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54
“연 파?”
청이 연 파에 대해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엄청 표독한 인상의 할머니 며느리한테 물 뿌리고 찻물 뿌리고 밥상 뒤엎고 탕국 뿌리고 빨래 내팽개치고 잿물 뿌릴 것만 같은 인상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능파미보 주셨지·
능파미보는 이미 청의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려준 비기 중의 비기였다·
심지어 뭘 배워와도 ‘그러냐 그럼 제자만 몰래 알고 있으라’ 하시는 사부님조차 이는 제자들이 같이 배워도 되겠느냐 하실 정도의 구명절초였다·
음· 뭐·
연 파가 능파미보 비급 주시면서 얘 느그 문파엔 이거 없지 너 혼자만 알라고는 안 했으니까?
“그래· 지금 몸이 아주 불덩이야· 내 이리 부탁 좀 함세·”
“그럼 일단 내가 좀 보지 뭐· 의원은 내가 의원이야· 어디 가도 돌팔이 소리는 안 듣는댔으니까·”
“의술을 배웠다고? 친구 자네가?”
자유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지만 청이 보기에는 어차피 위에 달린 허연 게 얼굴인 상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가자·”
“아· 그래· 그런데 식수를 뜨러 행차한 참이노라 내 분명 아랫목에서 시내를 발견하지 않았겠느냐·”
“아· 산에서 아무 물이나 목마르다고 막 마시다간 뒈지는 수가 있어· 어떤 물이 마셔도 되는 물인지 모르지?”
그에 자유가 멈칫했다·
“물에 독이라도 흐른단 말이더냐?”
“뭐 비슷한데· 한번 팔팔 끓이면 대개는 괜찮다는 것만 알아두면 대충은 해결이지· 그리고 나한테 물 있으니까·”
“청수와 같이 깨끗해 보였다마는·”
“당연히 눈으로 봐서 더러우면 먹으면 안 되지· 그보다는 연 파는 어디에 있는데?”
“내 저 위쪽 바위틈에 거처를 마련해 두지 않았겠느냐·”
“말투· 몇 마디 더하면 고까지 나오겠네· 내려올 때처럼 굴러서 올라가지는 못하지? 어쩔 수 없이 내가 들어줘야겠네?”
“크흠·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나· 다만 연 파의 상세가 좋지 않으니 이번만은 좀 부탁하지·”
자유 역시 업히고 안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청 만큼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그러니 어서 업으라고 팔을 척 벌리는데 청이 곧장 자유를 들어다가 제 어깨에다가 척 올려놓았다·
“음· 친구· 보통 사람을 이리 들던가·”
“나도 업어주고 싶기는 한데 허리 왼편에 부상을 입어서 그랬다가는 두 걸음 안에 기절할 자신 있어서 그래·”
사람을 등에 업으면 어쩔 수 없이 옆구리에 다리를 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업힌 사람도 업어주는 이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리를 조여 밀착해야 하고·
“친구 다쳤는가?”
“한 보름 됐나? 거기 행낭이나 꽉 붙잡고 있어· 괜히 말하다가 혀 깨물라·”
청이 자유를 들쳐매고 산을 탔다·
사람이 굴러떨어질 만한 골을 타고 올라가니 얼마 안 가서 쩍 갈라진 바위틈이 모습을 드러낸다·
청의 인기척이 워낙에 없으니 바위틈에 들고 나서야 연 파가 뜨악한 표정으로 돌연 왕야를 어깨에 지고 나타난 낯선 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연 파의 눈동자에 혼불이 떠오른다·
꼬리를 가진 세 개의 혼불이 서로를 쫒아 빙글빙글 천하십대마공 중 하나 전륜마겁의 전륜안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낯선 이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영롱한 목소리에 스르륵 자취를 감춰 사라져버리고 만다·
“연 파 안녕하셨어요?”
“음? 어떤 계집이냐?”
“저 서문청이에요· 기억하세요? 일전에 주신 능파미보는 잘 쓰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연 파가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안도가 들고 나니 저 불경한 모습에 또 눈가에 전륜안이 떠오른다·
“어찌 귀하신 옥체를 감히 짐짝처럼 둘러매고 있단 말이냐? 네년은 도리도 모르느냐? 어서 내려드리지 못할까!”
“앗· 네·”
그리고 나니 또 잔소리·
“아니 이 계집아 왕야께서 떨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면 당장에 네가 두른 외투부터 벗어드릴 것이지· 초절정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만 이제 어디 내놓아도 고수로 꼽힐 년이 혼자만 털가죽을 두르고 있어?”
아· 그 생각을 못했네·
내가 안 춥다고 남도 안 춥진 않은데·
“앗· 잠시만요·”
청이 빵빵한 행낭을 풀러 꾹꾹 압축해서 묶어놓은 외투를 꺼냈다·
“자 이거· 털이 안쪽으로 가게 뒤집어서 입어·”
“나보다는 연 파가 급하네· 연 파에게 먼저 입혀주는 게-”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옥체부터 보존하셔야지요· 얘 서문가야 어서 빨리 입혀드려라· 저 혼자 옷도 못 입는 분이시다·”
자유가 청을 보자마자 말하기를 제가 쫒기는 와중에서도 연 파가 위중하니 의원에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작 연 파는 청을 보자마자 따뜻한 털외투 좀 벗어주라면서 자유를 챙겼다·
음· 할아범이랑 의매 보고 싶다····
“괜찮아요· 여기 더 있으니까· 자· 자유는 한 벌 더 껴입고 이번엔 털이 밖으로· 연 파 입을 외투도 충분히 있으니까·”
청이 행낭에서 초압축 포장된 외투들을 턱턱턱 꺼내놓는다·
신녀문에 갖다 놓고 제자들이 물품 구매 등등 어쩌다 나갈 일 생길 때 겨울옷으로 두면 좋겠다 싶어서 챙긴 전리품이었다·
그 꼴을 보는 두 사람은 어리둥절이다·
뭐지? 왜 행낭에서 외투가 왜 계속 나와? 행낭에 다른 짐은 안 들고 외투만 들었나? 하고·
“계집아· 그 신녀문이 많이 어려우냐? 외투 팔러 돌아다니는 게야?”
“엥· 지금 신녀문은 어느 때보다도 부유한데요·”
황후 폐하께서 제사비용으로 인근 토지를 몽땅 불하(국가의 자산을 개인에게 팔아 넘기다)해주시지 않으셨던가·
아주 사심이 가득한 불하였으니 황후도 황족이라 나라 재산 알기를 제 것처럼 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차피 공주에게 보낸 것이므로 소유주는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덕분에 알부자였던 신녀문은 이제 대놓고 왕부자다·
그렇다고 검약 검소한 생활풍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쯧쯧· 내 도사년 같지 않다 싶더라니· 결국 쫓겨났느냐? 고강한 무공 가지고 왜 외투나 팔러 돌아다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왕부에 의탁하려무나·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아씨 외투 장사하는 거 아니거든요? 됐고 상처를 좀 볼게요· 자유는 나가 있어·”
“고가 말인가? 어차피 밤눈이 어두워 뵈는 것도 없는 상태다마는· 내가 옆에서 도울 만한 것이·”
“됐거든? 연 파 속살이라도 구경하게?”
“아· 그렇군· 그래·”
“이년아 세상에 전하께서 자리를 피하시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더냐· 국법이 지엄한데 피하려거든 우리 천것들이 나가야-”
“연 파를 부탁하네·”
자유가 연 파의 잔소리를 끊고 호다닥 바위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연 파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인상만 잔뜩 찌푸린다·
청이 일단 맥도 한 번 짚어보고 와씨 뭐야 아주 불덩어린데·
정정하시길래 괜찮지 않나 싶었더니만·
허벅지에 화살이 한 대 어깨에 한 대 팔뚝에도 한 대· 그리고 크고 작은 자상들이 여럿·
개중에 벌써 진물이 흐르는 상처들도 있으니 담이 껴서 썩기 시작하는 징조였다·
다행히 몸통만은 부지하였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거나 혹은 사경을 헤매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을 터다·
“세상에 안 아프세요? 제정신이기도 힘들 것 같은데·”
“흥· 그럼 전하를 두고 천것이 끙끙 앓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더냐? 그런데 의술을 할 줄 알았느냐? 일전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이후에 배웠어요· 랑중대인이라고 아주 훌륭하신 의원님한테요·”
“그 오지랖 넓다는 떠돌이 의원 말이냐·”
“오지랖이 아니라 존경스럽죠· 혹시 마비산 아니 있었으면 진작에 드셨겠지· 이거라도 좀 물고 계세요· 아플 거예요·”
청이 털목도리 하나를 연 파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퉤·
“일 없다· 지금까지도 참았는데 무슨·”
청도 이제는 어지간한 의술 도구 정도는 갖추고 다니고 귀한 약재를 보는 눈도 생겨서 지나가다 눈에 띄면 챙겨다 놓기도 한다·
혹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서 챙겨두었더니(귀한 약재는 비싸다) 역시 대비해 두면 이렇게 득 볼 일이 생기는 모양이라고·
천하에서 대비라는 말이 가장 안 어울리는 년이 하는 생각이었다·
째고 짜고 뽑고 꿰메고·
환부에 닿을 듯이 얼굴을 들이미는 청을 보며 연 파가 미심쩍다는 듯이 묻는다·
“네년 눈이·”
“충격이 커서 지금 잘 안 보이기는 해요· 그래도 바짝 붙이면 보이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누가 그걸 걱정한다더냐? 이 멧돼지 같은 계집년이 제 몸 소중한 줄 모르고· 어쩌다 눈깔이 병신년이 되었어? 괜찮으냐? 계속 장님 신세야?”
“헤헤 별거 아니고 금방 나아요· 보름?”
말투는 사납지만 결국 제 걱정을 해주는 것이라 청이 헤프게 웃어보였다·
“웃지 마라· 함부로 웃는 것이 아니야·”
“네·”
웃지 말라는데 어떡해·
청이 정색하고 다시 치료에 전념했다·
사실 외상 처치 정도는 의녀가 아니라 오래 해먹은 낭인 정도면 다들 할 줄 안다·
하지만 전문 지식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일단 숨만 붙였다가 나중에 다시 뜯어야 하는 낭인식 치료법과는 달리 여기에 약만 잘 쓰고 오래 돌보면 나을 수 있는 고급의 의술이라고도 하겠다·
그런데 음 약이 없네····
무인에게는 우주의 신비인 기가 있다·
기가 충만하면 어지간한 독성은 다 몰아내고 원기를 회복해 상처에 창이 나는 꼴을 막아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미 쇠화살을 몸 안에 오래 품어서 그것도 세 대나·
펄펄 끓도록 열독이 오른 상태라서 내공은커녕 품은 선천진기까지 상하는 판이다·
이럴 때 영약이 있어야 하는데·
대환단은 이미 먹었고 남은 하나는 신녀문에 비상용으로 두고 왔으니 가진 게·
그러고 나니 문득 스치는 것이 하나·
근데 그거 영약이 맞나?
청이 약함을 꺼내들었다·
녹림 총채주 겸 총순찰 왕철군이 청에게 남긴 유품이었다·
눈꼽만큼 떼어내 먹어 보는 것으로 판단하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녹림 두목이 가지고 있던 것이라서 영 껄끄럽고 찝찝해서 이것도 사람 갈아다 만든 거 아닌가 하고·
하지만 어째·
할머니 숨넘어가게 생겼는데·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청이 손톱으로 밀어 긁어낸 환약을 혀로 훔친다·
곧장 화하니 청량한 진기가 도는 기분이 음 좋은 약인데? 하긴 산적 두목이라고 해도 약은 좋은 거 들고 다니고 싶겠지·
사파 무인이라고 해서 사람 갈아다 만든 영약만 처먹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걔네도 인육단 먹을래 대환단 먹을래 하고 물어보면 죄다 대환단 고를 테니까·
“자 아 하세요·”
“영약이더냐? 그런 게 있으면 이런 천것에게 줄 필요 없이 왕야께 으븝·”
떠드는 연 파의 입속으로 영약이 쏙 들어간다·
청이 입을 턱 틀어막으니 혓바닥이 밀어내며 손바닥을 간지럽히는데 음 더럽게 그냥 좀 드시지·
“자유는 귀한 분이라서 맨날 좋은 거만 먹고 다녔을 텐데 뭘 더 먹어요?”
“으읍·”
“손바닥에 묻힌 것도 싹싹 핥아서 드세요· 원래 세상을 다 가진 거상이라도 뚜껑부터 핥아먹는다고 그러더라·”
“으읍·”
“그리고 영약 하나보다는 내 옆에 있는 초고수가 훨씬 도움이 되지· 먹고 나아야지 뭘 양보해요? 꿀꺽 삼키고 운기하세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연 파의 반항이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내 화살 맞은 허벅지를 용케 오므려 가부좌까지 트는 것이다·
그 서슬에 환부에서도 피가 쭈욱 짜듯이 빠져나왔지만 그 정도는 어쩔 수 없고·
평온해진 표정을 보며 청이 생각했다·
역시 내공은 무적이고 기 치료는 신이네·
아예 눈까지 감고 운기에 들어간 연 파를 보며 청이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왔다·
제 손에다 대고 후후 입김을 불어대던 자유가 청을 보고 다급히 물어온다·
“어떤가? 상세는 좀 어떻고? 괜찮겠나?”
“한 반년? 음 아니지 화경쯤 되시니까 삼 개월? 아니 연세가 있으시니까 반년? 뭐 어쨌든 푹 쉬면 나으실 건데· 문제는 푹 쉴 수가 있냐는 거고·”
“크흠·”
“어떻게 된 건데?”
“남녕의 수시왕부로 가는 길이었네· 돌연 화살이 마차를 뚫고 치밀더니 이후는 나도 잘 모르겠어· 온통 떠밀리고 들려 세상이 어지럽다가 정신을 차리니 연 파 혼자 곁에 누워 죽어가더군·”
“다른 분들은? 그 개 노?”
“견 노·”
그게 그거 아닌가 싶긴 한데 어르신을 두고 개 노인이나 견 노인이라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암행이라 일행이 조촐했다네·”
“그래도 고수를 그만큼 두고·”
“세상에 떠밀려 왕부로 숨어든 이들일세· 함부로 밖에 나다닐 수 없는 사정들을 품고 있는 이들이고· 그나마 극성인 이들까지 내 말리지는 못했다마는· 그런데 지금 곁에는 연 파 하나뿐이로군·”
자유의 목소리가 침통해졌다·
안 보여도 어떤 표정인지 선할 만큼·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