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6
그리고 나니 설이리가 다시 몸을 돌린다·
“아니 또 어디 가요?”
“열매···”
저도 말이 안 되는 소리임을 아는지 영 목소리에 확신이 없고 말끝은 흐리다·
“먹어도 되는 거랑 아닌 거랑 구분할 수 있어요? 빙궁 그 동네는 그냥 얼음뿐인 거 아니었어요?”
“사과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요·”
“아니 어이가 없네· 사과가 무슨 뒷산에 막 열려있고 그런 줄 알아요? 그리고 이제 곧 칠월인데 무슨 사과를 찾아요?”
청은 산에서 뭔가 주워먹기의 전문가다·
생존 전문가가 아니라 주워먹기의 전문가임을 확실히 해야한다·
체질 때문에 그냥 아무거나 막 집어먹는 전문가이지 독성의 유무나 안전한 섭취 방법 따위에는 전혀 무지하기 떄문이다·
그래도 맛난 것과 맛없는 것의 차이는 대충 알고 보통 사람에게 ‘맛없는 것’은 보통 먹으면 죽는 것과 같은 뜻이기도 했다·
“그럼 뭐가 열리죠?”
“이 시기면 음· 복숭아? 아직은 조금 설익었을려나·”
“복숭아·”
설이리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린다·
아무래도 복숭아를 좋아하는 모양·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리려 들었다·
청이 어이가 없어서 다시 붙잡았다·
“아니 복숭아는 무슨 뒷산에 가면 열려있는 줄 알아요? 애초에 맛있는 과일은 그냥 야생에 막 널려있지 않아요·”
“아니요· 오면서 봤어요·”
“그건 산도 개복숭아에요· 시고 떫고 또 배도 아플 텐데요·”
그에 설이리가 청의 안색을 유심히 살핀다· 저를 속이려 드나 아니면 진짜인가 긴가민가 좀체 믿지를 못하는 눈치였다·
“아이고 보냈다간 큰일 나겠네· 됐으니 나랑 같이 저녁이나 먹어요· 아니 무슨 돈도 없으면서 막 길을 떠나고 그래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조심성도 없고 경솔해요? 그것도 여인된 몸으로다가· 밥은 뭐 어떻게 먹고 잠은 뭐 길바닥에서 퍼질러 자려구요?”
청(꽃거지)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그에 찌릿 설이리의 눈매가 매서워진다·
“왜· 뭐 할 말 있어요?”
“네·”
“그래요? 그럼 해 봐요·”
“싫어요·”
이건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적어도 얘가 친구 없다는 건 잘 알겠다·
심지어 사방으로 뾰족한 가시를 난사하는 열등감 천 배 만 배의 고슴도치인 모용 소저에게도 참여인회인지 없는여인회인지 추종자들이 따르는 판인데도·
“그래서 나랑도 밥 안 먹을 거예요?”
“아니요·”
“먹는다는 거죠?”
“네·”
청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어렸다·
그러면 저 배고파요 밥 좀 사주세요 한 마디만 해 봐요 라고 하려다가 역시 밥을 인질로 잡고 그러는건 너무 치사하지 않나 싶어서 그만두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밥을 가지고 치사하게 굴면 안 되니까· 그건 너무하잖아·
“가요· 오늘 아주 배가 터지게 먹어보자구요·”
어느 집이 불도장을 제일 잘하는가·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다·
불도장이 무슨 생각날 때 한 번씩 챙겨 먹는 보양식 같은 요리가 아니라서 일 년에 한 번 아주 특별한 날에 먹을까 말까 한 중원에서도 최고급 요리에 속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도 제가 먹어본 집 밖에는 모르지 점소이한테 물어보면 무조건 제 가게가 최고라고 할 테니 영 신뢰도가 없다·
하지만 맹렬한 식탐에서는 명석한 두뇌가 핑핑 돌아가니 다 해결 방법이 있다·
“이봐요 점소이· 여기 불도장이 얼마부터 하나요?”
“앗 소저! 저희는 열다섯 냥부터 드립습죠· 개방석으로 모신다면 다섯 냥부터···”
“음· 둘러보고 올게요·”
개방석으로 모신다는 말은 말이 개방석이지 아주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다가 앉혀놓겠다는 소리였다·
미인이 둘이면 장사도 폭발을 할 테니·
청이 일단 걸렀다·
“저희는 스무 냥부터···”
“개방석에 모신다면야 저희가 오히려 대접을 해 드려야···”
“저희는 스물다섯냥이 기본입죠·”
그러다가 마침내 청이 정답을 찾았다·
“고것이 본점은 가격이 좀 있습지요·”
“좋네요· 시원한 자리가 남아있을까요?”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청이 요리점 꼭대기 훤히 트인 모서리에 설이리와 함께 착 자리를 잡았다·
“그럼 저희 불도장은 어떤 것으로 하시렵니까? 불도장 고급 불도장 특급 불도장 유일무이 초특급 불도장 그리고 최고 초특급 특선 특제 불도장이 있습지요·”
왠지 막 뽑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청이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을 꾹 눌러 참으며 최고급 특선 특제 불도장을 주문한 뒤에 추가로 야채 섭취를 위한 가지 튀김과 소채 몇 가지를 주문했다·
간만에 대붕을 잡은 점소이가 아주 목이 터져라 최고!!! 초특급!!! 특선!!! 특제!!! 하며 아주 사자후 뺨치는 성량으로 주문을 복창하며 총총 멀어져갔다·
그리하여 두근두근 신나게 요리를 기다리고 있자니·
“···”
“설 소저? 요즘 날씨가 참 덥죠?”
“네·”
“···”
“···”
먼저 말을 걸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화를 터 볼까 하면 단답으로 툭툭 잘라대는 통에 참으로 같이 있기 힘든 유형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 어색한 너와 나의 사이 긴긴 기다림이 마침내 종언을 고했으니 척 봐도 호화로운 냄비에 점소이가 척 뚜껑을 열자 소홍주 특유의 감미로운 향이 화악 번지며 동시에 온갖 맛있는 냄새들이!
“후아· 벌써 맛있겠다· 음· 설 소저? 침 흘러요·”
“아니에요·”
설이리가 소매로 입가를 쓱 훔쳤다·
아니기는 뭐가 아닌지· 그러면서도 시선이 정확히 냄비 속을 향하는 상태였다·
불도장이 뭐 하는 요리냐고 하면 그냥 맛있는거 다 담은 술찜이라고 하겠다·
개중에 꼭 들어가는 몇 가지가 있어서 상어 지느러미와 해삼 전복· 육류로는 화퇴라 하는 중원 최고의 건육 정도다·
물론 내륙이라 상어 지느러미는 빠지고 건해삼이라 좀 쭈글하긴 한데 그래도 온갖 재료들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미소가 번질 수밖에는·
그리하여 일단 설이리에게 한 대접 아주 푸지게 담아주고 청도 역시 담뿍 담아서 드디어 늦은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이다·
청이야 원래 잘 처먹는다·
왜냐하면 처먹는다는 표현이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좋은 말로도 먹는다고 하기 뭐할 정도로·
그런데 설이리도 잘 먹더라·
처음 보는 요리인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뭐가 들었나 깨작깨작 헤치고 풀어 뒤집어 보더니만 개중에 자른 피단 하나를 입에 넣자마자-
와· 미소 뭔데·
청이 멍하니 활짝 피어오르는 설이리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취향인 얼굴인데 그 위로 홍조와 함께 번지는 요염한 미소에 그 청이 젓가락질을 까먹을 정도였다·
물론 몸은 기억하고 있어서 자동으로 왼손이(오른손은 전체 파열 상태라서) 움직여 입안에 막 퍼넣으니 깜짝 놀란 혀와 턱이 일하며 꼭꼭 잘만 처먹는다·
“하읏 핫 흐아아·”
북해 출신들은 원래 뭐든 팔팔 뜨겁게 끓여 먹는다· 뜨거운 음식을 아주 척척 잘 먹는다는 뜻이다·
설이리가 체면도 버리고 흡입을 시작했지만 청의 처먹음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 뭐야 도대체 음식을 왜 그렇게 먹어요· 되게 되게 야하게 먹네·
같은 층에서 식사하던 손님들이 갑자기 울려퍼지는 여인의 교성 아닌 교성에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니 손님들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인세에 다시 없을 구경거리를 잡은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절세미인 둘이서 식사를 하는데 한 여인은 음식을 무슨 뺨이 터져라 아가리에 밀어넣고는 부모의 원수라도 되듯 콱콱 씹는다·
누가 봐도 쯧쯧 밥상머리에서 무슨 배워처먹지 못한 버르장머리냐 돼지도 저렇게는 안 처먹겠다 하는 추한 꼴 같은데 미모가 미모라서 그래도 뭔가 보기 좋은 광경처럼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고 기이한 체험이다·
그리고 한 여인은 복스럽게 잘 먹는데 어째 입과 코로 나오는 숨마다 애틋한 신음이 섞였다·
이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손님들이 다리를 꼬거나 다소곳이 모아 앉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설이리는 이미 반 이상 정신줄을 놓은 상태였다·
북해빙궁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척박한 땅의 사람들이란 본래 창고가 드문 것이다· 창고는 사람 배부터 채우고 나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그러다보니 죄인을 추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 남쪽으로 나선 설이리지만 활동비는 애초부터 큰 액수를 받지 못했다·
형편 때문이기도 했지만 금방 잡아올 줄 알아서·
어차피 빙궁 사람은 눈에 띌 테니 중원 나가서 수소문하면 금방 잡아 오지 않겠냐·
빙궁 사람들은 중원이 이렇게 크고 넓다 못해 무한에 가까운 광활함을 가진 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촌놈 촌년들인 것이다·
지네 빙판이 세상 끝에 닿는 가장 넓은 땅이라고 여기니 오죽할까·
그래서 무림맹에 기거하면서도 무림맹 밥이나 먹고 살았던 설이리였다·
가끔 맛있는 거 먹고 싶어지면 용봉지회 나가서 연회 요리를 먹었다·
참고로 연회 요리란 팽대산이 평가하길 다 식어빠진 상태를 상정하여 만든 보기에 좋고 맛으로는 좋은 평가를 주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설이리는 그것도 맛있어서 중원 사람들은 치사하게 이런 걸 저네들만 먹고 있었구나 하고· 그런데 좀 뜨끈하니 뜨끄으으은하니 속을 데우는 음식은 좀 없나?
설이리가 친구 없음에도 종종 용봉지회에 얼굴을 드러내는 이유였다·
게다가 타인의 접근은 아예 차단했기에 누구에게 얻어먹은 일도 없다·
그러니 설이리가 강호 출도 이후에 최초로 제대로 된 특급 요리를 그것도 용암처럼 팔팔 끓어야 한다는 북해 사람 취향에 꼭 맞는 요리를 접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하여 두 여인의 전투적 식사가 이어지고 요리점 최고급 좌석들인 최상층에는 다른 손님들이 숨도 못 쉬고 구경을 하느라 자리 회전이 완전히 멈췄다나·
“후아· 배부르다·”
등을 기댄 청이 만삭으로 튀어나온 배를 쓱쓱 문질렀다· 거의 임신 오륙 개월 수준이다· 실제로도 안에 뭘 키우고는 있어서 의외로 귀여운 생김새의 고독 한 마리다·
설이리가 청의 만삭인 배를 세상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외로 예의를 갖춘 인사였다·
역시 밥정인가? 같이 밥 먹어서 호감도가 조금 올랐나? 청이 씩 웃으며 식후 대화를 시도했다·
“어때요· 입에 맞았어요?”
“네·”
아닌 모양이다·
“이제 식사도 마쳤겠다 설 소저도 이제 그만 따라다니고 맹으로 돌아가셔야죠·”
“싫어요·”
따라다닌다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니 애초에 뭐 숨길 생각도 없어보이기는 했다·
“돈도 없다면서요·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자려구요? 길바닥에서 잘 거에요?”
그에 설이리가 뚱한 표정으로 가만히 또 가만히 청을 바라보다 한 마디 툭 던졌다·
“돌아가서 자고 올 테니 기다려요·”
“아· 지금 돌아가서 자고 다시 오시겠다? 뭐 지금 가면 밤중엔 도착하겠고 내일 아침에 아침 먹고 오면 점심 전에는 돌아올 수 있겠네요·”
“네·”
“그렇다 치고 그럼 내일은요? 종남산에 갈 건데 매일 돌아가서 자고 오려고요?”
설이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밖에서 잘 거예요·”
“야숙 해 본 적 있어요?”
“네· 많이·”
설이리는 중원의 물정을 모를 뿐이다·
본래 사람이 못 사는 땅에 억지로 뿌리를 내리고 사는 강인한 북해 민족인 것이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이제 날도 저물고 어두워질 테니까 나랑 방 잡아서 하루 묵고 나서 돌아가는 게 어때요?”
“싫어요·”
“사천까지 쭉 크게 돌 건데 그 여정 동안 계속 야숙하며 따라올 생각이에요?”
“네·”
아주 고집은 또 옹고집이다·
청이 그냥 설득을 포기했다·
뭐 따라오다가 저가 지치면 떨어져 나가든지 하지 않겠는가·
“알겠어요· 설 소저가 정 그렇다면야·”
청이 그리 말하며 슬슬 객잔을 잡아야겠구나 하고 일어서려는 때였다·
“서문 소저는 어디서 묵죠?”
“이제부터 찾을 건데요·”
“그럼 내일은 언제 출발하죠?”
왜 묻나 싶었더니 계속 따라다니기 위한 확인 작업인 것이다·
이걸 보통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나?
슬그머니 심술이 난 청이 대답했다·
“내 마음대로요· 원래 전 혼자 있으면 잠을 못 자거든요? 정 잠이 안 오면 밤중에 휙 떠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집중해서 잘 감시해요· 혹여 놓치지 않게·”
심술뿐만은 아니라서 야숙을 하겠다니 마음 놓지 말고 정신줄 단단히 붙잡으라고 긴장하라고 하는 말이었다·
설 소저도 나름 고수 음 절정 나부랭이를 고수라고 부르는 건 고수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중수 그래· 설 소저도 나름 중수쯤 되니까 정신만 단단히 차리면 몹쓸 짓을 당하지는 않을 테고·
—-
금전적으로 매우 부유한 청이라서 고급 객잔의 고오급 객실을 잡아 개운하게 씻고 고오오급 침상에 몸을 던졌다·
역시 돈값을 한다고 몸이 폭 파묻히는 것이 아주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만 있으면 금방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음· 잠이· 잠이·
그러나 잠이 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은 피곤하고 정신도 지쳐 졸음이 밀려오는데 정작 눈을 감아서 누워있기가 여기저기 불편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드문드문 졸기는 했던 것 같은데 뭔가 대단히 끔찍한 기분으로 눈을 번쩍 떴으니 기억나지 않는 악몽이 졸 때마다 같은 내용으로 반복이 되고 있다는 인식만 남았다·
여전히 혼자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청이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몸을 일으켰다·
혼자 있는 침실은 적막하다·
그래도 기름종이로 창을 붙인 바깥에서 쏴아아 시원하게 비 내리는 소리가 전해져 아예 적막하지는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할까·
청은 출도 이전 고향에서부터 내가 맞지 않는 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편하고 안온한 상태에서 듣는 빗소리란 그 얼마나 심신의 안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청이 아예 창을 열어버렸다·
쏴아아!
마치 튀김 튀기는 소리같은 청량한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와 빗소리· 진짜 좋아· 파전 먹고 싶다·
그래서일까·
속이 다 시원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점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같고·
지금이라면 잘 수 있겠구나 하는 어떠한 예감 혹은 확신이 드는 것이다·
그에 청이 간만에 몰려온 수마를 놓치지 않고 붙들기 위해 침상에 냉큼 누웠다·
그리하여 쏴아아 참으로 시원한 빗소리 근심 전부가 씻겨져 내려가는 것만 같아서 정말로 기분도 좋고 잠이 온다 잠이···
청이 막 잠에 빠져드려는 그 순간이었다·
돌연 스치는 생각이 하나· 눈이 번쩍 뜨이면서 몸을 벌떡 일으킬 수밖에·
아 맞다! 설 소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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