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53
고 탕동량 백호의 유언에 따르면 이번 역적 토벌에는 산적 흉내를 내야 하기에 저마다 산적의 복장을 갖춰야 했다는 것이다·
청이 생각하기에는 아니 작전에 필요한 분장을 왜 개인이 직접 챙겨야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사실 고대 원시 미개한 군대라고 하면 본래 자기 물건은 자기가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기는 하다·
어쨌거나 청이 목 꺾인 전문 특제 마초남의 털외투를 빼앗아 입었다·
척 보아도 고급품이기 때문이다·
마초남의 털옷을 빼앗아 입은 청이 킁킁 냄새를 맡아본다·
절간이나 도관에서 날 법한 향내가 솔솔 피어오르니 사이비지만 도사는 도사라고 청의 마음도 조금 편안해진다·
와 향을 아주 잘 먹여놨네·
다만 조금 웃기기는 하다·
세상에 어떤 산적이 이렇게 질 좋은 완웅(너구리) 가죽으로 외투를 해 입고는 향내까지 먹여 놓겠는가·
도대체 산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산적에 대한 환상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심지어 그 정점은 모자다·
담비 가죽으로 만든 모자라면 겨울에 살 수 있는 모자 중에서도 가장 고급으로 치는 물건이 아니던가·
청이 척 뒤집어쓰고 접힌 부분의 끈을 풀어내고 나니 얼굴을 완전히 감싸 눈만 빼꼼히 내민 꼴이다·
그리고 나니 이미 세상 떠난 탕동량 백호의 모자도 여간 고급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겨울철 털모자는 산적 흉내가 아니라도 군사들끼리 서로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이었다·
저 모자도 되게 좋은 거네·
어차피 저승에서 지역난방 따뜻하게 몸 지지다 못해 태우고 있을 텐데 모자까지 뭐 필요한가?
외투도 이것보다는 못하지만 고급품이고·
음 장명이나 갖다줄까?
청이 결국 제 행낭에 탕동량 백호의 외투와 모자까지 항우장사의 힘으로 꾹꾹 말아 알뜰하게 챙겼다·
청이 산적 복장을 하더니만 전문 산적과 같은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시체 대충 낙엽에 파묻어 숨기고 청이 다시 산을 탄다·
위세 좋은 백호지만 이번 역적 토벌에는 말단에 불과하다던가?
말단이 이렇게 좋은 외투에 모자 쓰고 있을 정도라면 그 위에 놈들은 어떻겠어?
이참에 겨울옷 몇 벌 장만해 볼까?
그렇게 해가 저물었다·
청의 외투도 더욱 고급품이 되었고 아예 머리에는 담비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는 백모종 담비 털모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걸친 겨울옷의 단가는 수직으로 상승했지만 정작 별 소득은 없는 상태였다·
역적 잡으러 왔는데 산에서 돌아다니는 수상한 놈을 발견하면 바로 신호를 날려라·
다만 수상한 놈에 대해서는 기이하리만치 정보가 없으니 피부가 흰 서생이라서 보면 한눈에 안다는 말이 전부라나 어쨌더나·
그와는 별개로 동원된 군사의 규모가 심상지 않다·
저마다 다른 장군부 소속이라서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일이백씩 파견된 장군부가 다섯 금의위들을 보았다고도 하고 기분 나쁜 고자 새끼들(진짜 이렇게 말했다)이 돌아다닌다고도 하고·
철강노병은 수색에 동원되지 않고 따로 진지를 차린 상태고 어디 매복 중인지는 참모들이나 안다고 했던가·
금의위라는 소리를 듣고 나니 문득 당가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태상가주 할아버지의 특제 정력제를 먹고 허공에 박아 허리를 흔들어 세상을 범했던 그 가짜 화경 고수가 엄청 단단했는데·
아까 점심쯤에 벌어진 흉사에서도 유난히 단단한 놈들이 있지 않았던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니 새삼 이가 갈린다·
이 개자식들 대체 이 나라에서 관부라는 새끼들은 도대체 얼마나 썩어있는건데?
지금의 천자가 무림인 새끼들 다 죽이겠다고 이를 간다는 소리는 이미 들었다·
공권력이 사설 폭력 집단을 증오하는 거야 뭐 좋다고 치자·
하지만 역적 잡겠다고 지나는 사람들을 다 죽이는 건 도대체 또 무슨 경우인데?
관부의 행사라고 하면 다들 군말 없이 아니 일단 은자는 좀 내밀어 보겠지만 그 다음에도 불가하다고 하면 다들 그러면 왜 은자는 안 돌려주냐고 투덜대면서도 순순히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놈들의 선택은 살인멸구였다·
비겁하게 산적으로 위장까지 해 가면서·
무천대제 그 늙은이가 괜히 황궁 털어서 황제 멱살 잡은 게 아니었구나·
멱살만 잡으니까 그렇지 나 같으면 멱살만 잡을 게 아니라 멱살을 목뼈와 분리해 놨을 텐데·
그야 청은 중원 출신이 아니라서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이다·
그 과격함의 대명사인 무천대제조차 따끔하게 혼쭐이나 내주려고 했을 뿐 천자를 시해한다는 무도하고 끔찍한 대역죄를 범할 생각까지는 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청이 밤을 헤매는 이유이기도 했다·
저네들도 떳떳하지 못하니까 비밀리에 일을 벌이고 있겠지·
당가의 일을 생각해보면 그 단단한 새끼들까지 동원된 일이 보통 일이 아닐 터다·
그러니 모른 척 나몰라라 할 수는 없다·
그건 비겁하고 옳지 못한 일이니까·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거기다 억울하게 죽은 표사들 그리고 분명 그 이전에도 죽어나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도복 입고 다니는 처지에 그 억울한 사람들 위령은 해줘야 할 거 아냐·
청이 마음을 다잡았다·
—-
남령산맥의 겨울은 사실 중원에서 산지치고는 그렇게까지 혹독하다고는 못 한다·
하지만 사천 사람에게는 충분히 혹독한 추위다·
사천의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에도 물이 얼어본 적이 없을 정도이니 오죽하랴·
그리하여 사천 사람 둘이 남령산맥 산자락 어딘가 바위틈에 숨어있으니 겨울 밤에 내리는 추위가 뼈에 사무치는 듯하다·
한 사람은 그냥 춥다·
다만 또 다른 한 사람은 본래가 고수라서 춥지 않았어야 하나 사람이 피부 아래의 근육이 드러나고 피가 새어나오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어쩔 수 없이 추워서 몸을 떨 수밖에는 없다·
“왕야 두고 절 두고 가십시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제발 천녀가 간곡히 청하옵건데-”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한 치고는 주름살이 깊지 않은 노부인이다·
다만 입가에 피가 번지고 안색은 창백하며 눈 아래 검게 그늘이 졌으니 병색이 완연한 꼴이었다·
그에 청년이 콧방귀를 뀐다·
“흥·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이러한 산중에 무엇 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백면서생이 홀로 나아가 무엇을 한단 말이냐?”
“하지만 왕야-”
“다 자네 잘못이네· 이러한 일을 예상하고 진작에 산 타는 법이든 뭐든 살아남는 방법이나 가르쳐 줬어야지· 혼자 세안이라도 할라치면 호들갑을 떨며 물 한 방울도 닿지 못하게 막지 않았나· 그러니 나 혼자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왕야 제발·”
“빨리 낫기나 하게· 호위라도 한 명 든든하게 둬야 빠져나가지 나 혼자 떠나봐야 저 패악무도한 놈들이 아니더라도 산천을 헤매다 죽을 것이 아니더냐· 거 산이라고 하는 것이 만만치가 않은 것이구나·”
“왕야 제발· 북으로만 달려나가시면 됩니다· 천녀가 아직 난동이라도 피워볼 만할 때 아직 쓸모가 있을 때 써 주십시오· 제발 헛되지 죽지 않도록-”
“이 사람아 죽긴 왜 죽나· 죽을 마음이 있거들랑 전력으로 나을 생각을 해야지· 음· 여기 물이나 아· 이런· 비었군·”
“왕야· 천녀의 평생 소원이온데-”
“됐고· 물이나 떠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게나· 그리고 그놈의 소원 좀 그만 쓰게· 뭐만 하면 평생 소원이야· 소원이 그리 많아서야 쯧·”
“왕야 왕야! 위험 위험합니다!”
노부인이 간절히 그러나 적들이 쫙 깔린 통에 차마 목소리를 키우지는 못하고 애절하게 왕야를 부른다·
그러나 왕야께서는 쯧쯧 혀를 차며 바위틈 바깥으로 향할 뿐이었다·
물 뜨러 나온 덕현친왕이 생각보다 훨씬 깜깜한 밤에 함부로 발을 떼지 못했다·
저 아래 작은 시내 시내라기보다는 거의 새는 물줄기에 가까운 시내가 흐르는 것을 올라오며 보았더란다·
그래서 호기롭게 나서기는 했다만 정작 나와 보니 달빛이라도 훤히 드는 바위틈이 밝은 장소였음을 깨달았다·
사실 친왕쯤 되면 자신의 발로 산을 탈 일이 없다·
마차 혹은 가마 아니면 말 그도 안 되면 당연히 하인의 등에 업혀야 하는 귀한 옥체시니까·
그러니 덕현친왕이 깜깜한 밤 길도 없는 비탈을 내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게 무엇이겠는가·
나름 조심조심 발을 디뎌 눌러보며 혹여 미끄럽지는 않나 부서지는 부실한 땅이나 바위는 아닌가 주의를 해 보았지만·
“어엇·”
파사삭!
덕현친왕이 그대로 쭈욱 산비탈을 미끄러지다가 무릎에 그루터기를 꽝 들이받고는 어억 덕분에 몸이 휘어 데굴데굴 구르다가 돌부리에 어깨를 콱 어억 그리고는 삼 척 높이쯤 되는 구릉에서 떨어져 철푸덕·
다행히 그 아래가 물꼴이었다·
층층히 수북하게 쌓인 낙엽에 몸이 폭 파묻히는 선에 그치고 말았지만·
“끄으·”
덕현친왕이 일어서지 못하고 낙엽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무릎은 터진 것만 같고 어깨는 화살이 박힌 관우가 이러한 고통이었을까 싶다·
도저히 일어날 엄두조차 나지 않은 격통에 덕현친왕이 일단은 푹신한 낙엽 사이에 몸을 묻어두고 고통이 가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크윽·”
덕현친왕이 몸을 돌려 대자로 뻗는다·
나뭇잎 사라져 앙상한 가지 사이로 훤히 뜬 반달이 비친다·
새삼 제 처지가 우습고 꼴사납다·
친왕이랍시고 뭐 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물 한 통 떠오기도 못하여 이렇게 꼴사납게 널브러지고 말았구나·
그때였다·
돌연 달을 등지는 그림자가 지더니 제 목에서 싸늘하게 찬 한기가 뻗친다·
쇠붙이 특유의 차가움 목에 칼날이 붙고 나니 두려움이 왈칵 솟아 심장은 쿵 떨어진 이후 쾅쾅 터질 것만 같고 팔다리가 싸늘하게 저려 시큰하니 아리는 기분이다·
“뭐야 이건· 왜 달밤에 굴러다녀? 멀쩡히 발 달린 놈이 좋은 발 놔두고?”
전혀 예상치 못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왓다·
그것도 음색이 참으로 곱고 발음이 분명해 귀에 쏙 파고드는 미성이었다·
“본인은 그 약초 약초꾼이다·”
“약초꾼이다? 약초꾼 치고는 말이 짧다?”
“약초꾼 입니다·”
“내 살다살다 비단옷 차려입은 약초꾼을 다 보네· 그것도 산에서 미련하게 굴러다니는 약초꾼을·”
“크흠 그 그저 금야가 절흑하여 대지를 구분치 못하고 낙상하였을 뿐이다·”
“아니 약초꾼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좀 낼 것이지· 세상에 무슨 약초꾼이 문자를 막 써? 무슨 과거 준비하다가 생활고로 약초꾼으로 전직이라도 했나?”
“어 그렇다· 바로 맞추었구나·”
“말씀이 되게 높으신 분 같으신데요?”
“아니다· 고 아니 여 아니 본인은 높은 사람 아니다· 아닙니다·”
“방금 되게 바보 같은 소리를· 엥· 고? 여?”
아차· 입에 붙다 보니 말실수가 나온다·
사실 목에 칼이 들어와 있으니 말실수가 나오지 않는 편이 용하다고 할 것이다·
여인이 돌연 제 멱살을 틀어쥐나 싶더니 상상지도 못한 우악스러운 힘으로 그대로 대롱대롱 높이 들려버리고 만다·
숨이 턱 막히는 가운데-
돌연 여인이 멱살을 끌어 제 얼굴에다가 코가 닿을 듯이 정확히 말하자면 하관을 감싼 입싸개에 닿을 듯이 딱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어쩐지 익숙한? 본 것 만 같은 수려한 모양의 눈이 팍 찌그러지며 위로 들었다 아래로 내렸다 좌우로 흔들며 얼굴을 골고루 살펴보는 것이다·
멱살을 잡혀 흔들리는 덕현친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역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참으로 고약한 여인이 아니냐·
살피려면 제 눈알을 굴리면 될 것을 왜 남의 몸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살펴본단 말인가·
그러다가 돌연 여인의 눈이 동그래지며-
“엥· 자유? 자유 아니야?”
“자유라니? 네가 어찌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른단 말이더냐·”
자유라는 가명은 즉석에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저를 그리 부르도록 허락한 이는 단 한 명 뿐이었으니·
“서문청이 친구 자네인가?”
“와 자유 맞네· 와 소오름· 뭐야 이런 데서 다 보고· 아니 왜 친왕씩이나 되어가지고는 달밤에 바닥을 막 구르고 있어· 어디 안 다쳤고?”
청이 그제야 자유를 내려놓고 툭툭 몸에 붙은 흙이며 낙엽 따위를 때려준다·
제 엉덩이를 툭툭 때리며 털어주는 손길에 자유가 얼굴을 팍 붉히며 아니 무슨 여인이 이리 허물도 없이 대체 이 무슨 해괴한·
“아· 맞네· 역적이 자유였어?”
“역적이라니· 무도한 소리를 하는구나·”
“말투 좀· 친왕 대접해 드려요?”
그에 자유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야 친구가 무도한 소리를 하니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는 아니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네·”
미소도 잠시 자유가 다급한 표정으로 청을 붙드는 것이다·
“나를 좀 도와주게· 연 파가 크게 다쳤는데 상세가 안 좋은 것 같네· 당장 의원에게 보여야 할 텐데 고가 산중의 사정에는 무지하여· 그러니 부탁하건데 자네가 의원에게 데려다 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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