 무인 서문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
몇 합 만에 끝나버린 대련에서 남궁신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냐하면 남궁신재는 항상 진지하기 때문이다·
“내 저번에도 느꼈지만 검우의 기예가 더욱 빈약해지고 말았군· 그간 너무 힘에 의존한 모양이오· 음· 본래 무공이란 인간이 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보니·”
“그게 무슨 뜻이야?”
“검우 힘이 장사가 되었지 않나? 그러니 그저 힘주어 휘두를 뿐 기예로서는 오히려 퇴보를 한 것이 아닌가 싶소만?”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청의 싸움이란 늘 힘과 기책에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무식한 힘과 그보다 더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빈틈을 만들고 여래신장에 신녀신수에 독 있으면 독도 쓰고 눈치 봐서 마공도 한 번씩 써 가면서·
참고로 신녀신수는 신공과 마공 양자가 중첩된 상태로 어차피 우리편이 보면 신공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드러내도 된다·
그러다 보니 쓰는 초식들도 단순한 데다 동작이 크고 강력한 종류를 선호하게 된다·
남궁신재가 손잡이 위로 사라져 뾰족뾰족한 단면을 드러낸 목단도를 내보였다·
“생사결이라면 내가 검우를 이길 방도는 없겠지· 하지만 대련이라면 다른 것이 그저 기예를 겨룰 뿐 상대를 다치지 않게 배려해야 하는 까닭이라네·”
“음· 역시 검우야· 이런 진단이 듣고 싶었단 말이지·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너무 승패에 집착할 필요가 없네· 생사결이 아니지 않소· 승부를 내려 드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기예를 체험하고 대처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오·”
청이 순순히 조언을 받아들였다·
하여간 친구 좋다는 게 다 이런 거지·
“좋아· 와라 검우! 목광검이 굶주렸다!”
“좋군! 가겠네!”
그리하여 청 대 남궁신재· 일 대 구·
청이 믿기지 않는 결과에 좌절했다·
그나마 한 번 이긴 것도 힘으로 찍어누른 결과라서 무효라고 할 수 있었다·
“뭐지 어째서 이 몸이 계속 패배하는 것이지? 분명 인간은 패배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을 터인데· 사술 사술이다! 네놈 남궁신재 도대체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냐!”
“그야 본래 대련이라는 것이 그렇게 공평한 경기가 아니니 말이오·”
대련은 본래 승부를 가리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는 하다·
그래도 굳이 유불리는 따지자면 살상보다 제압에 목적을 둔 무공들이 훨씬 유리하고 강맹함보다 부드러움에 단순함보다 기교에 기반을 둔 무공이 훨씬 유리하다·
그리고 청은 천살을 품은 살성에 인류를 초월한 힘으로 내리찍기를 좋아했다·
그야말로 대련에는 쥐약이었다·
“이거 완전히 기울어진 대련장이잖아? 차 떼고 포 떼고 말까지 떼고 무슨 승부를 봐?”
“그렇다고 생사결을 벌일 수도 없으니· 게다가 뭐 비무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으니 연습한다 생각하지 않겠나?”
청이 불만을 가진다고 해서 잠룡비무회가 ‘생사결~모두의 생존 경합~’ 따위로 바뀌지는 않는 법이었다·
“뭐 여차하면 힘쓰면 될 테니까···”
수련 대련의 특별 규칙으로 둘 중 누구라도 목검이 부러지면 청의 패배였다· 그러니 일 대 구의 처참한 성적이 나올 수밖에는·
청의 근력 의존을 줄이고 기예를 단련하기 위한 특별 조치였다·
“검우 그런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두는 건 좋지 않다네· 기예로 승부를 본다 생각해야지·”
“원래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면 들어가지도 말아야 하는 법이거든?”
“하핫 검우를 입으로 이겨먹을 수는 없지· 자 다시 가겠네!”
그리하여 다시 다섯 판 일 승 사 패·
무려 두 배의 승률을 기록했으니 일취월장이라 해야 할까·
남궁신재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물러나자 청이 이번에는 팽대산에게 손짓했다·
“자 다음은 산· 자 들어와·”
“지금 바로 대련하자고? 쉬지 않고?”
“딱 좋게 몸이 풀린 기분이거든? 이제 좀 몸이 올라왔으니 때를 놓치지 말아야지·”
“흠· 체력도 좋군· 지고 나서 핑계거리로 삼을 생각은 하지 말도록·”
“오우· 도발하시겠다? 좋은 반검 놔두고 입으로 떠들 테야?”
“그놈의 반검···!”
그리고 청이 두 번 내리 이긴 후에 여덟 번을 내리 패배했다·
팽대산의 비열한 수작 때문이었다·
“무기만 노리는 게 어딨어! 완전 이겨먹으려고 작정했네!”
“규칙은 규칙 아닌가? 무기가 부러지면 네 패배라고 했으니·”
“겨우 대련인데 승패에 집착하시겠다?”
“이겨 먹고 온갖 소리를 다 해놓고는 그런 말을 해 봐야·”
청이 인상을 찌푸렸다·
두 번 내리 이기고 나서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사내놈이 꽁해가지고는 비겁하게·
팽대산이 그저 강공으로 부딪침을 유도해 몰아치니 강공으로 받으면 그대로 목검이 부러져나갔다·
게다가 목검이 워낙에 약해야지·
남궁신재가 지난 용봉지회의 대련에서 흑단목 목검이 부러진 이후로 청의 상태를 진단하여 오히려 무른 나무로 주문한 특제 싸구려 목검이었다·
검우의 성장을 위한 남궁신재의 따뜻한 마음씨였다·
마차에 궤짝으로 한 개 이후에 소모하는 속도가 심상치 않자 후에 궤짝이 두 개나 더 도착하고 나니 조금 무거운 마음씨이긴 해도·
언제 쓸 줄 알고 저걸 저만큼이나 준비를 해 놨대·
“검우 그 목검값을 좀 낼까? 다 내가 해 먹고 있는데···”
“전부 다 해도 저번에 검우가 부러뜨린 흑단목 목검의 반의 반값도 안 된다네· 전부 땔감으로나 쓰는 잡목으로 대충 모양만 잡아 깎아냈으니· 중심이 전부 다른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음·”
“게다가 검우와 검을 나누는 검정의 자리에 그깟 금전이 무어라고·”
“검우! 감동! 아니 검동! 감검!”
“감검이 마음에 드는군! 나야말로 감검이라네! 자! 다시 검정을 나눠 보세나!”
그에 팽대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주 연놈들이 놀고 자빠졌다고·
“검우 잠깐 쉬고· 산! 이리 오너라!”
“산이는 호흡 좀 골라· 검우! 교대다·”
그리고는 청이 아예 둘을 교대로 돌렸다·
연신 멀쩡한 목검을 부러뜨려먹는 데에 열중하니 그렇게 무천각 연무장에 부러진 목검들이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누가 보면 목검에 원한이라도 있는 줄 알 광경이었다·
그렇게 아예 목검이었던 장작더미가 한 무더기 수북하게 쌓이고 나니 어느새 해는 저물어 사위가 어둑하게 내려앉았다·
“허억 헉 다음 산 헉 후우···”
청이 흠뻑 젖은 채로 다음을 외쳤다·
무려 두 시진 반을 내리 휘두르며 한 번을 쉬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에 팽대산과 남궁신재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남궁 형 역시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수련도 수련이지만 어째 그보다는 몸을 혹사하고 싶어 안달인 것 같아·
그렇게 의견을 교환한 두 사내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대련도 좋지만 슬슬 배가 안 고프나?”
“그래 검우· 수련도 좋소만 충분한 식사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네·”
맞춤식 화제 전환의 효과는 굉장했다!
청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츄르릅 곧장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오잉? 와 밥 먹는 것도 잊고 있었네? 완전 배고파· 밥 먹자 밥·”
—-
오월의 광주는 이미 더위라고 할 만한 날씨가 한창 펼쳐진 때다·
그나마 밤이 되면 선선하니 객잔이며 반점 채점 다점 등등 죄다 대로변에 간이 식탁을 펼쳐놓고 손님을 받았다·
그렇게 건물과 건물 사이에 줄 매달아 등불 걸어 온화한 조명 아래 한 노소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병약한 손녀 데리고 나온 노파쯤으로 보였는데 짐승의 눈으로 봐도 만만해 보였는지 떠돌이 개 한 마리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노파가 개를 내려다보았다·
“음? 웬 개새끼가· 세상 이리 못생겼을까· 그러니 주인이 내다버린 모양이지?”
노파가 그리 말하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턱을 문질렀다·
그에 여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멍청한 짐승이 아닌가요? 어찌 이 많은 사람들 중 신파를 딱 골랐을까요? 피 냄새라도 맡은 걸까요? 신기하기도 하여라·”
“개도 저 예뻐하는 사람은 안다고 하지 않더냐· 짐승의 본능 같은 것이겠지· 옜다 아주 배가 홀쭉하구나·”
신파 소수마파가 큼직한 민어 한 마리를 통째로 툭 던져주니 오랜만에 먹이를 본 떠돌이 개가 꼬리가 빠지도록 흔들어대며 제 대가리를 처박았다·
“어머 신파· 개에게 생선을 주면 안 된답니다· 가시가 목에 걸리는 수가 있어요·”
“그래봐야 제 팔자가 아니냐· 그리고 바닷가 개는 생선을 잘만 먹는다· 생선도 못 먹어본 촌구석 개들이나 먹다가 가시가 걸리지·”
“흐음· 신파라도 개에게는 친절하시네요·”
그에 신파가 클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렴 말이냐· 사람보다 개가 훨씬 더 낫지· 저를 삶는 주인에게도 꼬리를 흔드는 미련한 짐승이니 은혜를 알고 변하지 않는 훌륭한 것들이 아니냐·”
“그런 식으로 말씀들을 하시던데 저는 잘 모르겠답니다· 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지 않나요?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해서 물어도 이상하지 않잖아요? 개의 생각을 개가 아니고서야 어찌 알겠어요?”
언연영이 정신없이 민어를 퍼먹는 떠돌이 개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그 눈빛이 아련하니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개는 많이 굶주렸던 모양
그 큰 민어를 순식간에 껍질 한 조각 안 남기고 머리꼬리 죄다 씹어 삼켰다·
그리고 나니 또 휙휙 꼬리를 마구 흔들다 이번에는 언연영에게 다가와 헥헥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는 것이다·
언연영이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떠돌이 개의 단단한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었다·
“어릴 적에는 개를 참으로 무서워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니 음 신파의 말이 맞아요· 사람보단 개가 낫기는 하네요· 적어도 개는 먹이 주는 사람을 따르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상관하지 않잖아요?”
“어지간한 짐승들이 다 매한가지가 아니더냐· 그러고 보면 사람이 짐승보다 훨씬 못한 것들이지· 짐승만 같아도 세상이 얼마나 살기가 좋았을꼬·”
“음· 그래요· 신파 우리 청승맞은 소리는 그만하도록 할까요? 슬슬 일을 하셔야죠?”
언연영이 다소곳이 손벽을 탁 쳤다·
그러자 대로 가득히 깔린 노상 식탁에서 일제히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는 언연영이 희고 긴 손가락을 들어 한 편을 가리켰다·
언연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직선이 대로를 지나 거대한 장원의 정문으로 이어졌다·
광주의 주인 광동진가의 장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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