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5
왕철군의 눈에서 화륵 불길이 피어난다·
오 뭐지 화나면 커지는 구조인가?
“말은 필요없다 모두-”
“잠깐! 아니 왜 일 대 일 하자는데 자꾸 애먼 사람을 끌어들여? 자신 없지? 질 것 같으니까 부하들 우르르 끌고 오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굳이 불리함을 취하고 유리함을 버리는 이는 없다·
어차피 얼마든지 채워넣을 수 있는 부하 따위 서문청이 칼질 한 번으로 미약한 체력 소모라도 시킬 수 있으면 이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는 자신이 없다·
생포할 자신이·
당장이라도 반으로 갈라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때에 일 대 일로 붙으면 아마 곧장 찢어발기고 말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지금도 최대한 자제심을 이끌어내고 있는 중이 아닌가·
“그렇게 하면 너는 오늘 죽는다· 네년을 사로잡아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내 자식들에게 약속했다· 지켜주지 못한 애비가 약속이라도 지켜야지·”
청의 눈이 번뜩였다·
“와! 이 늙은 새끼 하는 말 좀 보세요! 여러분! 그러니까 자기 복수 한번 재미있게 하겠다고 부하들을 사지로 밀어넣겠다는 소리 아닌가요! 와 너네 이러고도 형님 소리가 나와!? 저게 무슨 형님이야? 늙은 개새끼지!”
그 말을 듣는 녹림의 산적들은 절대 흘려들을 수가 없다·
그 말대로 그냥 죽이면 끝이 아닌가?
지금 생포하려고 이 지랄이 맞지 않나?
잘못해서 칼 날려서 서문청을 죽이기라도 하면 오히려 원수가 될 판 아닌가?
왕철군도 그제야 아차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일 대 일을 나서지 않는 순간 무슨 변명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두렵다? 겁쟁이 새끼야·
이게 이득이니까? 너 이득 얻자고 부하들 죽어가면 그게 형님이냐·
생포하려고? 이렇게 된다·
애초에 대처가 틀렸다·
말꼬리 잡기 전문가에게 아주 긴 꼬리를 내어주었으니 이런 짜증나는 새끼를 상대하는 방법이란 그저 뭐라 하건 ‘너는 계속 짖어라 나는 할 일 하련다’ 무시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애초에 이리 말을 섞어봐야 손해뿐이다·
왕철군이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대꾸할 가치를 못 찾겠군· 전원 도하해 저 맹랑한 년을-”
“잠깐!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자! 나는 억울하다! 이러니까 꼭 내가 그쪽 자식들을 죽인 것 같잖아! 내가 안 죽였거든? 그런데 왜 전제부터 내가 자식들의 원수인데!?”
무슨 말이든 무시하려고 마음을 먹은 왕철군이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말이 날아들었다·
“뭐라? 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네가 내 그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다고?”
“와 진짜· 세상 억울해서· 일단 그 첫째 도련님부터 따져 볼까? 나는 살려준다고 약속했고 약속을 지켰거든? 양쪽 어깨 바스라뜨리고 다리도 부러뜨리고 손가락만 죄다 떼어냈을 뿐 죽이지는 않았거든?”
“너 네년 그걸 말이라고·”
듣는 산적들도 기가 막힌 소리였다·
그러니 그 아비는 어떠랴·
그러거나 말거나 청이 계속 항변했다·
“날 겁간하려던 개새끼한테 치료까지 해 줄 이유는 없잖아? 울고불고 빌면서 살려달라고 진짜 엉엉 울더라고· 기가 막혀서· 녹림 총채주 아들이 제발 살려달라면서 바닥을 기면서 막 애처럼 눈물 콧물 짜는데 진짜 병신도 그런 병신이 없어· 그래서 이 한심한 새끼는 내 칼날도 아깝다 그래서 놔 줬는데 지가 도망가다가 저 혼자 웅덩이에 빠져 죽은 거지·”
화르륵 화르륵· 안광이 타오른다·
“아침에 보니 웅덩이에 처박힌 채로 죽어 있더라· 아 그런데 그거 알아? 아주 배가 임부처럼 툭 튀어나왔어 팔다리가 병신이니까 빠져나가진 못하고 웅덩이에 있는 물을 죄다 마셔서 없애려고 했나 봐· 그렇게 폭우가 퍼붓는데 마신다고 그게 없어지나? 웃기지 않아요? 강물에 빠진 놈이 강물을 죄다 마시겠다고 하는 꼴이잖아·”
총채주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돌연 그 처절한 광경이 눈에 선하다·
사지가 부러진 채로 허우적거리다가 그 상황에서도 살겠다고 살려 달라고 흙탕물을 들이켰을 아들의 모습이었다·
“둘째는 진짜 억울해· 나 걔한테는 솜털 한 올도 건드린 적이 없어· 부하들한테는 자기 죽으라고 앞으로 내몰고는 자기 혼자 헐레벌떡 도망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거거든요? 도대체 얼마나 급하게 도망치고 있었는지 농담 아니라 한 십 장쯤 날아서 바위에 박더라· 이렇게! 빡!”
청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때리니 짜악!! 강 건너편에서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그 애비의 그 새끼 아닌가? 애비도 지금 나 하나 생포하겠다고 부하들 다 죽으라고 사지로 내몰잖아? 누구 보고 배운 비겁한 짓인가 했더니 애비 보고 배운 거였네· 어쨌든 둘째는 진짜 무죄· 첫째야 도의적 책임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둘째는 지가 혼자 쫄아서 도망치다 죽었잖아·”
“죽여버리겠다!”
청이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마저 들어야지! 원시림 아니 그쪽 딸년 말이야·”
뛰처나가기 위해 진각을 밟으려 들린 발이 쿵 맥없이 땅만 짓밟는다·
내 딸 내 딸아·
“그쪽 딸년 시체도 안 봤어? 뱃가죽이랑 등판에 새겨져 있었잖아· 나는 강시왕 혈교의 언연영이다 하고· 그런데 왜 나한테 막 죽였느니 원수니 그래?”
“네년! 네년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안 알려줌· 알고 싶어요? 알고 싶으면 황금 오백 관·”
청이 태연하게 손을 내민다·
“네년! 네년의 짓이구나! 네년이 그걸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끄 끄윽· 네년이 네년이 그랬어!”
“앗 혹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던가? 사람 생으로 회쳐먹던 년에 걸맞은 아주 비참한 죽음이었는데· 살려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으니까· 나중에는 아비를 그렇게 찾지 않았을까? 아빠 살려주세요 아빠 제발! 아빠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그 아빠는 뭐 했어? 너구나! 너가 죽였어! 너가 네 딸을 죽였구나! 이 늙은 새끼야! 니 딸 니가 죽여놓고 왜 나한테 원수를 찾아!”
왕철군의 눈에서 다시 피눈물이 흐른다·
시퍼런 귀화에 보랏빛 원독이 섞이기 시작하니 점차 위험한 색으로 줄줄 흘러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이 계속 입을 털었다·
“정리하자면 그쪽 자식들 죽은 걸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해· 사실 걔네 다 자연사 아닌가? 개새끼가 나쁜 짓 하고 다니다가 죽었으면 응당 천벌을 받아 죽었구나!”
“너 너어!”
“나는 어차피 죽어도 극락왕생이다! 너네 자식하고는 다르게! 살인은 독사 지옥 가는 거 알아? 니 자식들은 죽어서도 고통이야! 산채로 살 파먹히면서 천년만년 비명이나 지르겠지! 정 자식이 그리우면 죽어! 애비도 거기 갈 테니까 죽어서 가족 상봉이 될 거 아냐!”
“죽인다!”
왕철군이 마침내 폭발했다·
한 쌍의 타오르는 귀화가 마구 흔들리며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청도 수상비를 여러 번 도전해 본 입장에서 저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안다·
청에게 왜 수상비를 굳이 여러 번이나 도전해 보았느냐고 하면 그야 물 위를 뛸 수 있다는 데 그걸 어찌 참느냐고 할 것이다·
어쨌거나 수상비는 수면을 발바닥 전체로 강하게 짓밟음과 동시에 박차고 나아가야 하는 아주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그만큼 취약한 순간이라는 뜻이다·
그에 청이 있는 힘껏 손을 뿌렸다·
쐐애액 강맹한 소리와 함께 당겨진 밧줄과 같이 쭈욱 직선으로 날아가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선보인 협객유성탄의 비기다·
그러나 왕철군은 화경의 고수다·
그깟 돌멩이 한 대 맞으면 그만·
왕철군이 눈에 보이도록 선명한 호신강기를 전신에 두르며 몸을 슬며니 비튼다·
그리하여 쐐애액 푹·
어깨 아래로 부드럽게 파고드는 칼날·
땡· 안타깝게도 돌멩이가 아니라 비도 그것도 박히면 안 빠지는 미늘비도랍니다·
호신강기가 뚫릴까 안 뚫릴까 걱정이라 아주 공들여 날을 갈아놓긴 했는데·
호신강기가 문제라구요?
힘이 모자라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세요·
돌멩이로 대가리를 깰 정도의 힘이라면 그보다는 표창이나 비도를 던지는 게 훨씬 아프고 살상력이 높다·
그런데 왜 굳이 돌멩이를 던졌겠는가·
계속 돌멩이만 던지다 보면 계속 돌멩이만 던지는 줄 알 테니까·
청의 노림수가 들어맞았다·
팔뚝에 칼 맞은 왕철군의 시퍼런 안광이 돌면 아래로 푹 꺼진다·
첨벙! 거구가 물에 빠지는 소리·
심장을 노렸는데 몸을 비트는 바람에 팔에 맞았다·
그나마도 반응이 빨라서 빗나갈 뻔한 것을 이 놀라운 수준의 제구력 아니 제도력으로 겨우 맞춰버린 위업이었다·
“맞았어요! 역전 만루! 서문청 사 점!”
누가 들으면 청은 야구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외침이었다·
왜냐하면 야구 모르거든요 야구 몰라요·
나 이 정도면 거인들이라도 우승시킬 수 있지 않을까?
체력 문제도 없으니 어깨 혹사 논란이고 뭐고 단독 선발 다른 선수들 다 치워버리고 전 경기에 나서는 거지·
음 어깨는 쓸수록 강해지니까?
청이 수면을 바라보았다·
화경의 고수가 팔뚝에 비도 하나 박혔다 해서 헤엄도 못 치고 익사하지는 않을 터·
뭔가 노림수가 있나?
가까이 가면 기습할 셈?
그에 청이 죽은 자도 되살린다는 금단의 주술 사자소생의 법문을 외웠다·
“···해치웠나?”
그러자 첨벙! 물보라 튀기며 부활한 눈깔 한 쌍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역시 해치웠나야! 성능 확실하지!
청이 그토록 바라던 일 대 일이다·
월광검을 빼든 청이 의기양양 소리친다·
“자 와라! 내 젊은이의 특권으로 세 수를 양보 해줘! 화경이라며! 초절정한테 양보도 안 해주냐! 쪼잔한 새끼야!”
“닥쳐라! 죽여버리겠다!”
“이전엔 살게 하겠다면서 이번엔 죽인대! 아이고 산적 여러분 보셨죠? 이 새끼가 아주 한 입으로 말을 막 바꿔!”
“죽어엇!”
푹 젖어 꼴은 우습지만 실력은 진짜다·
저 높이높이 날아오른 왕철군이 돌연 팍 칼날 같은 각도로 꺾여 쐐애액! 진짜 유성처럼 청을 향해 발사된다·
뭐야 하늘에서 어떻게?
기겁한 청이 곧장 보법을 밟았다·
여덟 형상으로 나뉘어 뛰고 날고 기고 다양한 청들이 팔방으로 뻗어나가니 그 위로 꽝! 왕철군의 거대 망치가 바닥을 찍는다·
일 장 가까이 치솟는 대지!
그리고 그 뒤편 허바닥을 스치듯 네 발로 기어가던 반투명한 청이 허공에서 스르륵 나타나 투명함을 지우며 등을 돌려 선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곧장 뒤를 돌아 눈을 크게 뜬다·
뭐야 진짜 유성 낙하야? 뭔 구덩이가·
그쪽이 유성탄 해야 아니 내가 유성이 된다! 하는 거니까 유성락인가?
산적유성락?
씹 더럽게 쎌 것 같잖아·
그러나 이미 각오한 바다·
청이 이를 악물었다·
이게 진짜 화경이란 말이지·
화경 초기의 애송이가 아니라 진짜 화경에 제대로 든 무인·
이게 사상? 과학은 어디다 갖다 버렸어?
이러니까 중원의 기초 과학 수준이 아주 개판이지!
현경의 고수들은 진짜 사람같지가 않다·
칼 타고 날고(어검비행) 물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질 않나(등평도수) 광선검 쓰는 우주 시대 무인들처럼 손 뻗어서 막 염력처럼 사람과 사물을 끌어당기기도 한다(격공섭물)·
초절정?
초절정은 별빛을 빚어낸다·
그 사이에 있는 화경은 사실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압축 강기가 훨씬 강력하다는 것?
강환이라는 원거리 공격 수단이 있기는 한데 병기에 두르는 것보다는 못하다·
그러나 정작 초절정과 화경의 싸움은 일류와 초절정만큼이나 큰 격차가 난다·
왜냐하면 화경에서야 비로소 무인은 사상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무학을 정립하고 아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무천대제의 표현으로는 딱 검을 휘두를 줄 아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던가·
이는 곧 세상의 법칙을 자신의 해석으로 비트는 행위다· 개인의 사상 영역을 지상 천하에 무공으로 그려내는 단계·
조화란 만물의 이치 그리고 세상이 마땅히 그러한 이유라는 뜻이다·
한 개인의 무공이 이치에 닿아 천지우주에 당연한 사실로 드러나는 경지·
그렇기에 조화경·
줄여서 화경이라 부르는 것이다·
자신의 무공으로 이치를 세우면 화경·
무공의 이치가 개인을 휘두르면 입마지경 줄여서 입마라고 하며 화경보다 반 단계 아래로 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를 극복하려면 화경보다 훨씬 거대한 깨달음이 필요하고 사상에 보다 더 가까운 무인이 탄생하기에 다음 경지인 탈마지경을 현경보다 반 단계 위로 쳐주기는 하지만·
“으아악! 서문청! 죽여버리겠다!”
피끓는 듯한 외침이 청의 놀라움을 깬다·
청이 지지 않고 대거리를 쳤다·
“왜 반말이야! 오늘 죽게 될 늙은 새끼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님을 보았으면 간청하온데 먼저 귀천하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정중하게 부탁을 하진 못-와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유성처럼 낙하하는 망치머리·
청이 다시 여덟 갈래로 갈라졌다·
능파미보 역시 사상에 닿은 무학이다·
본래라면 청의 경지로는 흉내내기도 어려워야 정상이다·
하지만 청이 무공을 쓰는 방식이 천하의 사기꾼이라서 아주 잘만 쓴다·
콰앙! 다시 대지가 뒤집어진다·
이번에는 허리를 숙이고 양 팔을 뒤로 비스듬히 뻗어서 달리던 청이다·
허공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내 어쩐지 멋진 자세로 망치 박아넣은 왕철군의 등 뒤로 청 역시 등지고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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