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9
욕탕에 들어서니 뜨거운 김이 화악 몸을 감싸고 뜨거운 습기가 코로 스며 저 가슴 속까지 촉촉해지는 기분이었다·
와 이거지· 이거지·
“뭐야? 누구야?”
“신경 쓰지 말고 그 더러운 몸뚱이나 불려· 아· 혹시 향조 가진 거 있어? 없으면 벽감이나 휘즙이라도 혹시 반 써? 반은 좀 안 씻기는데· 뭐 그거라도 있으면 좀 쓰게 줘 봐·”
향조는 중원에서 가장 고급으로 치는 미용 비누다· 벽감은 다소 싸지만 여전히 비싸서 양민들은 엄두도 못 낸다·
휘즙이란 실거리나무의 열매즙 반이란 쌀뜨물을 말하는 것이다·
거의 맡겨 놓은 투다·
“뭐야? 너 뭐야? 내가 누군 줄 알고 건방을 떨어?”
“그쪽이야말로 말조심하지 않을래? 내가 누군 줄 알고 반말을 찍찍 싸? 산적 새끼 딸년 주제에 뭐라도 된 줄 알아?”
여인이 읏 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파스러운 연놈들의 특징이다·
상대가 오히려 세게 나오면 혹시 높으신 분인가 하여 주춤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인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누구지? 감히 나를 산적 새끼 딸년이라고 칭할 만한 사람이 있던가?
사파련? 혹시 사파련의 여고수인가?
하지만 사파련의 여고수라도 이번에는 말이 좀 심했으니 녹림 총채주를 일개 산적 새끼라고 부르는 셈이 되었기 때문에·
“크흠·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는-”
“됐고 내가 물었잖아· 향조 있어?”
주춤한 여인의 기세를 읽은 청이 몰아붙였다·
그러자 우물쭈물 대답이 돌아온다·
“그 저기· 저쪽 단상 위에···”
“오· 진짜 있네? 산적 새끼들이 돈도 참 많아· 어디 이 귀한 향조를 이야 큼지막하기도 하지· 금자 깨나 줬겠는데?”
아예 시설을 갖춘 욕탕이란 대개 고만고만한 구조다·
돌 파서 만든 세 개 구덩이에 하나는 불 때서 뜨거운 열탕 한쪽에는 상온의 목욕물 그리고 그 가운데 온탕에서 좌우로 물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온도를 맞춘다·
탕에 들어가기 전에 씻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벽감 챙긴 청이 열탕 옆에 자리를 잡아 뜨거운 물을 크게 퍼올렸다·
너무 뜨겁나? 하지만 뭐·
청에게는 빙공이 있다·
위력은 별로지만 뜨거운 거 식히는 데에 있어서는 이만한 무공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적당히 뜨끈한 목욕물을 쫘악 뒤집어쓰며 어푸어푸 와 이게 진짜 이게 진짜로· 이게 사는 거지·
여인은 어이가 없다·
대체 누구시길래 남의 욕탕에서 남의 물을 팍팍 써 가며 남의 향조로 몸을 씻는단 말인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바깥에는 호위를 맡은 양산박대 서열 이십구 위 천죄가 욕탕을 지키고 있지 않았던가·
어지간한 신분이 아니라면 허락도 구하지 않고서 들여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게다가 하대가 자연스럽고 이쪽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이 정말로 높으신 분이라 그런가 아닌가·
말을 걸기는 껄끄럽고 자리를 피하기에는 뭔가 지는 것 같고·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자니 진짜 박박 소리가 나도록 씻어대던 욕탕의 침입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 반대편에 척 몸을 담그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모가 여인은 세상에 이리도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 같은 여인임에도 잠시 넋을 잃고서 청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물이 이렇게 미적지근해· 이게 무슨 온탕이야 맹탕이지·”
그리고는 열탕의 수문을 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울 정도로 달아오르는 물의 온도에 만족한 듯 수문을 닫고 척 기대 으아아 따위의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저기요·”
“뭐야 왜요?”
“그 누구신지····”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서문청·”
“서문청!”
여인이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전혀 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잘 죽었다 싶었지만 어쨌든 오빠들의 원수!
그 서슬에 반대편에 앉아있던 청은 졸지에 시야가 온통 살색으로 물든다·
“오우· 원시림·”
“너 여길 어떻게 날 날 죽이러 왔구나! 강 호위! 강 무사!”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리기에 청이 여인의 머리채를 콱 잡아 끌어당겼다·
“꺄악!! 놔 놓으라으릅·”
놀라운 사실 하나!
사람은 입 안에 물이 차면 소리를 지를 수 없다!
물론 소리를 지르지만 매질의 특성 차이로 전달이 안 되는 것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때에 과학적인 접근이란 눈치라고는 아주 눈곱만치도 없어 저 아는 소리에 끼어들어 거짓과 참을 가려대는 이공계 놈들이나 할 소리가 아니겠는가·
문과 감수성 충만한 청은 그냥 새로이 알아낸 놀라운 자연 법칙 인간의 생태에 전율하기로 했다·
청이 여인의 머리를 욕탕에 꾹 처박은 채 힘을 사실 힘도 별로 안 줬다·
청의 힘은 이미 인간 초월 사람이 아니라 곰이라도 물에 처박을 수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에 여인이 신이 나서 첨벙첨벙 물장구를 친다·
이러한 강제 잠수는 원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이 때부터 본질적으로 행하는 놀이가 아니겠는가·
여인도 간만에 동심을 만나 신이 너무 많이 난 모양·
신이 너무 넘쳐서 동작이 아주 격렬하며 아주 사방팔방에 물을 튀기는 것이다·
이렇게 좋아해 주니 기쁜걸·
속으로 서른까지 센 청이 머리통을 쏙 뽑았다·
힘을 줄 것도 없이 제가 알아서 격렬하게 솟구치는 머리통·
그리고는 끄어어어 국밥이라도 얼큰하게 한 그릇 말아먹은 소리를 낸다·
와 제법 영혼이 담긴 소린데·
국밥 좀 드실 줄 아시나?
깍두기 국물은 없으니 대신 청 우린 탕을 드리겠습니다·
대충 미인탕쯤 하지 않을까?
한 번으로 끝나면 서운하니까 다시 입수·
첨벙첨벙 신나는 물놀이 시간·
하나 둘 셋··· 서른·
청이 다시 머리통을 뽑았다·
꺼으윽 꺼윽 격렬하게 숨을 탐하는 소리·
청이 제 손어귀 여인의 머리 위를 보았다·
삼백팔십삼 점·
청은 ‘아는 거 다 말해’라는 진실해지는 순간을 통해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들었다·
개중에 채주 딸의 독특한 식성에 대한 정보도 있었으니 악업을 보니 얘가 바로 그 사람 잡아먹는다는 총채주 딸년인가 보다·
식인은 산적들에게 드문 일이 아니다·
여인도 어려서부터 접했으니 인제 와서 그게 딱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고·
다만 싱싱한 육회를 좋아해서 눈앞에서 갓 잡아 만든 요리를 즐기는 악종은 산적 중에서도 몇 명 없는 편이라고 하겠다·
산적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렸다·
제법 미모에 물이 오른 여인에다가 총채주 따님이니 그 정도야 산채로 가끔 잡아다 주는 수고는 할 수 있다는 이들·
그리고 끔찍한 년이라고 부르르 떨면서 아무리 예뻐도 그건 아니지 하는 산적들·
당장 가장 가까운 호위 가장 못생겨서 딸애가 반할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호위를 맡게 된 천암 고故 천암 대원도 사람 잡아 회쳐먹는 끔찍한 년이라고 치를 떨었으니·
총채주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되었다·
아는 거 다 말해를 통해 뒤늦게 알기로는 그 도련님과 도련님이 형제였다던가·
뭐 남매가 다 이 꼴인 걸 보면 총채주의 가정 교육이 어땠는지는 알 만한 꼴이다·
어떻게 첫째 둘째 셋째가 강간 강도 살인자 강간 강도 살인자 식인 살육자야·
그럼 자업자득 아닌가?
그러니까 물고문 아차 물고문이라니 물놀이 두 번으로는 정이 없지·
아직 모자라·
원래 한민족의 정은 삼세번이기도 하고·
입수·
와· 오늘 내가 인심 크게 쓴다·
덤으로 한 번 더 드려요·
입수·
이럴 수가· 덤에 덤을 하나 더 드려요!
하나 더하기 하나!
입수·
사장님이 미쳤어요!
와! 입수 신발보다 싸다!
물론 신발은 저기 서역 지혜의 신 이름 딴 제품이나 황금거위 같은 값비싼 사치품과 비교하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내 입수도 명품이야 명품·
바퀴 아니 입수·
입수는 팔아도 양심은 팔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양심은 너무나 귀하고 비싸 너희 호구들한테 쓰기에는 아깝거든요·
침수!
침수라는 건 엄밀히 따지면 없는 거거든요? 그냥 살짝 물이 들어간 거지 뭘· 물로 싹 닦였으니 오히려 좋은 거 아닌·
뭐요? 안 사? 구경? 구우경?
손님 이러시면 참 곤란한데 아오 주먹이 운다 진짜 패버릴 수도 없고· 씨발!
입수!
와 오늘 인심 오지게 썼네·
이렇게 퍼주면 뭐가 남나요?
안 남습니다· 망했어요·
점포정리 폐업정리 창고정리 들어갑니다·
입수· 입수· 입수·
마침내 기나긴 놀이의 끝에서 오랜만에 깊은 동심으로 제대로 물놀이를 즐긴 여인이 기진맥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져 욕탕에 기댄다·
“살려 꺼윽·”
물을 너무 많이 먹었으므로 속에서 트림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는 것이다·
“면전에서 트림을 다 하고?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아 산적 딸년이지· 그건 뭐 이해해 줄 수 있지만 용서는 안 된다! 물은 예의를 만든다!”
“히익·”
그에 여인이 몸을 못 가누면서도 허우적 첨벙대며 한 번 스스로 물에 빠졌다가 거의 욕탕 벽면에 매달려 기듯이 밖으로 빠져나간다·
욕탕 안에서도 기진맥진하던 여인이다·
부력의 도움이 사라진 욕탕 밖에서 기민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철퍼덕 요란하게 널브러지고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긴다·
“열 셀 동안 돌아와· 안 그러면 입수 열 번 더 들어간다· 하나 둘 셋···”
“히익·”
그에 여인이 흠칫하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두 발짝 정도 뛰다가 꽈당! 호되게 넘어져 돌바닥을 구른다·
굉장히 아파 보이기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도망을 쳐? 괘씸하게?
청의 눈빛에서 흉흉한 색채가 퍼진다·
모처럼 뜨끈하게 몸 지지는데 짜증나게·
좀 가지고 놀다가 죽이려고 했는데 이럼 또 욕탕 밖에 나갔다 와야 하잖아·
하지만 놔두면 정말 도망갈 기세다·
도망가봐야 어디를 가겠냐 싶다마는 막 동네방네 난리를 쳐서 얼마 안 되는 쭉정이들이라도 도망치면 아까우니까·
청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욕탕 밖으로 나가 여인의 머리채를 콱 틀어쥐었다·
“악 제발! 잘못 잘못했어요!”
“잘못은 개년이 되기 전에 빌었어야지· 니 혓바닥 하나 즐겁자고 산 사람 해체할 때 한 번이라도 살려준 적이 있어?”
“안 그럴게요! 끄흑 안 그럴 테니까·”
그에 청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좆되고 나서 후회하는 건 누구라도 해· 그건 반성이 아니고 그냥 후회기도 하고· 그러니까 좆되기 전에 반성하고 바로잡았어야지· 그래도 힘 내 봐· 노력하면 살 수는 있도록 해 줄 테니까·”
—-
청은 과거 한 행정성을 족히 대표할 만큼의 뛰어난 지성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자가 빼어난 두뇌로 기꺼이 청을 도왔으니 청이 그 과정에서 큰 배움을 얻기도 했다·
그리하여 성급시 최고의 지성의 가르침·
한 조직을 혼란에 빠뜨리려면 태워라·
불태우는 게 최고다·
다만 천자봉과 그 옆 봉우리 사이 암반에 자리 잡은 녹림 제 일 채다·
그리고 본래 천자산의 중턱 위에서부터는 안개가 짙어 세 장 밖이나 겨우 보인다·
불이 피어올라도 아래에서는 알아차릴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집 잘 탔더라 하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이틀 후였다·
당일은 해가 져서 전원 철수하고 한숨 푹 잤다·
어차피 밤에는 누가 들더라도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원가계라서 야간 수색의 의미도 별로 없다·
거기에 늦은 저녁 먹고 막사 안에 불길 피워 따뜻한 잠자리다·
저 원가계 축축하고 추운 밀림에서 자야 하는 서문청은 계속해서 체력이 빠질 뿐이니 장기전으로 가면 더 유리하다는 그러한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도 추살대가 투입된 후 창고에 모자란 물자를 가지러 본채로 돌아온 잡무조가 아니었다면 화재 소식은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왕철군은 직접 추살에 나섰다가 허탕 치고 돌아오고 나서야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녹림 제 일 채· 거의 전소·
“다시 다시 말해봐라!”
“그것이 누군가 불을 지른 모양으로···”
“란이는 란아는 어찌되었느냐!”
산뇌 아잔덕이 총채주의 눈치를 보았다·
“그것이· 안타깝게도···”
아잔덕은 진지에 대기 상태였기에 비보를 전해듣고는 곧장 예비대를 몰아쳐 본채 수색에 나섰다·
다만 수색이라고 할 것도 없이 깔끔하게 잘 탔더라·
녹림 제 일 채는 녹림의 총본산이다·
애초에 화재 대비는 충실히 해 둔 편이라서 건물 하나 탄다고 옆으로 옮겨붙거나 하지는 않도록 설계가 되었으니까·
그러니 건물마다 옮겨 다니며 수고로이 일일이 불을 놓았다는 뜻이다·
즉 누군가가 불태웠다는 뜻이 된다·
개중에 멀쩡한 것은 욕탕 하나·
아가씨가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거꾸로 매달려 머리만 욕탕에 잠긴 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손속이었다·
기운이 다할 때까지 허리를 굽혀 숨을 쉬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살려달라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을지·
죽음의 공포와 끊어질 듯 아픈 몸통 사이에서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아잔덕이 굳이 자세한 사항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어떤 어떤 놈이! 어떻게 누가! 서문청! 또 그년이냐!! 또 그년이지!? 설마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총채주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들 둘에 이어 가장 아끼던 딸자식까지 한 원수에게 당했다고 하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다행히 아잔덕이 그 소망을 들어주었다·
“그 흉수가 흔적을 남겼습니다만·”
흉흉하게 빛나는 총채주의 눈빛을 보고 아잔덕이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 않는 입을 겨우 침을 꿀꺽 삼킨 후에 말을 이었다·
“나는 강시왕 혈교의 언연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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