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7
모레면 칠월이니 마땅히 비가 내릴 때도 되었는데 이걸 또 상상도 못하고· 내가 좀 생각이 없었구나·
하지만 청은 사람 죽일 때와 밥 먹을 때 말고는 늘 생각이 없었으니 아무리 반성해봐야 앞으로도 쭉 일어날 일이다·
청도 억울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강호를 떠도는 삶· 지금이야 신녀문에다 작은 초옥 하나 돌아갈 곳이 생겼다마는 어쨌거나 쭈욱 떠돌고 있지 않던가·
중원의 땅덩어리는 워낙에 넓고 넓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아래 해발고도도 천차만별에 어디는 강 끼고 어디는 사막이고 또 어디는 해변이다· 그러니 그 기후도 제각각이었으니 이쯤 비가 오려나 더우려나 그런 감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서둘러 객실을 나서니 입구쯤에 꾸벅꾸벅 졸던 사내아이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비가 오면 어디에서인가 슬그머니 나타나 객잔 입구 옆에 자리를 잡는 피우의 파는 소년이다·
실은 객잔에서 일하는 누구네 아들 혹은 딸로 악천후에 추가 돈벌이를 하려는 객잔 주인들의 장삿속이라고 하겠다·
고급 객잔이라고 우산까지 구비가 척 되어 있었으니 아주 나만 빼고 다 비가 오는 줄 알고 있었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고·
“얘· 방갓 두 개만 주련·”
“앗· 선녀님! 여기요!”
자다 깨서 청의 미모를 영접한 사내아이가 돈도 안 받고서는 덥석 커다란 바구니 비슷한 것을 내민다·
“얼마인데?”
“앗! 맞다! 한 냥이에요·”
“이게? 그렇게 잘 짰나?”
그러자 사내아이가 쪼그라들었다·
“두 개 해서 한 냥이요···”
돌연 반값이 되는 기적이었지만 그래도 후하게 쳐주는 셈이었다·
“내 방 알지? 건포좀 한무더기 갖다 놔·”
“심부름삯은···”
“열 문이면 살 방갓을 다섯 배에 두 개나 사 주잖니·”
“네···”
의외로 정확한 시세에 아이가 더 흥정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났다·
물론 중원에서 아이라고 해도 장삿속은 독하디 독한 것이다만 청의 외모에 홀린 이후라 그 독심이 발휘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리하여 방갓 두 개를 겹쳐쓰고 나오니 두다다 방갓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방갓이란 간단히 설명해 초거대 갓이다· 머리에 써서 앞으로 멀고 뒤로는 등을 감싸 엉덩이 아래까지 가려주고서는 밖으로 휘어 빗물을 빼낸다·
단점이라면 무겁고 비 맞으면 더 무겁고 그리고 흘러서 뒤로 빠지는 빗물이 폭포수처럼 콸콸 흘러 발목 아래를 덮친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청의 초강력 목뼈는 그 무게 정도야 가뿐히 버텨낼 수 있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와 음· 그렇지· 아주 깜깜하네···
폭우란 기본적으로 아주 두터운 비구름을 동반하고 미개한 중원의 밤에는 전기가 없다·
물을 끓여 수차를 돌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청이 거리로 나섰다·
시력 역시 인간 초월인 청의 시야가 서서히 밤중의 윤곽을 잡는다·
설 소저가 어디에 있을까?
노숙은 많이 해 봤다고 하지 않았나?
청이 노숙(거지) 전문가로서 일단 밥집을 찾아다니며 눈에 들어오던 장소들을 따각따각 다급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없다·
그리고 나니 드는 다급한 생각·
어설프게 노숙해서 지식도 어설픈 거 아닌가? 비 피한답시고 다리 아래 기어들어가있고 그런 건 아니겠지?
물은 생각보다 순식간에 불어나고 급류란 생각보다 훨씬 몸을 가누기 어려운 거센 재앙이다·
그에 청이 하남의 지류를 따각따각따각 뛰어다니며 다리 아래도 살폈다·
그런데도 없다·
아니 잘 만한 자리에도 없고 다리 아래에도 없으면 대체 뭐 어디서 노숙을 해?
아니면 비 와서 그냥 집에 갔나?
생각해보니 설 소저라면 충분히 또 그럴 만한 위인이기는 했다·
집에 가려면 말을 해야지· 사람 걱정하게 말도 없이 가버리면 어째·
야밤중에 나 혼자만 뛰어다녔잖아·
그래도 차라리 집에 갔으면 좋을 텐데·
확신이 없으니 그냥 들어가기도 뭐하다·
그렇게 대충 반 시진쯤 설이리 찾아 헤메던 청이 마침내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청이 잡은 객잔 앞쪽 담벼락 고정으로 자리잡은 노점 주인이 쳐놓은 것 같은 천떼기 아래에 쪼그려 앉아있더라·
사실 청이 반쯤 농담으로 야반도주를 할 수 있다고 말을 해 뒀으니 입구를 지켜볼 수 있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청이 능력치 빨로 인간 초월의 연산력을 가진 두뇌를 가지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으니 괜히 달밤에 비맞으며 뛰어다녔다·
그러나 워낙에 강철같은 체력에다가 이미 추위에 대해서는 불침지경에 이른 청이다·
몸이 좋으면 머리가 나빠도 그렇게까지 막 고생을 하지는 않는 법이었다·
“아니 설 소저· 계속 비 맞고 있었어요? 미련하게 왜 비를 다 맞고 있어요? 춥지도 않아요?”
“부북해가 훨씬 츄워요·”
그야 북해 민족들은 일년내내 얼어붙은 호수 위에 살고 있으니 여름과 겨울이 추운 날과 더 추운 날의 흐름일 뿐이다·
“이 졍도면 뷱해에션 뜨거운 냘이예요·”
“지금 목소리부터가 떨리고 있는데요·”
“아아니요· 젼혀·”
사실 지금이 춥냐 춥지 않느냐를 굳이 따지면 정답은 전혀 춥지 않다·
오히려 기분 딱 좋은 시원함에 가깝다·
영화에서처럼 우산을 하늘 높이 던져버리고 장대비 맞으면서 깔깔거리는 그런 아주 청량한 해방감마저 느낄 수 있는 날씨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것도 방울방울이 방울처럼 굵어서 몸을 때리는 듯한 세찬 비를 계속 맞는 일이다·
이는 춥다 춥지 않다와는 완전히 또 별개인 것이다·
사람의 체온이란 대기를 통해 조절이 되도록 만들어졌으니 젖은 몸이 연신 새로운 빗방울을 맞으며 속절없이 온기만 계속해서 빼앗기기 때문이다·
“아씨· 노숙 많이 했다면서요? 북해에선 비 맞으면서 노숙하고 그래요? 이러다 송장 치우겠네·”
“괜챠눈데···”
그러면서도 별 힘을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순순히 딸려와 몸을 일으키는 것이 저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싶었던 모양·
방으로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안색은 원래 창백하니 병약해 보일 정도였다지만 입술이 보랏빛과 파란색 사이 어느 지점에서 채도를 잃고 시커멓게 물든 상태다·
다행히 우산 팔이 소년이 건포를 잔뜩 가져다 놓았으니 청이 일단 얼굴 벅벅 문질러 닦아 주고 머리채도 쭉쭉 짜내고 완전히 젖어 달라붙은 옷은 찰싹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고 낑낑거리고 나선 건포로다가 벅벅 문질러 물기를 닦아내기까지·
그리고는 침상에 눕혀 이불까지 척 얹어 주고 나니 이게 애 돌보는 고생인가 싶어서 새삼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대단하게 느껴지네···
“아니 무슨 야숙을 비 맞으면서 해요?”
“네·”
물기 죄다 닦아내고 침상 안에 쏙 파묻혔다고 다시 말문이 트인 설이리였다·
“그러다 죽어요· 추운 거랑 비 맞는 거는 완전히 별개니까· 야숙 많이 했다면서요?”
“북해에는 비가 안 내려요·”
“눈은 내릴 거 아니에요? 거기 야숙은 막 눈 맞으면서 해요?”
“아니요·”
“아니 아는 사람이 비를 그렇게 죄다 몸으로 맞고 있었어요?”
“눈이 아니라 비라서요·”
말로는 아주 한 마디도 안 진다·
청이 혀를 차며 그제서야 겨우 젖은 제 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방갓을 쓰긴 썼는데 비가 워낙에 거센 데에다 (쓸모없이)뛰어다니느라 멀쩡한 부분이라곤 머리 어깨 등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설이리의 시선이 청의 자태에 그리고나선 몸을 닦는 수건으로 그리고 마침내 두 배로 부풀어 시꺼먼 팔에 닿아서는 못 박힌 듯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은 밤에 한바탕 난리를 쳤더니 정신이 피곤하기도 하고(몸은 쌩쌩하다) 안도감도 들어 금방 잠이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충 물기만 뺀 청이 이불 속으로 쏙 파고들었다·
그러자 설이리가 입을 열었다·
“저기·”
“왜요?”
“저는 누구 있으면 잠을 못 자요·”
“그럼 안 자고 있든가· 어차피 밖에서 비 맞고 있었어도 잠은 못 잤을 거 아냐· 그럼 비 안 맞고 따뜻하고 편안한 침상 위에서 안 자는 편이 낫지 않아요?”
“···”
설이리가 분하기라도 한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 잘 자든가 못 자든가 알아서 해요· 전 자야겠어요·”
“···”
의외로 자존심이 쎈가?
대답이 없기에 청이 뭐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어째 쌕쌕 숨소리가 깊다?
“설 소저?”
“···도롱·”
청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니 누구 있으면 잠을 못 잔다며?
무슨 그딴 소리를 하자마자 자고·
—-
혹시나 하면 역시나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역시나 설이리는 감기에 걸렸다·
“아니 무슨 무인이 감기에 다 걸리고·”
“아내요·”
“코가 완전히 막혔구만· 지금 콧물 흐르잖아요·”
설이리가 이불로다가 제 코를 쓱 훔쳤다·
“콩물 아내요·”
“진짜 가지가지한다···”
무인도 감기에 걸릴 수는 있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
예를 들어 쏟아지는 장대비를 고스란히 처맞으면서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는다거나 하면 몸 좀 튼튼한 일반인이 비 맞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설이리는 코감기에 걸렸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걸렸다·
“비 맞는데 내공도 안 돌리고 있었어요?”
“더어서요·”
말인즉슨 빙궁의 여름 중에서도 한 열흘 정도는 햇볕이 쨍쨍하게 드는 날이 있다고· 그런 날이면 모두 오늘 참 시원하다 하고 밖으로 나와 햇볕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중원에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조차 그보다도 훨씬 따뜻했다·
이제 유월 말 무지근한 더위란 설이리에게는 거의 불지옥에 열탕 속에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빙공을 돌려서 서늘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더위가 한풀 가시는 밤이 되면 운기하여 회복하고 낮에는 빙공을 계속 두르고의 반복이었다·
“시원하려고 내공을 죄다 뽑아 써서 밤에 단전이 비어있었다고?”
“내· 그리고 응긍슬쩍 방말하지 마시조·”
“하· 코맹맹이 소리로 선을 그어봐야 웃기기만 하거든? 발음이나 똑바로 해줄래?”
그에 설이리가 청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청이 그에 대답해 주었다·
“콧물부터 좀 닦고 노려볼래요? 솔직히 지금 엄청 웃긴데 참고 있거든요?”
“칫·”
“어쨌든 아침은 든든하게 사줄 테니까 먹고 돌아가요· 아니다 감기 낫게 아예 방 잡고 식대도 내줄 테니까 하루 푹 쉬어요·”
무인도 감기에 걸리지만 금방 낫는다·
코감기 정도야 하루 정도 운기요상하며 정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낫는 것이다·
“싱 어 요”
나름 분명히 발음을 해보겠다고 끊어서 하는 말이나 그런다고 막힌 코가 뻥 뚫여서 바람이 통하지는 않는 법이었다·
애석한 시도라고 하겠다·
“아니 무슨 고집이 그래서 계속 따라오겠다구요? 이제 우기라서 비도 계속 올 텐데? 돈은커녕 갈아입을 옷도 없으면서?”
“네·”
고집은 고집이고 이러니 좀 질린다·
게다가 대책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청이 어머니의 마음으로 무한한 자비를 베풀 것도 아닌데 굳이 일행이 아니려고 선을 긋는 여인을 챙길 이유도 없다·
좀 살갑기라도 하면 몰라 얼굴 예쁘고 하는 짓 귀여운 것 말고는 딱히 뭐·
음? 얼굴이 예쁘고 하는 짓이 귀여우면 수고를 들여서 돌보기는 하는 것도 같고? 보통 애완동물이라고 하던가·
청이 괜한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어차피 한 번 크게 당해봤으니 비 무서운 것도 알았겠지·
“흥· 그럼 뭐 알아서 해요· 난 갈 테니까 설 소저는 여기서 살아요·”
“장깡· 치사해요·”
설이리는 갈아입을 옷이 없다·
비가 내내 쏟아져 아침인 지금까지도 쏴아아 시원하게 내리는 와중이었으니 그 사이에 옷이 마를 리도 없는 것이다·
설이리가 깜짝 놀라 침상에서 우당탕탕 떨어지듯 내려와 젖은 속옷을 잡고 망설이는 사이 떠돌이 전문가인 청은 벌써 여벌 옷으로 갈아입고 나설 채비를 전부 마쳤다·
“방갓 하나 남는 건 줄 테니까 쓰든가 버리든가 알아서 해요· 그럼· 나중에 보든가 말든가·”
청이 그렇게 어깨 너머로 손을 흔들어주곤 쌩하니 밖으로 나섰다·
어디 보자· 아침은 뭘 먹어야 좋을까·
비 내리니까 파전이 엄정 땡기네···
그래도 어디 서양 세상 아니라 고대 미개 중원에 떨어진 장점이 어쨌든 뭔가 비슷한 음식이 존재하기는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침개와 비슷한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전병이다·
청의 고향에서 전병이라 하면 메밀로 피를 만든 김치만두 비슷한 느낌이지만 실상 원류 전병은 철판 위에 밀가루 혹은 비슷한 반죽을 얇게 부친 종류의 통칭을 전병이라 부른다·
그리고 중원인들이 간단히 사 먹기 좋아하는 아침 식사이기도 했다·
“그럼 황주도 한 병 땡길까· 역시 파전엔 탁주가 같이 있어야지· 달달한 걸로다가·”
청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드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탁탁 서두르는 듯한 발 소리 그리고 아 하고 안도하는 듯한 코맹맹이 소리가 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아니 저게 기어코 따라오네·
아주 거머리 그것도 찰거머리야·
청이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리는데-
중원이 덥다고 하더니만 설이리의 의복도 위아래 하나로 저고리와 치마를 겸한 단벌 장의 그것도 하늘하고 얇은 종류였다·
하지만 덜 마른 옷이 몸에 척 달라붙으니 상체에 유난히 도드라져 솟아난 부분이 좌우로 하나씩이다·
청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씨 뭐에요! 지금 그 꼴로···! 당장 안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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