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9
난데없이 날아든 음담패설이다·
하지만 설이리는 놀라거나 눈살을 찌푸리지는 않았으니 그저 눈을 끔뻑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고수 아닝대?”
아무리 잘 쳐줘도 일류쯤 될까 싶은 사내가 칼을 들이밀고 의기양양하니 이상하다 싶은 모양이었다·
설이리는 절정 무인이다·
청의 시선에는 겨우 절정 턱걸이에 성공한 햇병아리에 불과하지만 중원 기준으로 충분한 청년 고수다·
청년을 떼고 나면 논란은 좀 있지만 고수라고 부를까 말까 고민이 되는 수준에는 있는 것이다·
“멍청한 년· 하수에게는 하수의 싸움이 있는 법이지· 저기 저년은 아주 제대로 떡실신을 하지 않았냐· 슬슬 졸리지 않나?”
쿨쿨 잘만 자는 청을 보며 이따금씩 꾸벅 고개를 떨구던 설이리였다·
동행은 자고 바깥에는 비 오고 마부의 솜씨는 능숙하니 사람이라면 당연히 졸려야 마땅한 일이라고 그렇게 여겼던 것이다·
“비거파게 야글···”
손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축 처지는 것이 졸려서가 아니었던 모양·
그제야 설이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크크 크하핫! 내가 내가 이 순간을 흐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것이다! 모두 이 몸을! 날 병신이라고 했지만! 나는! 전부! 이런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
“크크 궁금하지 않나? 도대체 어떤 신묘한 독을 썼기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 서서히 중독이 되어가는 것을 감출 수 있었는지 말이다!”
“···”
“크흐 자그마치 오 년 오 년이었다! 이 독 하나를 사기 위해서 오년어치 수입을 전부 쏟아부었어· 모두 나를 병신이라 했지만! 언젠가 이렇게! 쓸 일이! 있으리라고! 잠깐 듣고 있냐?”
그러거나 말거나 설이리는 열심히 내공을 몰아쳐 약기운을 몰아내는 중이었다·
서서히 쌓인 독기가 내공을 몰아쳐야 겨우 가닥이 잡히니 중독 사실을 듣고 나서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은밀한 독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들으라고! 어차피 깔려 앙앙대는 계집 주제에 어딜 서방이 말씀하시는데!”
마부가 그리 외치며 무언가를 팍 내팽개쳤다· 마차 바닥에 퍽 호되게 내팽개쳐진 무언가에서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난다·
“크크 조금만 있으면 아예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을 것이야· 그러면 고수고 뭐고 구멍 뚫린 계집만 남는 거지· 네년 구멍은 얼마나 조일지 크큭 크하핫·”
그리고는 꽝 마차의 문이 닫혔다·
설이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마차 문을 걷어차지만 어찌 만들어진 마차인지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 설이리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희끄무레하게 손아귀에 어리는 수기·
동시에 찬 공기가 휘몰아치며 사방으로 쌩쌩 불어닥친다·
안목 있는 무림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곧장 벌떡 일어나 부릅뜬 눈으로 소리쳤을 것이다·
빙백신장! 하고·
그리하여 꽝! 설이리의 장심이 마차의 문을 후려치며 굉음이 울려퍼졌다·
쩌적 하고 흰 서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설이리의 손을 중심으로 천천히 번졌다·
파사삭 부서져내리는 마차의 내벽·
그 사이로 제법 촘촘히 일자로 박힌 창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유· 무슨 마차에 철심까지 다 박아놨대· 아주 작정을 했구만 작정을 했어·”
“!”
설이리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다들 너무 예의가 없다니까· 사람 자고 있으면 알아서 쉿 조용조용 발소리도 안 들리게 조심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주 막 소리를 지르고 벽을 두드리고· 자는 사람도 생각을 좀 해 줘야지·”
“서뭉 소저? 갱차나요?”
“괜히 힘 빼지 말고 좀 쉬어요· 몸도 안 좋으면서 무리하지 말고·”
“지긍 그렁 때가-”
“후· 이래서 절정들이란· 별것도 아닌 일에 막 호들갑이라니까·”
설이리의 표정에 드물게 명백한 감정이 떠올랐다· 바로 어이없음이었다·
“자· 이리 와요· 그렇게 못되게 굴면 겁 먹고 도망친단 말야· 원래 나쁜 놈들은 겁이 많아서 되겠다 싶어야만 앞에 나서고 그러다가도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쳐 버리거든요? 그럼 안 되잖아· 빗속에 추적전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싫은데·”
청이 그리 말하며 손을 뻗었다·
설이리가 피하려 했으나 몸이 둔하고 순간 힘이 빠져 비틀 몸이 흔들리니 순식간에 손목을 턱 붙잡은 아름다운 손이 제게로 홱 잡아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차 안에 수면독에 마비독 그리고 서서히 흩어지는 내공을 보아 산공독까지 섞인 모양이었다·
몸만 멀쩡했더라면 하고 설이리가 자책했지만 사실 그랬더라도 달라지는 바는 없었을 것이다·
청의 무영신수는 신공이라 부를 수 있는 소매치기술이자 금나수법이었으므로·
설이리의 몸이 힘없이 쏠려 청의 품으로 폭 파고들었다·
“뭐야· 또 내공 돌리고 있었어요? 도대체 뭐 더우면 얼마나 덥다고· 음 시원하네·”
“지긍 이럴 때가-”
“그냥 좀 가만히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었어야죠· 마차를 잡을 때는 마부를 잘 가려야 한다고 했잖아요·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는데·”
“당시니 자밧자나요·”
“어허이· 남 탓은 좋지 않아요·”
“낭 타시 아니라-”
“쓰읍· 못 써요· 무림인이 남 탓을 하면 어떡해? 칼 맞고도 찌른 놈을 탓할 거야? 칼 들고 살면 뭘 당해도 자연사 아닌가?”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칼에 찔리면 피하지 못한 본인의 잘못이다· 그 전에 적을 해치우지도 못했고 알아채고 피하지도 못했으며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면 진작에 도망을 쳤어야 하고 아니면 아예 시비거리를 내어주면 안 됐다·
설이리가 분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기 때문이었다·
저 혼자 마차 잡고 마부 잡고 아주 혼자서 척척 다 해놓고는 인제 와서 너도 가만히 있지 않았냐고 하면 좀 억울하다·
하지만 다 해주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일도 동행으로서 떳떳하지는 못한 것이다·
청이 아예 마차 좌석에 드러누웠다·
시원한 기능이 있는 죽부인을 제 위에 척 올려놓고는 붙든 채였다·
죽부인이 낑낑 탈출을 시도했지만 아주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약효가 점점 돌기 시작하는 모양·
“무승 생가기조?”
“음· 아마 패거리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리고 오늘 점심은 뭘 먹지?”
“응그니 방망하지 마요·”
“싫은데? 반말 할건데? 그래서 설 소저가 뭘 할 수 있죠?”
“나도 방망할거에오·”
“설 소저는 안 돼요· 나만 할 거야· 지금도 밉상인데 반말까지 하면 더 밉상이니까· 그려면 바로 버리고 갈 거야·”
“시러요·”
그에 낄낄 웃는 청의 눈빛이 요사스럽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곧 일어날 일에 대해서 일어나게 하는 일이 기대가 되어 제대로 살의가 치솟은 상태라서 그렇다·
청이 지금을 얼마나 기대했는가·
중원 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관상을 본다·
청은 좀 다르게 본다·
삼차원이 아니라 관상보다는 더 정확한 숫자가 머리 위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중원 사람들이 쓰지 않는 숫자 표기법으로·
마부를 찾으러 마방에 들렀다가 초특급 개새끼를 발견했으니 와! 오랜만에 피 좀 보고 피 잔치다 잔치·
게다가 이제 나는 강기를 쓴단 말야·
원래 새 칼 사면 다들 하루라도 빨리 써 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찌르고 베고 저며내면서 칼이 잘 드나 손맛은 좀 괜찮나 무인이라면 당연히 새 칼의 개시를 두근두근 기대하는 건데·
하물여 칼도 아니고 검강이다·
아직 검강의 개시 이전이었으니 청의 인내심도 이제 거의 한계에 달했다·
자 어떻게 나올까? 겁이 많은 놈 같았으니까 약에 절여질때까지 기다릴 속셈일까?
몇 놈이나 될까? 기왕이면 좀 많았으면·
청의 심장은 두근두근 세차게 뛰고·
그런데 어째 이 각이 지나도록 영 소식이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심심하고 지루해서 못 버티겠네·
사람 속 터져서 죽게 만드려는 신종 암살 수법인가?
덕분에 죽부인은 아예 골아떨어져서 막힌 코 때문인지 도로롱 도로롱 제법 요란한 소리로 코를 골아댄다·
청의 눈동자 속 세상에 없던 색채도 점점 그 색이 짙어지니 이제는 아예 은은하니 광채가 비치는 수준이다·
심심한데· 가슴이나 주물러야겠다·
먹여줘 재워줘 옷도 사다 입혀주지· 나 아니었으면 간밤에 저체온증으로 염라대왕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을 멍청한 년이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이 정도 권리는 있지·
청의 하얀 손이 설이리의 앞섶으로 쏘옥 파고들었다·
음· 근데 좀 아담하네·
손아귀 가득히 들어와서 말랑거리고 꾹꾹 누르고 쥐어짜고 해야 제맛인데····
보기에는 좋아도 정작 손맛은 영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뭐· 어쩔 수 있나· 이거라도 쭈물거려야지 뭐·
오 막 딱딱해지는데· 음란한 년 같으니·
나한테 감사해야지· 이런 별 재미도 없는 걸 주물러주잖아·
물론 설이리는 억울할 수 있다·
자극에 반응하는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이니까·
그러나 약 먹고 자느라 몰랐으니 억울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청의 손아귀가 근질근질한 것이·
생각해보니 가슴을 쥐어짜면 되게 아프단 말이지· 얘는 어떻게 반응할까?
과묵한 죽부인이니까 비명도 꾹 참지 않을까? 아니면 어울리지 않게 새된 비명을 목이 쉬어라 내지르며 놔 달라며 울부짖을까? 어떻게 울부짖을까? 비굴하게 제발 놔 달라고 아프다고 할까 아니면 욕설이 난무하며 선연한 증오를 드러낼까·
표정은 어떨까? 배신당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애초에 믿지 않았기에 역시나 하는 증오를 담아서 쳐다볼까?
어느 쪽이건 재미있을 것 같다·
청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거의 양쪽 귀밑까지 닿을 듯한 흉악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 때-
벌컥· 문이 열렸다·
“마참내!”
청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크크읍·”
마부가 병신같은 웃음소리를 한 소절 다 내기도 전에 곧장 하관을 틀어 잡힌 채로 마차 안에 쏙 딸려 들어온다·
청의 손이 마부의 하관을 단단히 쥐어서 들어올리고 그 발등을 제 발끝으로 꾸욱 짓눌렀다·
안 그래도 청의 수련신은 굽이 엄지 발가락에만 달렸다· 수련신의 소리나는 굽이 마부의 발등 속으로 서서히 파고든다·
발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이 침입감·
우드득 발 뼈가 으스러지고 더 아래로 쑤욱· 그리고 마침내 단단한 마차 바닥을 딛는 와 관통! 깔끔하게 뚫었어요!
“으으읍!”
하관이 틀어잡힌 잡힌 마부가 코로만 비명을 지르니 흥흥 더운 콧김이 청의 싸늘한 손을 데웠다·
“안녕? 친구야?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니까 이렇게 맛이 가 버리잖니· 자· 몇 명이나 돼? 얼마나 즐길 수 있어?”
“으읍·”
“대답 안 하니? 그럼 좀 아파요?”
청의 발끝이 서서히 들린다·
반 치 정도 옆을 밟아 다시 꾸우욱·
그에 마부가 눈을 까뒤집는다·
청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게 뭘 했다고 벌써 기절이나 하고·
검강은 개시도 못 했는데·
청이 밭끝을 떼어 바닥에 슥슥 문질러 굽 아래를 닦아내고는 발을 바꾸고 목표도 바꾸어 이번에는 그래 한 방에·
따각!
“끄읍! 으으읍!”
마부가 한 방에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이 번쩍 드는 한 방인 것이다·
“자· 이제 손을 놔 줄 건데· 내가 듣기에 시끄러우면 죽여버릴 거예요? 알겠으면 대답·”
“읍· 읍·”
“아· 입은 내가 막았지· 그럼 눈동자로 해 봐요· 알겠으면 끄덕끄덕 싫으면 도리도리·”
그에 마부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크게 왕복 운동을 개시했다·
눈썹까지 움직이라고는 안 했는데 아무래도 열정이 과한 모양·
청이 그에 흡족하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마부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구멍이 뻥 뚫린 제 양발에 감히 손을 대지도 못하고 팔을 어정쩡한 위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릴 뿐이다·
청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마부 아저씨· 무슨 독을 썼길래 절정쯤 되는 고수가 맥을 못 춰요? 그리고 그런 귀한 독은 또 어디서 났어요?”
“흐 흑점에서 샀습니다· 그리고···”
듣자하니 금자를 세 개 씩이나 주고 산 비장의 약들이라는 것이다·
모두 비웃었지만 언젠가 이걸로 너희는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귀한 여인을 따먹겠다는 집념으로 오 년 수입을 모조리 때려 박은 사나이의 결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귀한 여인이라면 따먹고 나서 팔더라도 그만큼은 충분히 벌 것이고·
“아· 또 흑점 새끼들···”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는 데에는 당연히 독 역시 포함이 된 것이다·
그때 아예 흑점 무사들 전부를 개박살을 내 버리는 건데· 건드리면 안 좋다고 해서 그냥 튀었던 게 아쉽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날의 아쉬움은 아무리 되새겨봐야 계속 아쉽기만 할 뿐이다·
그보다는 미래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이 소중함을 알고 그에 집중해야 한다·
청은 항상 그렇게 해 왔던 것이다·
그에 청이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일을 혼자 벌이지는 않았겠죠? 패거리 아니지· 다 필요 없고· 몇 명이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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