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2
청이 머리를 문지르며 생각하기를 으음 이번엔 좀 맞을 만했던가 싶기도 하고·
사부님 앞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건 조금 도를 넘었든가 넘지 않았든가 뭐 어쨌든 이상하게 사부님 앞에만 서면 입이 가벼워져서 할 말 못할 말 다 하게 된단 말이지·
“이러다 제자 머리 평평해지겠어요···· 저 편두가 되어 버려요?”
“제자 머리통은 아주 만년한철 저리가라 할 수준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흐음· 그나저나 신투가 네 스승 자리를 노린다는 말이더냐?”
“어· 그렇게까지 나쁜 분은 아니셨어요· 수련법을 알려주시기도 했고· 제가 단단히 거절을 해 뒀으니까요·”
청이 천유학을 변호했다·
사실 뭐 해 준 것도 없이 날름날름 받아먹기만 한 처지가 아니었던가·
“흠· 뻔히 스승 모시고 있는 제자에게 두 스승 모시라고 꾀다니· 그 치 낯짝도 참 두껍구나· 그래· 내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다·”
“제가 잘 이야기해두면···”
“누가 뭐랬느냐? 얼굴이나 보자 했지·”
“앗 아앗·”
청이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물론 천유학이 막되먹은 시도를 하기는 했지만 결국 좌절되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텐데 괜히 떠들었다 싶기도 하고·
그때였다·
“청아야! 대체 뭐가 그리 오래 걸··· 아 안녕하세요· 대모님 오셨어요?”
“난아로구나· 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못 본 걸로 해 주겠니?”
“청아는 중요한 손님 때문에 따로 먹게 되었다고 전해두겠습니다· 소녀는 이만·”
당난아가 돌연 나타나 빠르게 사라졌다·
서문수린을 편하게 대하는 사람이라고는 청 또래 중에는 청 밖에는 없었다·
청도 문이 열리고 당난아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딱히 도움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후였다·
“자· 앞장서거라·”
“네···”
이렇게 된 바에야 신투로 추정되는 책 팔이 아저씨가 눈치껏 도망을 쳤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하지만 서문수린 정도 되는 무인이 작정하고 몰래 찾아온 사실을 아무리 날고 기는 신투라고 해도 알 리가 있겠는가·
댓자리 깔고 누워있던 신투가 자박자박 다가오는 걸음에 잠깐 생각에 잠겼으니 발 전체를 써서 털썩털썩 무게를 싣는 사나이 특유의 털털한 발소리는 바로 청의 것이다·
그 옆에 천유학조차 놓칠 뻔한 사뿐사뿐 천상 여인의 발소리가 하나 섞였다·
이 계집이 뭘 놓고 왔나?
굳이 말로 정해두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눈치껏 여기가 ‘만남의 장소’쯤 하는 무언의 약속이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눈치도 없이 제 친구라도 끌고 오나?
천유학이 잠시 고민하다가 딱히 꿀릴 것 없고 나쁜 짓 한 것도 없으니 당당하게 맞이해야겠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관을 정리했다·
청이 도착했을 때는 아까처럼 댓자리에 누워 배나 벅벅 긁고 있던 책팔이 아저씨가 아니라 어쩐지 진중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고 있는 천유학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 이제 오느 흠흠·”
천유학이 근엄한 소리를 하다가 서문수린을 확인하고는 말소리를 가다듬었다·
“본인은 한림원의 시강학사 천유학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와는 짧은 인연이 있어 교우하게 되었습니다· 실례지만 고아하신 귀부인께서는 혹시 그 귀한 이름자를 졸자에게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느끼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였다·
으엑· 청의 입꼬리가 아래로 휘었다·
그에 서문수린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천유학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심상치 않다· 서문수린을 바라보는 눈빛이 그윽한 것이 더욱 심상치 않았다·
서문수린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한림원 시강학사라· 혹시 오산자라 하는 도사를 아느냐? 선풍도골 아주 도사 꼴을 하고서는 앞니가 위아래로 하나씩 두 개가 없는 아주 웃기는 작자다만·”
그에 천유학의 표정이 굳었다·
“그 고인께서는···?”
“네 스승이 이야기해주지 않더냐? 어쩌다 앞니를 해 먹었는지?”
“위쪽 말씀이십니까 아래쪽을 말씀하십니까?”
“따로 말하더냐? 그래 무어라 하더냐?”
“위쪽은 소림의 무학 대사께서 스승님과 무공을 나눌 때에 워낙 격렬한 비무였기에 미처 손속의 자비를 두지 못하셨다고·”
서문수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래쪽은?”
“경공에 심취하여 벽을 넘으실 때에 무아지경에 빠져 날아오는 백로와 부딪치고 마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이상한 일이로구나· 분명 내 이리로 직접 박살을 낸 기억이 선명한데·”
서문수린이 제 주먹의 그것도 중지 부분 볼록하게 솟은 뼈를 보란 듯이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여전히 몹쓸 놈이로구나· 무학에게 맞아 앞니가 부러진 것은 부끄럽지 않지만 여인에게 그러한 것이 부끄러워 제자에게 거짓을 고하다니 쯧쯧·”
그에 천유학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게다가 무어 경공으로 무아지경에 이르러 비조와 부딪쳐? 그야말로 백로가 비웃을 소리가 아니더냐·”
“그 귀부인께서는 성함이···”
“서문수린이라 한다· 듣자 하니 내 제자가 많이 탐이 나는 모양이던데·”
그에 천유학이 뜨악한 표정으로 청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주 배신감 가득한 시선이었다·
저 과거 저 멀리 길 잘 통하는 모 국가의 황제가 가장 믿던 심복에게 배신당했을 때 보냈을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그에 청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서문수린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자· 변명을 해 보겠느냐?”
“그것이 아이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천유학이 돌연 바닥에 납죽 업드렸다·
물론 그 절도에 있어서는 당난아에 비해 손색이 많은 사죄였지만 어린 계집과 다 큰 아저씨가 가진 체면의 차이가 있으니 그를 감안하면 대단한 한 수이긴 했다·
“그러나 소인이 대인의 제자를 보지 못했으면 모르되 이미 눈에 들어 천하의 아니 천하제일의 기재임을 알아보았으니 세상에 스승이 되려는 이가 어찌 그냥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도 마음에 들었더냐?”
“어린 나이에 이미 경공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감각이 뛰어나고 배움의 속도가 찰나와 같이 번뜩이니 세상에 이러한 재목이 둘이 존재하겠습니까· 본래 소인의 성정이 성급하고 또한 지독하여 도리가 아님에도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었을 뿐입니다·”
“흐음·”
“허나 고인의 제자가 이미 스승의 대한 의리로 온갖 신공을 전부 마다하며 거절의 뜻을 밝혔으니 소인도 이미 포기를 한 바 그 뜻이 기특하고 가상하여 조금의 도움을 주고자 했을 뿐입니다· 제자를 탐내기는 진즉 마음을 접은 것인즉 너무 노하지는 마시옵고···”
“좋다·”
서문수린이 천유학의 말을 끊었다·
그에 천유학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서문수린의 눈치를 살폈다·
“···그 좋다고 하시면 용서를 말씀해 주시는지 아니면 그으 제자분을···”
“신투 중에 여인이 있었더냐? 그러면 한 번쯤 나와도 좋겠지· 네가 비록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림원 시강학사라더니 깨인 놈이기는 한 모양이구나·”
의외로 시원스러운 수락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천유학이 기대하지 않은 칭찬에 눈만 꿈벅거렸다·
“감사합니다! 고인의 제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큰 스승이 되겠습니다·”
“오냐· 그래야지· 제자야 무엇 하느냐· 작은 스승에게 예를 올리지 않고·”
“어 사부님·”
“왜 좋지 않으냐· 내 신투의 무공들을 대강 알고 있다마는 개중에 신공 아닌 것이 없어 고절하기 짝이 없단다· 신공이 네게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때에 스승 하나 더 모시는게 무슨 대수라고 내가 막겠느냐?”
“저는 괜찮아요· 저한테는 스승님만 계시면 되니까· 그리고 신공 같은 것도 그렇게 탐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에 천유학은 섭섭한 표정을 서문수린은 부드럽게 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 말해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구나· 세상에 무공이 탐이 나서 천인공노할 죄를 짓는 놈이 한둘이 아니거늘 제자가 이리도 어여쁘니 말년의 큰 복을 얻었어·”
“헤헤····”
“허나 애초에 내 사람 됨됨이를 보고 허락할 요량이었으니 한림원의 시강학사라면 그 학식만으로도 스승으로 둘 거인이란다·”
그에 천유학의 표정이 다시 우쭐해졌다·
청이 결국 자리에서 큰 절을 올렸다·
본래 스승을 모시는 절은 세 번이다·
사문과 시조님에게 한 번 스승의 스승님들께 한 번 그리고 스승님에게 한 번·
하지만 신투에게는 딱히 사문이 없고 또 전대 신투는 전수가 끝나면 은퇴하여 본래 하던 일이나 하니 딱히 대우하지 않았다·
그러니 스승께 올리는 큰절 한 번이었다·
천유학은 온통 싱글벙글이었다·
그러다가 돌연 살살 눈치를 보다 묻기를-
“그런데 어르신 그 제 사부 오산자께서 앞니를 잃은 일에 대해···”
“왜? 알고 싶으냐·”
“예· 스승의 일을 제자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서문수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딱 봐도 만나면 놀려먹겠다는 뜻이라서·
“별것 아니다· 감히 금남의 신역인 신녀문에 침입해 망측하게도 속옷을 훔친 사내놈이 있어 혼을 내주었을 뿐이지· 한참을 두들겨 맞더니 도망을 치더구나·”
서문수린이 주먹으로 팬 이유는 간단했는데 색마는 죄다 패죽여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 때문이었다·
더 맞다가는 죽겠다 싶은 신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다·
신투의 경공이 천하제일이고 변용과 축골 등등 온갖 회피할 수단을 갖췄으니 아무리 서문수린이라 해도 쫓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감히 신녀문까지 들이쳐 제자의 속옷을 훔쳐 달아난 파렴치한 색마를 서문수린이 절대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하여 쫓고 쫓기는 집요한 추적과 도망 끝에 견디다 못한 전대 신투가 마침내 소림사로 숨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남이가 불문 도문의 끈끈한 정을 너무 얕보았으니 결국 무학에게 두들겨 맞아 앞니를 하나 더 깨먹은 신투가 둘둘 묶인 채로 서문수린 앞에 놓였다·
“스승님이 여인의 속옷을 훔쳤다는 말씀이십니까?”
천유학의 눈이 번뜩였다·
스승의 치부를 잡았다는 아주 불경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서문수린이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알고 보니 도둑맞은 제자의 속옷이 무림에 한바탕 피바람을 불러올 장보도였다고 하더구나· 인연이 닿아봐야 좋은 물건이 아니었으니 그에 참작하여 용서해 주었지·”
—-
오늘은 모처럼 제자와 회포를 풀어야겠으니 작은 스승은 내일부터 본격적인 가르침을 베풀라고·
서문수린이 그리 말하고는 청과 오붓한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청이 눈치를 보다 말했다·
“사부님 굳이 스승 한 분 더 모시지 않아도 괜찮았는데요·”
그러자 서문수린이 빙그레 웃었다·
“괜찮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모를 터인데 무어 대수라고·”
서문수린도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니다·
이리저리 재고 따져보니 그래도 되겠다고 판단이 섰을 뿐이었다·
일단 신투의 정체는 비밀이다·
즉 현 신투도 전대 신투도 미래의 신투도 전부 정체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러니 스승과 제자라고 해봐야 한 시대에 몇 명 되지 못했다· 최대로 잡는다고 해도 사조 사부 제자 제자의제자 네 명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그러니 청이 어디서 스승 둘 모신다고 밝힐 일이 없고 천유학도 어디서 서문수린의 제자가 내 제자다 하고 떠들 수도 없었다·
물론 정체가 탄로가 나더라도 그대로 괜찮지 않은가·
신투가 여인이라는 점도 중원 여인들의 큰 자부심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청의 배분 상 그렇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다만 신투의 이름을 물려받게 되면 그에 따른 의무가 생기기는 했다·
위험한 물건이 위험한 인물에게 닿지 않도록 음지에서 강호를 수호한다나 뭐라나·
서문수린이 생각하기에는 충분히 의로운 일이며 또한 그리 할 일이 많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될 제자가 모양 빠지게 도둑질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 그냥 가서 줘패고 가져오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신투의 수법들을 직접 겪어보았으니 제자가 익히면 참 좋은 것들이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도 이득뿐이다·
그러니 서문수린이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번엔 지각 아니었는데··· *억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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