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3
끼이익 철문을 열고 지상의 햇빛을 맞이하는 청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다·
와· 해가 이렇게 반가울 수 있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연중 이백오십 일이 눈과 비 안개등으로 흐린 장가계지만 그래도 일백 일은 맑다·
오늘이 그러한 모양인지 아니면 워낙에 홀가분한 다시 태어난 듯한 후련한 마음씨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가의 도사다운 솔향 피어나는 기분으로 맑고 그윽한 눈빛과는 달리 전신은 피투성이다·
심지어 허리춤 요대에는 사람 머리카락을 묶어 머리통을 매단 채였다·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이를 불러서 맑은 눈의 광인이라고 한다·
눈깔이 홰까닥 돌아버린 광인보다도 오히려 훨씬 말이 안 통하는 위험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청이 허리춤의 머리를 툭 치며 말한다·
“자기도 햇빛 보니까 좋죠? 내가 봤을 땐 아무리 풍경이 좋아도 매일 안개 끼고 침침하고 그러니까 사람들 인성이 썩는 거야· 곰팡이가 피는 거지· 자· 그러면 이제 승자의 권리를 챙겨 봅시다·”
양산박대는 녹림의 최고 정예 전투부대 그 정예 대원들이라고 들었다·
어쩐지 정예 대원이라고 하니 오히려 뭘 하든 빗나갈 것 같고 이 새끼들은 아마도 젓가락질도 빗나갈 거야 분명히·
어쨌거나· 청은 적장을 무찔렀으므로 그 진채의 재물을 취할 권리를 얻었다·
녹림에서 그나마 무인다운 놈들의 집이라고 하니 좋은 것 좀 나오지 않을까·
혹시나 비급 같은 거라도?
내가 양심적으로 보라색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대충 황금색?
그리고·
“음· 개뿔·”
훌륭하게 개털이다·
청은 산적들을 너무 얕보았다·
이런 단체 숙소에서 제 자리에 귀중품을 보관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믿음’이 필요한 행위인 것이다·
적어도 동료 녹림 식으로는 형제들이 내 방에 들어와 물건을 뒤져 훔쳐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간 대 인간으로 가지는 아주 최소한의 믿음·
하지만 산적 새끼들의 무얼 믿고?
저네들끼리도 못 믿으니 정 귀중한 것이 있으면 꼭 지니고 다니거나 어디 외진 데 묻어놓지 방 안에 놓았다간 언제 누가 쓱 가져가 사라져도 도둑 새끼가 도둑맞았네 하는 비웃음이나 날아오니까·
그런 이유로 청이 무장 해제로 얌전하게 내려놓았던 제 짐에 그냥 잡동사니들이나 조금 더 챙겼을 뿐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무려 화경의 고수를 그것도 무공 없이 순수한 체술로만 때려잡았는데·
심지어 정정당당한 정면 대결로·
아무리 초절정 초월 초절정 초절청 님께서도 쉽지 않았던 위대한 도전 상위 일 푼 아니 일 리 이상의 업적을 깨고서도 얻는 게 없다니·
이게 말이나 돼?
그래서 청이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불로 치유했다·
불멍이라고 하던가?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더러움이나 상처도 같이 타오르는 듯 안온한 기분으로 털어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역시 불 불이야·
더러운 건 다 태워버려야 해·
설가놈 보고 있죠?
나 이렇게 잘 해내고 있어요·
이제 예전에 본 설가놈의 당당한 모습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정신은 내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불로 마음을 치유한 청이 활활 타오르는 양산박을 뒤로하고 청이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멋지게 퇴장한다·
청이 제 허리춤의 대가리를 툭 친다·
“가요 도우삼· 채주한테 돌아가자구요· 몸통은 들면 쏟아질 것 같아서 머리만이지만 그래도 괜찮잖아요? 왜 그 삼국지에서? 관우? 관공 왜 머리만 오셨소? 이야 도우삼 산적에서 관우급으로 거의 궁극 진화 초고속 승진이네· 고맙죠? 감사 인사까지는 필요 없어요· 나도 즐거웠으니까·”
경직으로 굳어가는 도우삼의 머리는 오로지 고통만으로 눈조차 감지 못한 생생한 죽음의 공포가 가득했다·
—-
“으악! 아아악! 란아! 수야! 온아! 아니다! 아니야! 이 애비가 애비가아!”
전막(천막으로 친 임시 건물) 안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괴성이 울려퍼진다·
그에 전막 바깥 그것도 다섯 장 반경에 아무것도 없어 휑한 바깥에서도 그 끄트머리에 번을 서던 산적들이 눈알을 굴린다·
참고로 눈알을 굴리는 행위는 불안함이 표출되는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괜찮은가 이거?”
“저번에 저쪽 금람채에서 번 서던 애들이 갈가리 찢겼다던데·”
“이거 불안해서 계속 산적질 하겠나·”
“남형제 산적질 안 하면 뭐 하려고· 뭐 배운 기술이라도 있고?”
“뭐 낭인이라도····”
“낭인 하느니 산적이 나아· 훨씬 낫지·”
번을 서는 두 산적은 산채 소속이 다르므로 서로의 호칭은 남형제가 된다·
남인 형제라서 남형제다·
물론 둘의 경지가 비슷하기에 남형제다·
하수 놈이 건방지게 남형제 이러면 그냥 개처럼 처맞고 예의를 주입받게 되므로·
한편 산뇌 아잔덕은 고민 중이다·
이거 계속 녹림에서 책사질 하고 있어도 괜찮나?
보고 올릴 때마다 머리통이 깨질랑 말랑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인데·
채주의 셋째딸을 죽이고 본채를 태운 흉수는 혈교의 주구가 아니라 서문청이겠지·
이제는 심증이 거의 구 할 이상이다·
이쯤 되면 심증이 아니라 확신에 가깝다·
왜냐하면 산채가 타오른 요 며칠 동안 원가계 수색에서 서문청을 목격한 놈이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발동한 함정이 복구되지도 않고 있으니·
하지만 어떻게?
애초에 원가계에서 몰래 빠져나갈 방안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도망가지 않고 남아있지?
“그야 녹림에 원한이 있겠지···”
과도할 정도로 잔인한 손속 산채를 불태우는 행위는 어떻고 살성처럼 산적을 마구 죽여대는 일은 어떤가·
그러나 아잔덕은 산뇌였다·
이번 일에 허탕을 치면 슬슬 정신을 놓아가는 총채주가 절대로 곱게 죽이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러니 서문청을 사로잡거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발 빼고 도망치던가·
솔직히 자신 없다·
저 신출귀몰하고 영리한 그래 문제는 저 서문청이란 년이 진짜로 똑똑한 심산귀계가 뛰어난 년이라서 문제다·
청이 아잔덕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헤헤 뭘 그런 말씀을 다 평소에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하면서 아주 뻔뻔한 소리를 지껄였겠지만·
“그런데 도우삼 이 친구는 어디 갔어? 누군 심각해 죽겠는데· 양산박대가 박살이 나도 되겠냐고 꼬드겨 볼까 했더니·”
이제 아잔덕에게 떠오르는 것은 극단적인 유인 전술 정도다·
그게 아니면 갑자기 멍청해져서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나 잡아가세요 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때였다·
“산뇌님! 지금 지금!”
“무슨 일이냐 이 밤중에·”
“서문청! 서문청입니다!”
“뭐가? 산채를 불태운 게 서문청이라고? 무슨 증거라도 나왔어?”
“그게 아니라 서문청이! 서문청이 나타났습니다!”
그에 아잔덕이 눈을 끔벅였다·
뭐? 진짜? 갑자기 나타났다고?
나 잡아가세요 하고?
“어디 어디에 나타났단 말이냐!”
“강 건너편입니다!”
“당장 당장 안내해!”
그리하여 아잔덕이 헐레벌떡 달려갔을 때는 이미 무수한 녹림의 형제들이 강가에 우르르 몰린 상태였다·
깜깜한 밤 삼도천처럼 새까만 물 너머에 청이 있었다·
물론 아잔덕이 청을 보았다는 말은 곧 청을 비추는 광원이 있어 그 눈부신 미모를 반사하여 눈동자에 전달해준다는 뜻이다·
그러니 청을 비추는 불빛이 있었다·
커다란 모닥불 모닥불이라기보다는 거대 화로에 가까운 형상으로 아주 활활 사방을 밝히는 불을 피워놓았으니까·
그리고 거기서 두 장쯤 옆에 작은 모닥불 여럿 피워서 한참 요리를 하는 서문청의 모습이 음? 요리를 한다고?
아잔덕이 제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처음에 봐도 눈을 깜박거리고서 봐도 그리고 눈을 비비고서 재차 확인해 보아도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가져온지 모를 솥에 볶음냄비에 한쪽에는 고기를 꿰어 자글자글 잘 익도록 비스듬이 꽂아놓고 이리저리 솥에 든 탕국 저으랴 고기 돌리랴 냄비 흔들랴 아주 바삐 움직이는 꼴이었다·
그리고 아잔덕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갑자기 멍청해져서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나 잡아가세요 하고 있어도 잡을 방법이 딱히 없구나!
그놈의 강 때문에!
순간 열이 확 뻗친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중인데·
태평하게 산중에 소풍이라도 온 마냥 요리나 하고 앉았으니·
“네년! 서문청!”
“위험합니다!”
아잔덕이 버럭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아잔덕을 곧장 잡아당기니 조금 뒤에 쐐액!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스쳐가는 무언가·
“바 방금 뭐지? 암기인가?”
“돌입니다· 맞으면 굉장히 아프고 재수 없으면 저렇게 됩니다·”
아잔덕을 잡아당긴 양산박대 대원이 한 손을 들어 저쪽에 쓰러진 놈을 가리켰다·
대가리에 떡진 피가 횃불에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돌? 돌을 던진다고? 무슨 비전의 암기술 같은 건가? 내기를 실어서-”
“한 개 막아봤는데 순수하게 세게 던진 돌입니다· 애초에 날붙이도 아니고 돌에다 진기를 실어 던지면 초절정 주제에 몇 개 던지지도 못하고 퍼져버릴 테니까요·”
강폭이 대충 열다섯 장쯤 된다·
강가에 바짝 붙지 않았으니 대충 스무 장 넘는 거리에서 던지는 돌멩이가 무슨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처럼 곧게 뻗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에 맞으면 머리가 터지고 뼈에 맞으면 뼈가 부러지고 살에 맞으면 피멍이 들 위력인 것도 당연하다·
청도 한 개 던져보고는 스스로 감탄했을 정도였다·
와 이거 투수 하면 인류의 최고 기록에서 두 배는 빠르게 던질 수 있겠네 하고·
이 정도면 독수리도 우승시킬 수 있겠는 와 소오름 새삼 미쳤구나·
그렇게 생각해보니 상태창이나 그에 준한 능력을 가진 놈은 절대 운동 경기에 나가서는 안 될 것 같다·
약쟁이보다 훨씬 악질인 아주 천하의 씹새끼잖아·
어쨌거나 감히 신성한 요리 중에 쌍소리를 내뱉은 놈에게 대지의 힘으로 준엄한 경고를 날려주고 나서 청이 다시 요리에 열중했다·
돌이 무서웠는지 더는 소리치는 놈이 없어서 그런데 총채주 없나?
나올때 안 됐어?
그야 총채주에게 알렸다가 머리통이 터질 위기니 너도나도 미루며 차마 알리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리하여 청이 결국 요리를 다 마쳤다·
그리고는 천하제일미의 가장 유력한 후보자가 미래의 선진 문물 먹는 공연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청은 잘 먹는다·
더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심야에 펼쳐지는 요리 먹기 공연이다·
어찌 보면 잔혹하기까지 한 수작이었다·
강 건너편에서 산적들이 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앗 맞다! 거기 혹시 양산박대의 호걸분들이 계시나요? 요리 도구 및 식재료를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먹고 있어요!”
청이 양산박에서 챙겨온 것들이었다·
곡량과 그리고 소금 등등의 조미료며 향신료를 아주 여럿 잘 비축해 두었더라·
다만 고기는 찝찝해서 놔두고 오는 길에 새나 몇 마리 잡았다·
새는 대충 돌멩이 던지면 쉽게 잡을 수 있고 그러면서도 맛을 보장하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라고도 하겠다·
“뭐 뭐라고!?”
아잔덕이 깜짝 놀라 양산박대 대원을 보았다·
나눠주었다고? 설마 양산박대가 서문청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리 말하고 있지 않나? 그래 대주 도우삼이는 어디 갔나? 이런 때에 왜 얼굴을 안 비춰!?”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 거기! 도우삼 찾으시는구나!”
아잔덕이 깜짝 놀랐다·
딱히 목소리를 낮추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거리에서 한 말을 저기서 듣고 대답한다고?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청의 불가사의한 청력에 대해서 더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거기서 찾을 필요 없어요! 여기 저랑 있거든요!”
“뭣이!? 도우삼이 양산박대주가 배신을 했다고!?”
“배신하려고는 했지· 그런데 못 했어요· 왜냐하면 내가 허락해주지 않았거든· 자 여러분! 도우삼입니다! 몸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안타깝게도 머리만 오셨어요!”
청이 제 허리춤에 찬 머리를 끌러 아주 당당하게 들어올렸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어디서 머리통 하나 들고와서 사기를 치려 드느냐! 형님은 화경의 절세고수이시다!”
“하지만 나보다는 약했죠? 자 안 믿기는 모양이신데 자 직접 확인해 보시라!”
청이 머리통을 양손으로 붙들고는 다리 양 무릎 사이로 끌어내렸다가 읏차!
도우삼의 머리통이 하늘 높이높이 커다란 포물선을 그린다·
그에 파라락 멋지게 뛰어오르는 놈이 한 놈 공중에서 멋지게 잡아채는 것이다·
애초에 잡으라고 모양 빠지게 위로 던졌다마는 왜 멋있게 잡는데 치사하게·
“혀 형님! 형님!”
도우삼하고 친한 놈이었는지 곧장 경악에 더해 처절한 형님 소리가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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