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2
일러바치는 사람의 특징이란 곧 죽어도 자기 잘못은 없다고 우기는 점이다·
그러니 혹여 일러바치는 상황에서 ‘나도 조금의 잘못은 있지만’ 따위의 서두를 붙인다면 객관적으로는 무림공적 수준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상태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서문청? 분명 금산령이 떨어진-”
“맞습니다! 그년이 다짜고짜 칼을 뽑아들어서는!”
도우삼이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잡놈 새끼가 말을 끊어내니 기분이 상하고 말을 끊어서 나온 내용도 심상치가 않다·
“서문청이라· 대체 무슨 악연이라고 남의 앞마당까지 쳐들어와서는· 그래 몇 놈이나 되지? 전력은? 고수는 많던가?”
“그년은 혼자입니다! 혼자 왔습니다!”
“혼자? 혼자서? 지금 녹림의 전투부대 하나가 새파란 계집년 한 명에게 개박살이 났다는 소리냐?”
도우삼의 눈썹이 꿈틀했다·
도련님이 직접 이끄는 전투부대라 하여 공적을 몰아주려는 그리고 호위를 겸하는 허울뿐인 부대이기는 하다·
그래도 고작 어린 계집 한 명이다·
초절정에 들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긴 했지만 이제 막 초입에 든 계집이 검강을 쓰면 뭐 얼마나 잘 오래 능숙하게 쓸 수 있다고·
도우삼이 갓 초절정에 입문했던 이십여 년 전을 돌아보면 초절정 초기의 빈약한 내공으로 무리하게 검강을 빚어내다 탈진해 죽을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더란다·
초절정 초기란 그만큼 취약한 상태라서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잘 다루지도 못하면서 남용하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반 병신 상태라고도 하겠다·
“흠· 싸울 줄 아는 년이야·”
“대주님?”
“이 잔인한 손속을 봐라· 정파의 여협이 무슨 살성이라서 사람을 썰며 기쁨이라도 느낄까· 부러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잔인하게 굴었겠지· 결과를 봐라· 반수는 도망치고 남은 반절도 두려움에 머뭇거리며 눈치나 보았을 꼴이 눈에 선하군·”
반은 맞추고 반은 틀렸다·
청이 그러한 목적으로 더욱 잔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살성이 맞기도 했다·
사람을 썰며 기쁨뿐이랴 쾌락 살인마라 하는 단어가 아직 고대 원시 미개 중원에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수준이니까·
도우삼이 제 대원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잔인함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초절정이라고는 하나 이제 막 경지에 든 애송이가 아니냐· 스물짜리 계집년이 실전을 얼마나 겪었으려고· 겁먹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합심하여 일시에 달려들었다면 시체 숫자는 같았더라도 지금쯤 사로잡아 총채주님 앞에 발가벗겨 매달아 두었을 터가 아니냐·”
“예 대주님·”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내 분명 명령을 전해듣기로는 그년을 두고 도망치는 새끼는 죄다 죽여버리라고 절대 물러서지 말고 꼭 잡아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 같은데·”
“저 저는 도망을 친 게 아니라-”
“공포에는 공포지· 이 새끼를 최대한 끔찍한 꼴로 죽여다 저기 매달아 놔· 죄명도 큼직하게 박아놓고· 곧 인근 산채에서 죄다 몰려올 텐데 도망자가 어떻게 되는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정신을 차리겠군·”
“예 대주·”
“잠깐· 아니다·”
도우삼이 히죽 살벌한 웃음을 짓는다·
청이 짓는 표정과 비슷한 기대감이 잔뜩 서린 흉흉한 미소였다·
“내가 직접 하지· 간만에 피끓는 광경을 봐서 말이야·”
—-
천문산 육락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원가계라고 하는 원시림이 쭈욱 펼쳐진다·
보통 장가계 하면 떠오르는 수직 기둥과 불규칙한 절벽들이 빽빽한 수림 위로 수백 개나 솟은 장엄한 풍경이 바로 이 원가계의 모습이 되시겠다·
그러나 정작 원가계의 지상에 발을 디디면 절경은 보이지 않는다·
밀림과 수림의 중간쯤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수목이 두꺼운 천장을 둘러놓았기에 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한여름 가장 밝은 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아 어두침침하다·
청이 가파른 비탈을 내려오고 나서는 이미 십일월 충분히 짧은 해가 떨어지고 난 이후였다·
낮에도 그러할진데 밤에는?
뭐야 진짜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혹시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꼭 감아보니 오히려 눈을 감아야 뭐라도 보일 지경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눈꺼풀 뒤의 잔상 같은 어지러운 아지랑이 같은 반짝임이라도 보이는 기분이라도 들지·
눈을 뜨면 진짜로 아무것도 정말로 무엇 하나 보이는 것이 없는 암흑천지다·
장가계는 연중 다습하기에 해가 지고 땅이 식으면 밤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아무리 인간 초월의 눈동자를 가져 집광 능력 역시 초월한 청이었지만 아무리 인간 초월이라도 반사하여 비출 광원이 전혀 없는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없다·
다만 눈에 뵈는 것도 없는 주제에 청이 느리지만 척척 막히지 않고 잘만 걸어간다·
각성신공 덕분이었다·
물안개는 바람보다도 훨씬 선명한 흐름을 띄는 것이다·
그러니 공간 파악의 범위가 평소보다 두 배쯤 확장되어 어디 부딪치거나 빠지지는 않고 천천히 산책하듯 거닐 정도는 된다·
그리고 청도 자신의 신체 능력이 인간을 초월한 상태임을 안다·
시력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자신에게 앞이 안 보일 정도라면 산적들은 오죽하겠는가·
이대로 밤을 틈타 빠져나가면 그만이지·
청이 그에 뿌듯함을 느꼈다·
좋아· 역시 나야·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어디 한군데 빈틈이 없지·
재수 좋게 얻어걸린 주제에 아주 의기양양 어깨가 으쓱으쓱이다·
그리하여 이제 남쪽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남쪽으로 남쪽····
음· 그런데 어디가 남쪽이지?
물론 청도 내 손안의 지도가 없는 세상에 오래 살았으니 어느 정도 방위법을 익힌 상태다·
일단 큰 고민 없이 하늘만 봐도 안다·
그런데 하늘이 안 보이네····
하늘이 안 보인다면 수목을 관찰해보는 방법도 있다·
수목은 남쪽으로 가지를 뻗는 습성이 있으니 보다 무성하게 뻗어나간 쪽이 바로 남쪽이 되시겠다·
그런데 음 나무도 안 보이네····
청은 몰랐지만 훤히 보였다 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반쯤 밀림의 특성을 가진 원시림에서는 수목이 가지를 위로 보다 위로 다른 나무 제끼고 더 위로 뻗어나가기 때문에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는 나무 그루터기 음 안 보여·
바위에 이끼 음 축축해서 그런지 그냥 온통 다 이끼투성이다·
“아씨· 길 잃었네···”
청이 그제야 조난 사실을 인정했다·
물론 그렇다고 막 두려움이 솟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지금 당장 방향을 잡을 수 없다 뿐이지 해 뜨면 그만 아닌가·
그러니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책은 노숙 최적화의 신체로 하룻밤 푹 자서 체력과 기력을 보충하고 아침에 해 뜨면 방향 잡아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책 없는 행동력이 그 발목을 잡았으니·
녹림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한데 어떻게 태평하게 잠을 자?
게다가 방향을 못 잡는 것 뿐이잖아·
돌아다니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으니까 쭉 걸어 나가면 숲 밖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해 뜨기 전에 빠져나간다· 개이득·
그러다 해가 뜨면 그냥 해 보고 방위 잡아서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면 실패해도 손해는 아니고 성공하면 이득뿐 아닌가?
그럼 지금 안 움직이는 게 오히려 손해인 거 아냐?
게다가 숲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일자로 쭉 걸어 나가면 긴긴 밤사이 거 빠져나가지도 못할까 하고·
일자로 걸어 나갈 수 있다면 그렇겠지만·
청이 간과한 점은 사람은 절대 숲속에서 일자로 쭉 걸어 나갈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빠져나가는 데에 실패하면 손해가 아닌 것이 아니라 손해 자칫하면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괜히 산에서 조난 시에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신호나 보내라고 말하겠는가·
그리하여 청의 본격 밀림 탐험이 시작되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힘이나 빼는 일이었지만 굳이 좋게 포장하자면 탐험이라는 행위 자체가 으레 그렇게 별 쓸모가 없다고도 하겠다·
—-
청은 전투 중에 자기병으로 추정되는 그 아니더라도 쨍그랑 깨지는 무언가에 등판을 맞아 찝찝한 액체를 뒤집어썼다·
다행히도 찝찝할 필요는 없다·
그냥 사람이 맡지 못하는 향을 가진 기름의 한 종류 향유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청에게는 불행히도 녹림에서는 이 향유를 쫓도록 훈련된 개를 잔뜩 기르고 있다·
그리하여 개 몇 마리가 킁킁 냄새를 쫓아 육락봉 남쪽의 절벽을 좌우로 완봉한 이후 동쪽 끝을 타고 쭉 올라오다 가파른 흙벽 구릉이 나오자 차마 내려가진 못하고 컹컹 사납게 짖는 것이다·
도우삼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이 혈사를 벌여놓고는 도망은커녕 육락봉의 여섯 즐거움이라 불리는 그 절경을 천천히 구경한 후에 원가계 밀림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진짜 영리한 계집이로군· 그리고 진짜로 대담하기도 해· 추종향이 아니었다면 눈 뜨고 놓칠 뻔했겠어·”
효시가 사방에서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었을 테니 어디로 도망쳐도 적을 마주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을 터다·
그러니 오히려 허를 찌른다·
원가계 저 울창한 수해에 몸을 감춘 채 저를 쫓아 관도를 타고 달려나가기를 기다리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어차피 기다려야 할 테니 좋은 구경까지 느긋하게 즐긴 모양인데 이게 갓 스무 살 계집이 가질만한 담력이란 말인가·
도우삼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아름다운 살해를 자행한 손속 그리고 치밀한 두뇌(아님)와 담대한 용기까지·
죽여야 할 원수만 아니었다면 내 아이를 낳아달라 할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물론 총채주의 아들을 둘이나 해쳤으니 결코 살아남을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기에 육락봉에 도착한 각 산채의 전투대는 도망자의 화려한 말로를 구경한 뒤 곧장 산채로 되돌아갔다·
곧 해가 진다·
밤의 산자락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아는 녹림도들이다·
이렇게 다급히 몰려든 상태로는 원가계에 진입할 수 없었으니까·
진짜 사냥은 내일부터·
그보다는 다른 부분이 걱정이었다·
총채주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하는데·
부하를 보냈다간 총채주 성질에 살아나올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차마 양산박대의 대주를 해하지는 못할 터이니 직접 보고를 해야 할 텐데·
그리하여 총림 총본산 총채주전에 드는 도우삼의 발걸음이 무겁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보고를 들은 총채주가 손을 들어올린다·
피하면 더 처맞는다·
그에 도우삼이 목에 뻣뻣하게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아니 아니야· 자네 잘못이 크윽·”
놀랍게도 총채주가 손찌검을 참았다!
도우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총채주가 제 성질을 참아낸 것은 물론 대단히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총채주가 눈물을 피눈물을 흘리기에·
“형님·”
“그년 그년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야 아니 산채로 씹어먹어야겠다 목숨을 붙여서 손끝 발끝부터 씹어먹을 테다· 죽여달라 애원하면 오줌통에 던져넣어야지· 이봐 아우· 그년은 어떻게 할까? 오줌에 빠져 익사를 할까? 익사가 두려워 처마시다 배가 터져 죽어버릴까? 오줌독이 올라 죽는 게 먼저인까? 궁금하지 궁금하지 않나?”
자식을 둘이나 잃은 아비의 원한이다·
눈의 핏줄이 터져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뱉는 말에 원독이 진득하게 서린다·
“아니 더 비참하게 뭐가 있을까? 그래 계집년이니 낮에는 건져다 던져놓지· 어찌 생각하나? 저 산적 새끼들이 오줌통에 푹 절여진 지린내 나는 더러운 계집도 미인이라면 박으려 들까? 궁금하지 않나?”
“형님·”
“그래· 알아· 생포하려면 많이 죽어나갈 테지· 하지만 우삼이 내가 부탁을 부탁을 좀 하겠네· 응?”
도우삼이 총채주의 덜덜 떨리는 손을 보고 턱에 맺혀 떨어지는 핏물 섞인 눈물을 보았다·
그러니 달리 대답할 말이 있겠는가·
“···명령 받들겠습니다·”
청이 아무것도 모르고 한참 원시림 속을 헤메는 도중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결전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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