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9
한편 현객당은 초상집처럼 숙연함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서로 침통하니 입을 다물다 보니 조용하기가 아주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덕분에 숨 쉬는 소리마저 민망해져 호흡마저 불편하게 조심하는 판이었다·
그러다 투석권鬪席拳의 달인 왕노필이 돌연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왕 형· 하지만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이오· 고독이 날뛰면 바닥이나 구를 처지에 오히려 짐덩이만 되고 말지·”
“그렇다고 이대로 기다리고 있자는 말이오? 서문 소저가 무슨 고초를 겪고 있을지 모르는 때에 그저 숨이나 쉬고 있겠다고?”
“하면 뭐요? 우르르 쳐들어가서 다 같이 고초라도 겪으면 마음이라도 편해지오?”
그에 왕노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무림맹 고수들의 도움을 청할 수는 있겠지· 가서 서문 소저를 구출해야 한다고 머리라도 조아려 볼 수밖에·”
그에 단양도법의 도래만이 제지했다·
“그건 아닙니다· 서문 소저께서는 여인의 몸이십니다· 추문이 났다가는 평생 고개를 들고 살지 못하실 겁니다· 서문 소저께서 다 생각해 두신 방도가 있으시니 기다리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서문 소저를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 그까짓 체면이 문제인가? 죽고 나면 체면이 뭐가 문제냔 말이야· 서문 소저도 낭인 출신이니 그깟 체면 따위보다 목숨이 소중하다 생각할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시는 서문 소저가 스스로 잡혀가셨다면 더더욱 방도가 있으신 거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다·
당장이라도 무림맹에 신고하여 구출 작전에 나서야 한다는 왕노필과 청을 믿고 더 기다려야 한다는 도래만이었다·
그때 지당권의 마영전이 끼어들었다·
“그만· 우리끼리 싸운다고 뭐가 되는가· 그 듣기로는 서문 소저가 식에 함께 참여하는 신녀문의 어른이 계시다던데· 적어도 사문의 어른께는 알려드려야 하지 않겠나·”
그에 낭인들이 전부 동의했다·
그리하여 무천각에 사람을 보내 신녀문의 어른을 모시고자 했다·
그 결과 낭인들의 호출을 받은 서문수린은 아주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누가 누구를 불러?
제아무리 남들 모르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서문수린은 나이로도 배분으로도 경지로도 낭인들과는 비교를 하는 일 자체가 크나큰 실례인 무림의 큰큰 어르신이다·
물론 낭인들도 억울할 수 있다·
서문수린이 무림대회에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않았기에 무림맹의 귀빈석보다도 위의 어르신 좌석 굳이 말하자면 노강자老强者석에 끼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간혹 청의 옆에 계시는 귀부인이 누구신지는 고작 낭인들이 봐서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명문의 자제들조차 몰랐으니 알 만한 분께 물어봐도 묻지도 말고 가까이도 가지 마라 하고 입을 다물었더란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괘씸한 것은 괘씸한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어이가 없으면 오냐 무슨 말을 지껄이나 들어나 보자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하고·
그리하여 서문수린이 현객당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었던 하급 숙소에 처음으로 방문해보게 된 것이다·
“너희가 나를 불렀느냐?”
“예· 부인께서는 신녀문의 어른이시지 않습니까? 필히 아셔야 할 사실이 있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불렀다? 그거 재미있구나· 본녀는 서문수린이라 한다만 어른 앞에서 소개도 하지 않을 셈이냐?”
늙은이의 짓궂음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파란 것들이 하얗게 질려 허둥거리면 한 방씩 예절 주입이나 해 줄 요량으로·
그런데 웬걸·
서문수린의 이름을 듣자 모두가 혈색이 한층 돌아오며 안도하거나 살았다는 듯이 눈빛이 펴는 것이다·
“대모님! 도와주십시오! 실은···!”
그리하여 낭인들이 일제히 엎드려 지난 일을 전달했다· 제 치부를 드러내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으니 잠람단의 입수로부터 고독과 추적 그리고 청의 영웅적인 희생에 이르기까지 아주 소상한 과거였다·
“이 네 네놈들이···!”
여중제일인의 분노가 격렬히 터졌다·
서문수린의 머리카락이 길길이 뻗치고 천근 묵직한 위압감이 낭인들을 짓눌렀다·
“어찌 어찌 어젯밤에 바로 고하지 않았단 말이냐! 세상에 혈교라니 그 망종들이 안 된다! 어디냐 어디란 말이냐!”
“제가 바로 안내를-”
“이를 말이냐! 당장 달려나가지 않고 뭣을 해!”
서문수린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보나마나 선량하고 착해빠진 멍청한 제자년이 이 되먹지 못한 놈팽이들 구하겠다고 고독이 뭔지 혈교가 무슨 놈들인지 하나도 모르는 채로 덜컥 나섰을 것이다·
수틀리면 도망치면 된다느니 그딴 태평한 소리나 지껄이면서·
안 된다· 혈교는 안 돼·
그저 말종들 같은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추악한 수심들에게 떨어진 제자가 대체 그 무슨 참담한 꼴을 당하고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정신은 아득하니 혼이 쪽 빠질 것만 같았다·
이 개 같은 신투 새끼는 뭣을 하고!
한림원의 시강학사라 하여 학식과 됨됨이가 좋을 것이라고 짐작하여 덜렁 맡긴 것이 실수였을까·
당장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다녀오겠다며 환히 웃던 제자가 지금이라도 당장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은데·
“앗· 방금 나가셨대서 깜짝 놀랐네· 길이 엇갈렸나 봐요· 아· 낭인 분들도 계시네·”
어른거리는 것 같은···?
“사부님! 맞다· 혈교 놈들이라고 아세요? 제자가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 왔는데요· 그 아주 처 죽일 놈들이더라구요· 그래서-”
“서문청! 네 이년!”
따아악!!!
청이 비명조차 못 지르고 바닥에 쓰러져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너무 아프면 오히려 데굴데굴 엄살을 피우며 구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쓰러진 그 모양 그대로 굳어버린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만 청이었다·
“서문 소저!” “서문 소저어!”
“서문 소저! 무사하셨습니까!”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청을 향해 낭인들이 우르르 몰려가 무릎을 꿇었다·
일부 감수성 넘치는 일부는 눈물을 주륵 흘리기까지 했으니 청을 본 반가움과 안도 그리고 그간의 염려가 한방에 터져버린 까닭이었다·
다만 쓰러진 청에게 사내들이 우르르 절을 하고 있는 광경이 좀 기묘하긴 했지만·
“크흑 저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에이 우리 낭인 사이잖아요· 제가 뭐라 그랬어요· 낭인은 뭐다?”
“···의리입니다·”
“자· 그럼 됐죠? 괜찮으니까 무천각 삼 층으로 가 계시면 돼요· 난아 아니 독화 아시죠? 해어독화가 일단은 급히 처방을 해 줄 테니까 사나흘 정도 푹 잔다고 생각하시고·”
감동과 감사 미안함과 민망함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낭인들을 얼른 가 보라고 채근해 배웅하고 나니 근엄한 표정의 서문수린이 남았다·
“이번에는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고· 계집년이 죽고 싶다면 차라리 이 늙은이에게 말을 하지· 깔끔하게 반으로 쪼개줄 터인데·”
“에헤헤 걱정하셨어요?”
“이를 말이더냐! 고독을 삼키고는 혈교 놈들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거의 혼절 직전이었다!”
“그· 죄송해요· 그으· 제자가 말씀드리지 않았던 건데요 사실 제자가 체질이 좀 그 아예 독이 안 듣는 체질이라·”
“아예 독이 안 듣는다? 만독불침이라는 소리더냐? 그걸 그냥 타고났다고? 내 듣던 소리 중 가장 해괴한 소리다마는·”
“헤헤· 뭐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 음· 그런 거요· 그 좋은 건 아니라고 하는가 봐요·”
서문수린이 청을 쏘아보았다·
어째서인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은근 눈을 내리까는 것이 분명히 말하기를 꺼려 숨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라리 능숙하게 속이기라도 하면 속기나 하지 대놓고 꺼림직해 묻지 말아 달라고 하는 모양새를 하니 속은 상해도 캐어묻기가 또 곤란한 것이다·
“그래· 독이 통하지 않는다니 고독을 막 삼켰겠구나· 만독 중에 빈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네· 독이면 전부 다 안 듣나 봐요·”
“어찌 되어도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으니 순순히 나서서 잡혀갔겠지·”
“아시잖아요· 묶이면 풀면 되고 막히면 뚫으면 되고···”
서문수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뒤가 없이 무작정 행동하지 않았으니 더 탓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오히려 협의가 뛰어나다 칭찬을 할 만한 일이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는 없고·
“그럼 되었다· 그래서 혈교 놈들은 어디더냐?”
“그 개봉 지하에 의외로 공간이 엄청 넓게 펼쳐져 있더라구요·”
—-
청의 고향에서는 한때 꿈은 창대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자조 섞인 대사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지탄광마 경담간이 바로 그랬다·
경담간에게도 원대한 꿈이 있었다·
인생의 말년 다시 찾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귀한 재료를 곱게 다듬어 폐기에까지 이르는 그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자 하는 그 소망이었다·
그러니 어느 때보다도 많은 영감이 솟아 두근두근했던 것이다·
일단은 아침에 방자하게 군 대가로 낭인 한둘 정도 머리를 잘라서 가져다주자·
스물이나 되니 개중 열 정도는 죽여도 될 터다· 그래도 최소 열 명에게는 돌려야 보는 재미가 있을 테니 딱 절반만·
이후에 낭인들에게 오해를 통한 분노를 유발하면 제가 지키고자 했던 낭인 놈들이 전부 너 때문이다를 외치며 잔혹하고 참혹한 폭력을 동반한 능욕을 펼칠 것이라고·
폐기는 그렇게 하면 좋겠고·
그래 먼저 잡아온 검화를 쓰는 것도 좋겠다·
같은 방에 넣고 호화로운 밥상과 소변에 말은 썩은 밥을 하나씩 넣어 하나만을 먹어야 한다고 너희 둘이 결정하라 하는 거지·
그래도 신녀문 제자는 양보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참지 못하고 추악한 본성을 드러낼까?
좋은 침상과 오물통도 좋고·
검화는 이미 반쯤 무너져 내렸으니 살살 꼬드겨 원망을 신녀문 제자에게 돌리면 또 얼마나 좋은 구경거리가 나올 것인가·
검화가 신녀문 제자를 직접 고문하도록 만들면 그 얼마나 또 백미일 것인가···
이러한 창대한 꿈이었다·
하지만 낭인 놈들은 무림맹에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는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영영 틀어박혔다·
아무리 평화에 절어 듬뿍 방심하고 있는 무림맹이라도 지금 손을 뻗기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큰 것이다·
어차피 다음 비무에 나가는 낭인 놈이 둘이니 그때 잡아서 끌어내야 하나·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가기는 뭐해서 신녀문 제자에게 던져줄 무고한 머리통 네 개를 뽑아 돌아왔다·
네가 둘을 해쳤으니 나는 넷으로 돌려주겠다고 선물해줄 요량이었다·
그러면 너는 자책할까? 분노를 할까?
눈물을 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꺾이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머리통 네 개를 포장해서 콧노래 흥얼거리며 지하로 돌아오니 검화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껏 짜놓은 멋진 계획이 바로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뭐야! 고독 심어놓은 년을 놓쳐!? 그게 말이 되냐! 이 병신같은 새끼들! 그럼 그 신녀문 제자는!?”
“어· 음· 뇌옥에 그대로 있습니다·”
“후우· 그래· 그년은 절대 도망갈 수가 없지· 인질로 잡힌 목숨이 있으니· 끄흐흑! 그래 검화가 탈출한 것을 말해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둘이 불화가 있었다지? 너를 버리고 갔다는 식으로 오해하도록···”
그러자 부하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게 검화를 탈출시킨 게 신녀문 제자입니다·”
“뭐야! 뇌옥에 그대로 있다며?”
그에 부하가 잠시 주저하다 털어놓았다·
“그게 나갔다가 제 발로 돌아왔습니다· 배고파서 저녁 먹고 왔다고···”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