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3
경담간이 생각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은 절망이다· 인간에 대한 실망과 좌절으로 굳은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끝없는 나락에 떨어진 그 눈빛이야말로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귀하다·
조금만 괴롭혀도 무너져버리는 연약한 자가 절망해봐야 잠깐의 여흥일 뿐 그나마도 오랜 예술적 경험으로 역치가 올라 이제는 별반 감흥도 안 들었다·
그래· 지금 그것처럼·
작전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폐기해 버렸을 하하품下下品의 재료였다· 하지만 취미와 일을 동일시하면 결국에는 취미가 한 발을 양보할 수밖에는 없으니 놔 두고 있지만·
그러던 와중에 상상품을 넘어 특상 아니 극상의 소재가 들어왔으니 이걸 어떻게 깎아야 더 멋진 절망을 볼 수 있을까·
경담간의 뇌리에는 오로지 그뿐이었다·
일단 마무리는 정해 두었다·
여인이 무너지는 순간은 대개 그 정조가 유린당하는 무참한 폭력 앞에서였기에·
그렇게 지키고자 하던 낭인 놈들에게 온종일 욕을 보이도록 하면 그 아해의 반응은 어떠할까·
사람이 무너질 때에 모습도 제각각이니 신녀문 제자는 울 것인가 아니면 처절한 비명을 지를 것인가· 아니면 그저 힘없이 풀린 눈빛으로 산 시체처럼 포기해버려도 좋고·
“크흐흑·”
생각만 해도 신이 난 경담간이 기묘한 웃음소리를 참지 못했다·
그럼 그 전에는 어찌 괴롭히지?
온 신경을 헤집는 통증으로 누구라도 고꾸라지고 마는 고독의 독을 버텨내는 독종이니 육체적 고통에는 굴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정신을 서서히 무너뜨려야 할까· 가냘픈 희망의 끈을 내려주어 포기하지 않게 하면서도 그 영혼이 조금씩 병들게 만들 방법이···
경담간이 바지를 벗어던지고 즐거운 상상으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발칵 문이 열리며 부하가 들이친다·
“부단주님! 지금 나와보셔야 헉!”
시각적 자극에 의한 우주적인 공포에 직면한 부하가 보고를 잇지 못했다·
“···놈!”
붕 날아간 경담간이 부하의 목을 틀어쥐었다· 이 순간 가장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죄와 상관의 추태를 들여다본 죄는 당연히 사형이었다·
“꺼억····”
부하가 의식을 잃어가며 생각했다·
시발 지금 목 조르는 손으로 시발시발 더럽게 시발 서지도 않는 고자 새끼가 차라리 검을 써···
축 늘어져 부하였던 것이 된 시체를 내팽개쳐버리고 나선 경담간이 아예 문을 잠가버렸다·
애초에 문도 안 잠그고 그 지랄을 한 놈의 잘못이었지만
덕분에 혈교 무인만 곤란해졌다·
“부단주께선 언제 오시는 거야?”
“막내를 보냈으니 금방 오실 겁니다·”
“막내가 언제 갔는데 안 오냐고!”
부단주 부르러 간 막내는 돌아오지 않고 부단주도 소식이 없다·
“아악!”
혈교 무인들이 발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모르고 상황만 바라보았다·
발단은 아침 식사였다·
“계집 일어나라!”
“아오· 찬 바닥에서 잤더니 몸이 다 쑤시네· 어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뭐야?”
밤새 한 번도 안 깨고 숙면을 취한 청이 툴툴거렸다· 옥을 지키며 밤새 쌕쌕 고른 숨소리와 도롱롱 간혹 귀여운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간수 무인은 기가 막혔다·
“자· 아침 식사다·”
“오· 눈 뜨자마자 아침밥이라니·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그래서 뭐예요? 맛있는 거 나왔어요?”
밥 주는 사람에게는 공손한 청이었다·
왜냐하면 밥 주는 사람에게 무례했다간 그 다음부터 밥에 무슨 장난을 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태평도 하군·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자· 주먹밥이다· 받아라·”
“주먹밥···”
청이 간수 무인을 살폈다·
간수 무인이 손에 든 큼지막한 주먹밥의 크기 자체는 푸짐하니 마음에 들지만 그 외에는 손에 든 것이 없었다·
아침에 국물도 없다니····
그래도 아침을 주는 게 어디랴·
“잘 먹겠습니다·”
청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창살 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막 주먹밥에 그 아름답고 길쭉한 손가락이 닿기 직전이었다·
툭·
명백히 고의적인 손길로 주먹밥이 떨어져 자유낙하했다· 둥글게 빚어진 주먹밥이 찬 지하 바닥에 떨어져 철퍼덕 퍼져버리고 만다·
“어?”
“크큭 무슨 밥집이라도 온 줄 아느냐? 자· 봐라· 이게 바로 네 미래다·”
간수 무인이 주먹밥을 꾸욱 즈려밟았다·
불쌍한 주먹밥은 바닥에 짓이겨진 음식물 쓰레기로 남고 말았다·
“네가 먹을 것은 이것밖에 없다· 크흐 이렇게 보니 그야말로 천하제일미녀가 따로 없군· 언제쯤 내 차례도 크핫 그걸 먹겠다고?”
청이 주먹밥으로 손을 뻗으니 간수 무인이 비웃음으로 되물어왔다·
주먹밥으로 천천히 뻗어나가던 청의 손이 돌연 잔상을 남기며 휘어드니 무인의 발목이 그에 턱 잡혔다·
“어? 무슨?”
간수 무인이 당황한 사이에 청이 다른 손을 마저 뻗어 반대쪽 발목 역시 턱 잡아챘다·
“이 새끼가 아침부터 장난질이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먹는 거로 장난치는 놈이야·”
“놔 놔라! 무슨 힘이 이렇게···!”
당황한 간수가 뿌리치려 하지만 단단히 붙들린 발목은 아예 땅에 박혀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야 청의 근력이 근력이었으니 어쩔 수 있나·
“저기요? 이대로 내가 쭉 잡아당기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청이 바닥에 앉아 상체를 숙여 양쪽 팔을 뻗어서 간수 무인의 발을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청의 양 팔 사이로 쇠창살이 하나 굳건하게 섰다·
간수 무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허리춤에 든 칼을 빼어드는 순간-
청이 허리를 피며 아예 뒤로 드러누웠다·
간수의 양 다리가 포탄처럼 창살 안으로 날아들다가 마침내 다리 사이가 쇠창살에 걸리며 빡! 뼈와 쇠가 충돌하는 소리·
간수가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었다·
그러나 아직 시작일 뿐이었다·
청이 간수의 발을 안마하듯이 주물거리며 허벅지로 타고 오르니 까드득 까드득 뼈가 으스러지며 오징어 다리처럼 부드럽게 축 늘어졌다·
“끄아악!”
생뼈를 잘게잘게 잘 쥐어 으스러뜨리는 그 촉감에 청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와· 이게 얼마만이야· 이건 정말 진짜로 내 생각보다 기억보다 와 이게 삶이지·
청이 사납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쉿· 손님· 다리에 뼈가 많이 뭉쳤어요· 잘 풀어주지 않으면 계속 걷거나 뛰게 되신다니까요· 사람이 눕거나 앉아야지 서서 돌아다녀서야 하겠어요?”
“아아악!!!”
마침내 간수 무인의 양 다리뼈가 모래알처럼 곱게 갈렸으니 청이 간수의 양 다리를 한 번 묶기로 꼬아놓았다·
“그아아악!!!”
일 각도 안 되어 목이 다 쉬어버린 간수 무인이 여전히 비명을 질렀다·
그 처절한 비명 소리에 혈교 무인들이 급히 모여들었다·
“무 무슨 짓이냐! 놔라 놔 아악!”
깜짝 놀라 간수 무인을 떼어내려던 혈교 무사는 손목을 잡혔다·
이윽고 쇠창살에 머리를 호되게 부딪친 후 청의 뼈 안마로 부드러워진 팔이 창살에 두 바퀴 감긴 후에 안쪽으로 빠져나와 어설프게 묶였다·
그러니 나머지 혈교 무인들이 감히 뇌옥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으니 개중에 당장 부단주님 모셔오라며 정강이 걷어차인 막내가 후다닥 달려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현재·
“인질을 되찾고 싶으신가요? 그럼 소녀의 요구사항을 전달해 드리겠어요· 고기가 듬뿍 든 볶음 한 접시 갓 지은 미반(쌀밥) 두 그릇· 그리고 탕은 음 담백하고 맑은 걸로 할까요? 여기 숙수분께서는 뭘 잘하시나요?”
“닥쳐라! 지금···”
“에이 이 가게 손님 대접이 영 그렇네· 그럼 맑은 탕국 민물고기 푹 끓여서 시원한 걸루다가 한 그릇· 그러면 인질을 돌려드리겠어요· 이상· 다시 전달해 드릴게요· 고기 듬뿍으로 한 접시 미반 두 그릇 맑은 어탕 한 그릇·”
청의 귓가에 두 가지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혈교 놈들 기가 막히는 소리·
그리고 속이 터지는 소리·
“저 미친 어디서 잡아와도 저런 미친 년을 부단주님은?”
“그것이 문 앞에 막내의 시체가···”
아래서 두 번째 이제는 막내가 되어버린 무사가 그 사실을 전했다·
“지금 그게 문제야!? 당장 모셔오지 않고 뭘 하는데! 당장 튀어가지 못해!?”
시발 새끼· 지가 부르는거 아니라고·
막내 무사가 속으로 욕을 삼키며 다시 뛰어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을 두드릴 생각은 없었으니 앞에 서 있다가 알아서 문이 열리면 그때나 보고할 속셈이었다·
그러니 두 번째 막내도 소식이 없다·
“어머· 주문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소식이 없나요? 요리하러 가신 분이 볍씨부터 뿌리고 계신가요? 이러다 저 늙은이가 되어 버려요?”
“좀 닥쳐!”
“아· 너무 무섭다· 무서워서 손발이 막 떨리고 주먹이 막 나가고 그럴 것 같은· 와 이거 손 떨리는 것 좀 보세요·”
청이 그리 말하고는 팔 묶인 무사의 머리채를 잡고 쿵쿵 철창에 들이박았다·
“악! 악! 악!”
쿵쿵쿵 소리에 맞춰 비명이 터지는 것이 참으로 재미가 있다· 그러다 빠작 금이 가는 촉감에 청이 아차 싶어서 손을 놓았다·
등불에 비치는 철창이 붉게 번들거린다·
“어 어떻게 해야 부단주님은···!”
“젠장! 해 달라는 대로 줘! 갖다주라고!”
그렇게 결국 기어코 만족할 만한 아침 식사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철창의 배식구로 들어오는 쟁반을 안쪽에 곱게 치워둔 청이 철창에 묶인 두 혈교 무사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덕분에 즐거웠어요· 다음 생에는 부디 선량한 삶을 살아야 이렇게 아픈 꼴을 안 당할 텐데·”
청의 손이 검게 물들더니만 빡! 팔 묶인 혈교 무사의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이 났다·
머리 잃은 시체가 팔로 묶인 철창을 타고 주르륵 내려앉았다·
반쯤 그에 걸친 앉은뱅이 고자 간수 무인이 히이익 기겁을 하며 꿈틀거리다 다리 통증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만 쩍 벌렸다·
“머 멈춰! 분명 인질을 풀어주겠다고!”
“제가요? 그냥 인질을 되찾고 싶으시냐고 물어봤을 뿐인데요?”
청이 그리 말하고는 이번엔 쪼그려 앉아 흑살마장의 흑수를 높이 치들었다·
그에 다리가 꼬인 혈교 무사가 청과 눈을 마주치며 애원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삼백오십 점·”
“그게 무슨-”
빡! 마찬가지로 머리 잃은 시체가 다리로 철장을 감은 채로 털썩 상체를 떨궜다·
청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려다 멈칫 손을 멈추고는 이내 팔꿈치 안쪽 소매로 얼굴에 튄 이물질을들 닦아냈다·
“아유· 아침부터 상쾌하다· 역시 운동을 해야 밥이 잘 넘어가지 눈 뜨자 마자는 좀 그래·”
그리고는 안쪽에 잘 모셔둔 쟁반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서문수린류 미인식이 빛을 발하니 천하의 절세 미녀가 다소곳이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는 하더란다·
그에 혈교 무사들이 망연히 청의 자태를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고 와중에 예뻐서·
경담간이 나타난 것은 청이 식사를 거의 다 끝마쳤을 때였다·
얼굴을 비추자마자 인사 대신 고독을 부리니 아껴두었던 마지막 고기에 젓가락을 뻗으려던 청이 치미는 술기운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씨· 밥 먹는 데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청이 일단 씹던 음식을 급히 씹어서 꿀꺽 삼킨 후에 옆으로 드러누워 쟁반 반대편으로 굴렀다·
“아흐윽···!”
조금 부자연스러운 광경이었다·
경담간이 뭔가 이상한가 기묘한 위화감에 휩쌓였으나 교성과 같은 신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통에 금세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만 그마안····”
애절한 애원에 경담간이 만족스레 고독을 부려 독액의 분사를 멈추었다·
“아침부터 난리를 피웠다지? 정파의 여협이란 아해가 손속이 그리 잔인해서야?”
“낭인 출신이라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요? 할아버지 벌써 치매가 오시나? 잠깐! 고독 멈춰! 멈추라니까· 쫌· 흐으····”
슬슬 아픈 척도 귀찮아진 청이었다·
아프면 원래 비명도 안 나온다고 하니까 이제는 소리내지 말고 그냥 얼굴 처박고 몸이나 떨어야겠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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