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1
비무가 끝난 청이 저녁에는 시약궁창에 몸을 담가서 약성 쭉쭉 빨아먹고 나서 유류연련 수련대에 누웠다·
그리고 세 시진 동안의 정교한 고문 끝에 천유학은 청을 방치한 채로 바닥에 뻗었다·
묶인 채 신체를 되찾은 청이 생각했다·
아주 어디 한 군데 안 쑤시는 데가 없네· 도대체 얼마나 발버둥을 쳤길래 이래?
관절과 힘줄이야 작정하고 병신 직전까지 조졌으니 당연히 아프지만 전신 근육들이 죄다 욱씬거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데에는 유류연련 시술 과정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 결과이라·
이 정신 기생충 놈은 천마지존이니 뭐니 세상 잘난 체는 다 하더니만 엄살이 보통 엄살이 아닌 것이다·
겨우 세 시진 정도 분근착골을 당했다고 아주 발광을 떨었구나· 아이고 쑤셔라·
정작 그리 툴툴거리는 청은 이전 회차에 콧구멍에 콧방울 단 채로 엉엉 울었더란다·
정신 기생체가 알았다면 억울했겠지만 네 번의 정마대전으로 세상을 비탄에 네 번이나 빠뜨렸던 악랄한 복수귀는 이제 그저 고통에 붕괴해버린 정신 하나에 불과했다·
청이 생각하기에는 뭐 겨우 일 년 남짓 고통받은 주제에 죽여달라 소리치는 건 좀· 천마신교를 마교로 만든 장본인이면서·
그렇게 보람찬 유류연련 수련을 마치고 한 숨 자고 일어나니 해가 중천이었다·
오늘은 누구 와 있나 하고 내려가니 오·
“아니 이게 누구야· 으그그 을르으르· 왜 올라왔는데 산이 없지? 산! 언제 우리 제대로 붙어 볼 수 있어!?”
“크윽·”
“뭐지? 이 산이 아니었나? 산 어느 산에 올라갔길래 안 보여? 하핫 산도 아직 멀었는걸·”
“···적당히 하도록”
“음· 예가 생각보다 강했나 보네·”
“그 여자·”
산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청이 그에 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여자라니· 좀 친하게 지나지 않고· 낯을 많이 가려서 그렇지 얼마나 착한데·”
“그게 아니라· 음·”
팽대산이 눈썹을 꿈틀꿈틀 그리고 으음 하고는 또 꿈틀꿈틀· 뭔가를 말할까 말까 큰 고민에 빠진 모습 같았다·
그에 청이 그냥 물어보았다·
“왜?”
“이걸 말해줘야 하나 모르겠군·”
“뭔데· 말 꺼냈으면 말을 해줘야지· 누구 속 터지는 꼴 보고 싶어?”
“음·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변명이 아니다· 그냥 너 역시 알아둬야 할 것 같으니·”
“뭔데 그리 거창하게 굴어?”
“선천진기를 끌어다 쓰더군· 아마 그러한 특수한 무공을 익힌 모양인데·”
“누가? 예가?”
산이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엥· 선천진기를 쓴다고? 수명을 깎아서 무공을 쓴단 말야?”
청이 변명이 아니라고 한 말을 이해했다·
공손요예가 선천진기까지 써 가면서 비무에 나섰기 때문에 지고 말았다는 뜻으로는 받아들이지 말라는 소리였다·
청이 듣기엔 좀 그런 의도가 없지 않아 있기는 한 것 같았다·
“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다· 나는 패배했고 아무런 앙금도 없으니 그딴 눈빛으로 쳐다보지 말도록·”
청의 불순한 눈빛을 본 팽대산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청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예랑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네·”
도대체 선천진기를 써가면서까지 비무에 목숨을 걸 필요가 아니 진짜 목숨줄 태워먹고 있는 거잖아·
그렇게나 비무회 우승이 절실했던 걸까·
그에 비하면 나는···
···
···
청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언니! 가가 언니이!”
“오잉· 이 목소리는· 어디냐!”
도다다다 다리 짧은 뜀박질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청의 골반 위를 와락 감쌌다·
“요 녀석! 향이!”
청이 제갈향을 번쩍 들어 제자리에서 돌기를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꺄하하하!”
어지러운줄도 모르고 제갈향이 아이 특유의 꺄르르륵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학은 무천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음 가서 어떻게 운을 떼면 좋단 말인가· 느그 여래신장 좀 다오 하고 말을 건네기도 영 모양빠지는 일이 아닌가 하고·
거기다가 서문수린의 등쌀도 보통이 아닐 터인데·
그러니 무학의 발걸음도 점점 느려져서 아주 느긋하기 짝이 없는 한량으로 보였다·
무천각의 문을 넘어 연무장으로 가니 이 좋은 날 땀을 흘리며 대련에 집중하는 젊은 청춘들이 보였다·
참으로 좋은 때로구나 하며 무학이 청의 모습을 찾았다· 워낙에 눈에 띄는 미색이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풀밭 위에 털털하게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서 제 품에는 쪼그만 여자아이를 딱 끌어안고 있는 중이었다·
“가가 언니 이불은 어떤 이불이 좋아요? 향이는요 거위털 써서 가볍고 푹신한 이불이 정말 좋아요·”
가가 언니라니? 기묘한 호칭이었다·
무학 대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뭐 여인들끼리 친하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나는 그냥 안감만 좋으면 되는데· 음· 가벼우면 가벼운데로 폭신한 느낌이 있고 무거우면 무거운대로 또 포근한 게 나쁘지 않으니까 이거 막상막하인걸· 근데 이불은 왜 물어보니? 선물이라도 해 주려고?”
“히힛· 요즘에 혼수 목록을 작성하구 있는데요·”
무학 대사가 다시 갸웃거렸다·
혼수라니? 여인들끼리? 아니 그보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애기한테 무엇을?
“크흠·”
“앗·”
청이 그제야 무학을 눈치챘다·
바람이 통해 오감이 날카로운 가운데서도 느끼지 못했으니 순간 경각심이 번쩍 들었으나 반짝반짝 광까지 나는 대머리를 보고는 금새 마음을 놓았다·
“노부는 무학이라고 하는 땡중이란다· 내 이름은 당연히 들어보았겠지?”
“앗! 천하제일인! 안녕하세요· 소녀 제갈향이라 하옵니다·”
하나 둘 세지도 않고 바로 내질러버린 제갈향 때문에 청이 기회를 놓쳤다· 뭐지 두 박자에 소리치는 게 나라법이 아니었나?
청도 일어나서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때 무학이 비로소 가까이에서 청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청량한 도문과 불문의 현기 너머 슬며시 비치는 어떤 흉악한 광기가 광기가····
이 여광견 이 미친개가!
어찌 천살을 주워다 키워놓았단 말이냐!
다른 고수들이라면 여광견의 제자라서 그 광기도 물려받았나보다 하겠지만 천하제일인의 눈은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보았다·
세상 가장 불길한 별빛이 두 손 사이에 짓눌린 채로 단단히 붙들린 형상이었다·
한 손은 도가의 청아한 선도요 다른 손은 불가의 대자대비한 정심이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도道가 가장 흉악한 본성을 겨우 붙잡아두고 있는 꼴이라·
“허허· 음· 노부가 이 아이와 할 말이 있다마는 제갈가의 꼬마 숙녀께서는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나?”
“앗· 네····”
제갈향이 꾸벅 인사를 올리고는 휙휙 고개를 돌리다 제 커다란 오라비를 찾아 두다다 달려나갔다·
“음· 그래· 내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왔다마는 자리를 좀 옮기지 않겠느냐?”
—-
무천각에도 다실이 있으니 자리에 앉아 무천각 시비가 차를 내오기까지 무학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사님· 혹시 신공 때문에 오셨나요? 제가 먼저 찾아뵈어야 했는데 무척 송구하게 되었어요·”
“음· 아니다· 용건 있는 사람이 먼저 찾아와야 하는 법이 아니냐· 어른이라고 아랫 사람 부려먹어서야 뭐 음 어른이니 부려먹기는 하겠다마는·”
무학 대사가 그리 말하며 청을 보았다·
세상을 피에 잠기게 만들 흉성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었다·
여광견 이년이 여류 투쟁이니 뭐니 노래를 부르더니만 제대로 선을 넘었구나·
아무리 타고한 혈겁을 억누른다 하더라도 어찌 사람이 제 천명을 어길 수가 있겠나·
결국 거악이요 세상의 피가 눈물로 흐를 재앙이니 이 자리에서 숨통을 끊어야 할 것이다·
여래신장이고 뭐고 지금 고작 그러한 것이 중요한 때가 아니라-
“그럼 지금 구결을 불러드릴까요? 혹은 비급으로 써 드릴 수도 있겠어요·”
“엥· 신공을 그냥 주겠다는 소리냐?”
“드린다기보다는 돌려드리는 거잖아요? 원래 소림의 것이라고 하니 주인께 돌려드리는 것이 이치에 맞으니까요·”
“···그건 네 생각이더냐 수린 아니 네 스승의 생각이더냐?”
“사부님께선 당신의 인연이 아니라고 제가 알아서 하시라고 하셨어요·”
그리 말하는 표정에는 한 점의 미혹조차 없으니 담담히 말하는 진심이었다·
그에 무학 대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가 원한다면 소림의 재화를 아낌없이 넘겨줄 것이다· 어떠냐· 이래도 거저 넘겨주겠느냐?”
“에이· 도사가 재화를 가져다가 어디다 쓰겠어요· 신녀문이 가난한 것도 아니고 저 일신이야 굳이 금전이 필요하지도 않은데요·”
“허허· 그러면 영약은 어떠하냐· 대환단이 어떤 귀물인지는 알고 있겠지? 태약전에 지금 가진 것이 열 둘에 소환단이 쉰이 넘어가니 그도 전부 넘겨줄 수 있다·”
“음· 사부님께서 제 내공이 이미 현경의 고수와 견줄 정도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영약이 아쉽지는 않은데요· 아· 그래도 한 알 아니 두 알 정도는 주시면 좋을지도요·”
“어째서 두 알이더냐?”
“하나는 사부님 드리고요· 한 알은 그으 친구가 진원지기를 소모하는 무공을 쓴다고 해서요·”
“공손가의 아이 말이구나·”
“앗· 알고 계셨어요?”
“헌원검은 황제의 검이 아니더냐· 황제의 검을 인간이 휘두르는데에 아무리 경지가 높다고 한들 대가가 없겠느냐·”
여기서 황제란 천자를 말함이 아니다·
본래 황제라 하면 인간의 지배자가 아닌 청의 고향 식으로 말하자면 신神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힘을 휘두르려 하니 어찌 그 대가를 치르지 않겠냐고 하는 것이다·
금색 테두리치고는 좀 거창하지 않나·
청이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점이 있기에 등급 낮춰 금색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은 못 하는 청이었다·
“허허 하하핫!”
무학이 돌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저를 위해서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승 한 알 친구 한 알 주겠다고 두 알 달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대환단이 알사탕이라도 되는 양·
“그러면 신공은 어떠하냐? 역근세수경의 공능에 대해서는 너 역시 익히 알 것이다·”
“어· 그게· 실은 이미 익혔는데요····”
“뭣이!?”
무학이 앉은 채로 재주도 좋게 일 척은 뛰어올랐다 착지했다· 그리고는 부리부리한 눈썹의 각도를 매섭게 하며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여래신장이 네게 닿았으니 역근세수경 역시 닿았다고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그럼 또 소림의 공부를 배운 것이 있더냐?”
“그 둘 뿐이에요·”
“그럼 여래신장을 돌려주는 대가로 다른 신공을 받는 것은 어떠하냐? 역근세수경을 익혔다니 문제 없이 쓸 수 있을 터· 백보신권은 겪어 보았겠고 백련신권 대력금강장 연대구품에 불영선하보 어때 갖고 싶은 무공이 있더냐?”
“저는 검객이고 신법은 이미 절기라 할 것들을 이미 갖췄는걸요· 능파미보 쓰는 거 보셨잖아요·”
“내 그럴 줄 알았다·”
무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미타불 세상에 인연이 필연 아닌 것이 없다더니 어쩌면 네게 불가의 가르침이 닿은 것 역시 필연이겠구나· 불자라는 놈이 아직도 멀어가지고는·”
아닌 게 아니라 무학은 부끄러웠다·
인간이 천명을 이길 수 없다니 그게 어찌 불제자가 할 소리인가·
욕계의 모든 번뇌를 끊고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부처의 가르침은 어찌 보면 대계의 순환을 끊는 천명의 거스름이다·
평생을 천명을 거스르고 무아로서의 완결을 추구한 주제에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안 될 것이라고 어찌 장담하였는가·
오히려 천살을 품에 안고도 덕이 높은 아이였다·
팔리 삼장의 경장 소부 초기 경전 중에서도 최초에 가까운 불경인 숫타니파타의 말씀에 따르면 석가께서 가르침을 내리시기를 무소유에 의지하여 무위지를 흉중에 품고 도류번뇌하라· 욕심내지 않음으로써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라 말씀하셨거늘·
물론 청이 영약이나 무공에 딱히 욕심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영약은 필요하지 않고 무공은 필요한 때에 배운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아주 욕심이 그득한 욕망의 항아리였다·
멀리 가지 않고 무학이 청이 밥 먹는 모습만 보았다면 아니 시비가 다탁 위에 과자만 두고 갔더라도 그 추악한 식탐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빨 아래 무참히 부서지는 과자의 형상에서 불타는 세상을 비춰보았을 터·
하지만 무학이 거기까지 어찌 알랴·
그저 민망하고 미안하고 부끄러운데 네 것이니 선뜻 돌려주겠다는 아이의 뜻이 또 고맙고 기특할 뿐이었다·
“흠· 그래· 기왕 돌려주는 김에 여래신장 비급이나 좀 써서 다오·”
“앗· 써서 드리나요· 솔직히 바로 불러달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늙은 놈한테 뭘 더 외우라고 시킬 셈이더냐? 네 글씨로 장경각에 보관해 둘 생각이니 정성껏 예쁘게 써내야 할 것이야· 그 대신 엮은이에 네 이름을 떡하니 박아 놓더라도 상관하지 않으마·”
“네···”
청이 살짝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요놈 아니 요년 봐라·
무학이 실실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엮은이의 이름을 박아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 앞으로 여래신장을 배워 익히는 모든 소림의 제자에게 구배 중 하나 사조에게 올리는 예를 받는다는 소리가 된다·
아마 대모도 이러한 조건을 듣고 나면 흥 콧방귀는 뀔지라도 별말은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무학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외우는 건 늙은이가 아니라 젊은 놈이 해야지· 요것아· 내 구결 하나를 불러줄 터이니 듣고 외우거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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