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3
저녁 먹고는 작은 스승을 모신 역사적인 첫 수업이었다·
본래 첫 수업이란 대뜸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멋들어진 개요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 스승의 법도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신투가 스승으로서 처음으로 말하기를 이러했다·
“흥· 그래도 나름 섭섭하지 않게 대접해 준 것이 아니냐? 그걸 홀라당 일러바쳐? 그렇게 안 봤는데 계집애가 의리도 없지·”
보통의 제자라면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허둥댔을 만한 뒤끝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청은 이 방면에서는 이미 거인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청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삐친 어른을 달랬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만큼 스승님께 의리를 지킨 거고 이젠 스승님이시잖아요· 안 그래용?”
“크흠· 그래도 그렇지 도고께서 허락하셨는데 네가 또 나서서 필요 없다고 할 것까지 있었냐고·”
“에이이· 거기서 감사합니다! 해버리면 사부님이나 스승님이나 저나 우리 모두가 가벼운 사람 되는 거 아니겠어요? 저도 속으로는 환호했지만 한 번은 그래야 하는 때였거든요? 인정하십니까?”
신투가 한결 누그러졌다·
“크흠흠· 그런데 도고께는 사부님이라 부르더니 날더러는 스승님이냐?”
“작은 사부님보단 낫지 않으세요? 작은 사부님이 더 좋으실까요? 둘째 사부님?”
“크흠· 앞을 뗄 수는 없냐· 사부님 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날 스승이라 부르는 놈들은 이미 널렸단 말이다·”
“오잉? 제자가 이미 많으세요?”
“무식한 것아· 도고께서 하시는 말씀 못 들었냐? 내가 한림원 시강학사라니까?”
창조신 여와가 청을 빚어냈다고 치면 그 외양은 누구보다 공을 들였지만 재료를 잘못 썼는지 굽기를 잘못했는지 속은 텅텅 빈 맹탕이라 하겠다·
청의 표정을 본 천유학이 ‘혹시 이거 잘 못 고른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함을 느꼈다·
“···모르냐?”
“···알아야 할까요?”
한림원이라고 하면 중원 최고의 교육기관이며 최고의 고등 교육기관이었다·
과거 당조 설립 시기에는 천자의 교육을 맡을 정도이며 관에서 실시하는 감찰 행정 사법 등 모든 업무에 관여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쥔 단체이기도 했다·
그러나 황조가 바뀌며 사람도 물갈이가 되었으니 지금은 중원 학문의 중심지로서 교육과 서적 편찬 및 연구에 전념했다·
한림원의 직책은 대충 청의 고향 식으로 교장인 한림학사 교감 두 명으로 시독학사 시강학사라고 하겠다·
시독학사는 시를 읽는다는 이름대로 연구 분야에 시강학사는 시를 가르친다는 이름대로 교육 분야를 맡은 대장이기도 했다·
서문수린이 시강학사 정도면 학식만으로 거인이라 불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만 한림원 시강학사 쯤이나 되는 거인이 신투질을 겸업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기는 했었더란다·
“와· 스승님 엄청 대단한 분이셨네요· 막 대스승 참스승 큰스승 이런 거 아니세요?”
청의 머리는 비었더라도 그 외양만큼은 진짜였으니 예쁜 제자의 애교 앞에서 아저씨의 마음이 살살 녹았다·
“흠흠 뭐 잡담은 이쯤 해 주고· 일단은 신투···· 아니지· 너 이 계집아 내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냐?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어··· 무영신수 비급을 보여주셔서요?”
“역시! 그거 알아본 것 맞잖냐!”
“몰라봤다고는 말씀 안 드렸는데· 그리고 도대체 왜 비급을 춘화집으로 만들어 놓는데요? 그것도 못 그린 춘화집이던데·”
“못 그리다니! 화선畵仙이신 금조현 화백께서 한 장 한 장 그려 엮으신 미술사 최고의 역작이란 말이다!”
“야한 책을 두고 그리 말씀하셔도···”
“크흠·”
천유학이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신투가 진전을 이을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질이 예리한 감각이거든 천하제일의 춘화를 두고서도 그에 흔들리지 않고 음각으로 미세한 글귀들을 너처럼 눈으로 확인하는 안력을 가졌거나 아니면 손으로 더듬어 알아채는 정도의 감각이 필요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 그런 거였네요·”
청은 그냥 손 대서 등록되었을 뿐이라서 그런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천유학이 알았다면 땅을 칠 일이었다·
“흠흠· 춘화 말고 도덕경이라도 새로 써야 하나·”
천유학이 속으로 생각했다·
제자가 여인이라서 이런 쪽으로는 같이 시시덕거리기가 민망한 것이 단점이구나 하고·
물론 청을 너무 얕보았다·
“화선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춘화라 하기엔 너무 점잔을 뺀 화풍이 아닐까요? 좀 더 원초적인 끌림이 있어야지 춘화를 벽에 걸어둘 것도 아닌데·”
“음?”
“좀 더 이렇게? 음 잘 안되네···”
청이 청자검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날카롭기로 유명한 희대의 명검 중 하나를 돌 섞인 바닥에 긋고 앉았으니 누군가 보면 기겁을 하며 뺨다구를 날릴 만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병기 알기를 대충 소모품인 청과 보물 알기를 돌덩이같이 하는 신투였기에 둘 모두 별 감흥이 없었다·
“음? 이런 화풍이? 못 그렸지만 그래도 음· 선이· 호오· 너무 과감하지 않냐· 본래 사람이 인체가 이렇지 않은데·”
“에이 그림인데 좀 그럴 수도 있죠·”
“···? 무슨 해괴한 논리냐?”
청의 고향에는 사진이라는 기물이 있어서 그림이 자유로운 핑계가 되곤했다·
하지만 중원에는 없었으니 천유학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음· 느낌이 있어· 네가 그림을 좀 배워서 제대로 좀 그려 보면 좋겠네·”
“에이 무인이 무슨 그림을 배워요?”
“도고께서 말씀하신 바다· 네게 금기서화를 좀 가르치라고 하시더군· 연주는 곧잘 하고 글씨는 천하의 명필이니 바둑과 그림만 가르치면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맞다· 글씨나 좀 보자· 어찌 쓰길래 천하의 명필 소리를 하시나?”
그리고는 품에서 종이와 붓과 병을 꺼내 들이미는 것이다·
청이 그에 순순히 글씨를 쓰니 아사제일 우리 스승님이 최고다 네 글자를 써냈다·
청의 글씨는 보정을 받아 써지기가 바로 현대 한민족의 표준 정자 모양이다·
한 획 한 획이 두꺼우면서도 둔한 느낌이 없어 부드러우며 도도하게 뻗치고 그렇게 아름다운 획들이 가득 차서 글씨에 여백이 남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높이와 너비가 일치하니 중원 사람이 보기에는 기절초풍 환장할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아름다운 글씨인 것이다·
“아니 세상에· 획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천근의 무게로 자리를 잡았구나· 팔법으로 이미 한 서체를 완성하여 대가 아니 거장의 경지에 이르렀도다! 기상이 웅대하여 태산과도 같은 웅장함을 글씨로 펼쳤으니 이는 천하의 가장 무거운 글씨라 하겠다! 어찌 이러한 귀한 글씨를 가지고도 서예로 이름을 떨치지 못하였단 말이냐·”
얼마나 놀랐는지 시강학사의 품위 있는 말투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야 청의 글씨를 본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데에다 무인들이 글씨 보고서 문인들처럼 큰 감흥을 갖지 않았으니까·
결국 수업은 뒷전이고 둘이서 열심히 놀며 떠들었다·
스승도 제자도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으니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그리하여 신투가 본래 꺼내려던 본론은 밤이 늦어 맨 뒤에서야 겨우 나오고 만 것이다·
“신투는 그냥 도둑놈이 아니다· 천하에 이로운 도둑놈이지· 의적 짓도 좋고 사심을 채우는 것도 좋지만 신투는 세상에 해로운 물건을 치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해로운 물건이요?”
“그래· 해로운 물건이라 하면 당연히 세상에 해로운 물건을 말한다· 사악한 마검 마공 아니면 끔찍한 극독이라던가·”
“와 마검이란 게 있어요? 그럼 마검이 막 말도 하고 그래요?”
“···?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 음· 아니 그리 틀린 소리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오래도록 사람의 피를 먹었거나 모종의 이유로 깊게 원한이 사무쳤거나 인신 공양을 통해 만들어졌거나 하는 등등 사람을 홀리는 종류의 마병들이 있었다·
일단 손에 쥐고 나면 사람을 베고 싶어서 그 충동을 참을 수가 없다고 하니 마검이 사람에게 속삭인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마검을 쥐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쨌든 또 해로운 물건이라 하면 이름난 보물들이 있다· 이러한 보물들은 사람의 탐욕을 부채질해 큰 불길을 일으키니 곧 욕심에 눈이 벌건 놈들이 피를 보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좋아 보이는 건 다 훔치라는 소리 아니에요?”
“그러니 천하의 도둑놈이지· 하지만 그로 인해 천하가 평안하다면 누구 한 사람이 도둑놈 소리를 들어도 괜찮지 않겠냐·”
천유학은 선업을 쌓은 인물이었다·
악업을 가진 놈이 말했다면 개소리라며 코웃음이나 쳤겠지만 선업을 가진 사람이 말하니 설득력이 있었다·
심지어 책을 강매하다 선업을 이 점이나 떨구는 모습을 직관하지 않았던가·
그런 식으로 선업을 떨궈왔다고 생각하면 본래는 굉장히 높은 선업을 가졌을 것이라 추론을 해 볼 수도 있겠고·
“앞으로 네가 이어받아야 할 일이지· 또 훔친 물건은 알아서 처리하면 된다· 그냥 태우거나 묻어도 되고 적당한 주인을 찾아주거나 해도 되고· 나는 금붙이는 녹여다가 금자로 썼다마는·”
“좋은 건 다 훔쳐라· 훔쳐서 마음대로 해라· 안 하는게 손해네요·”
“그리고 최고의 재능을 가진 후인을 찾아 잇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고· 솔직히 이게 더 중요하지· 보물은 언제든 훔칠 수 있어도 신투의 명맥이 끊겨서는 안 되니까·”
“알겠어요· 최고의 제자를 키워라·”
그에 신투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투가 전수하는 무공이란 넷인데···”
금나수이자 소매치기의 수법인 무영신수·
일절 아무 소리가 없으면서도 단거리에서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절세의 경공 격공순신·
그리고 인체의 관절 가동 범위를 비약적으로 늘려주는 외공 유류연련·
그리고 내공심법이 있기는 한데 이는 그저 외워두면 되고 배울 필요까지는 없다·
신투가 겸업이라 본래 내공심법 하나쯤 가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고께서 네가 여러 심법을 동시에 익혀도 괜찮다고 하시던데· 구천현녀의 진전을 이었다고?”
“네· 그렇대요·”
“과연 구천현녀라 하면 무학의 종사이자 아홉 세계의 조율을 맡으신 중용의 화신이시니· 그야말로 무공 중 최고의 신공이라고 해도 되겠구만·”
청이 서문수린과 입을 맞춰둔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혹여 여러 내공을 쓰는 것이 들키게 되면 하는 변명이었다·
청이 지금까지는 그게 통할까 싶었는데 통하는 것을 보니 과연 사부님이다 전부 다 계획이 있으시구나 하고·
“잘됐네· 그럼 각성신공을 배워도 되겠어· 본래 신투에게 딱 맞는 내공심법이라 본래 제자를 구하다 정 안되면 아이라도 하나 거둬다 가르치게 되어있는 것이거든·”
청이 슬쩍 검색을 해보니 어째 보라색 무공 한 개가 없다·
무영신수 금색 격공순신 금색 유류연련 금색 각성신공 금색· 죄다 황금빛이다·
청이 조금 실망했다·
소림사 걔네는 뭐 주워들을 때마다 검색하는 족족 보라색 아닌 게 없던데····
그야 천하의 모든 무공이 소림에서 나왔다며 무공의 종주라 자부하는 소림의 공부니까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자· 이제부턴 네 거다·”
천유학이 서책들을 내밀었다·
청이 손대자마자 무공창이 알림을 띄우는 것을 보니 하자 없는 무공서였다·
“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가르쳐줄 테니 오늘은 쭉 훑어두어 대강이나마 머리 속에 담아둬라· 오늘은 잠을 안 잔다고 생각해· 본래 공부는 그렇게 하는 거거든· 흐흐·”
천유학이 흘리는 웃음이 불순했다·
고생깨나 하라는 듯한 소리였다·
다만 청에게야 순식간이고 눈 까뒤집고 후유증에 성대 긁는 소리나 내는 시간까지 일 각이면 충분한 일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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