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55
“들어가서 눈 좀 붙여· 피곤하겠네· 일단 체력이라도 비축해둬야지·”
“음· 그도 그렇군·”
자유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청이 할 말이 없어졌다·
너가 자야 체력이 쌓이고 그래야 발목 잡는 일도 없고 뭐라도 하지 않겠느냐 설득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이렇게 순순히 그렇군 할 줄은 몰랐으니까·
돌틈 안으로 들어가니 연 파는 운기조식 삼매경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열 개쯤으로 번져서 겹친 얼굴이라도 이전보다 훨씬 사람 혈색을 띤 꼴이다·
방해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 누운 자유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묻는다·
“보통 불침번 같은 것을 서지 않더냐?”
“차례 오면 깨워줄 테니 일단 자·”
“알겠노라·”
알겠노라는 무슨·
청이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자유가 곧장 쌕쌕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귀한 몸이라고 맨날 고급 침상에서나 잤을 텐데 낙엽이 푹신하다 한들 야지에서 쉬이 잠드는 것을 보니 얼마나 피곤했던가 싶기도 하고·
하긴 털가죽 풍성한 외투를 두 장이나 껴입었으니 뭐 푹신하기는 하겠다마는·
청이 돌틈 바깥으로 나와 바닥에 누웠다·
어차피 번을 설 것 같으면 굳이 불편하게 앉거나 서 있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조는 사람이 흔히 하는 변명이다·
달밤이 참 밝다·
그런데 저게 보름달이여 뭐여 보름달이 뜰 시기는 아닌 것 같으니까 보름달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막 장가계를 떠날 때는 거의 눈뜬장님 수준으로 죄다 짓뭉개져 보이던 것을 생각하면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그런데 이게 맞나?
원래 눈이란 게 상하면 끝 아닌가?
다친 이후로부터 눈알이 간질간질한 것이 낫는 기분이 들었으니 애초부터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마교 때 허리 신경이 나갔던 때와 같은 그 간질간질한 특유의 느낌 ‘신체 주인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신경은 열심히 낫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하는 특유의 신호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원래 눈도 낫던가?
하지만 눈이 나을 것 같으면 굳이 안경을 쓰고 눈알을 깎거나 막을 붙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한국사 공부할 시간에 의학서나 읽을 걸 그랬어요·
원래 자연치유가 되는 부상일까 아니면 체질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건강 능력치가 높아서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체력 막대나 부상 수치 같은 게 있어서 점점 차오르는 걸까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겨도 좋은 걸까?
하지만 악의에는 이유가 없어도 선의에는 치러야 할 가격표가 따르는 법인데·
청이 반짝거리는 임무 창을 열어본다·
예전에 그 뭐였지 황룡투쟁 아마 거기에 연관된 임무가 아닐까 추측을 해 본다·
글자가 번져 읽을 수가 없기에 추측이다·
그래도 친구가 관련이 된 임무인데 좀 읽어볼까 싶어도 고개를 밀면 도망가고 당기면 따라오며 거리를 유지할 뿐이라서 읽을 수가 없다·
뭐야 이런 데서 편의기능이 엉망이네·
눈 멀면 어쩌려고? 읽어주기라도 하나?
아니면 눈깔이 터져도 시간이 지나면 뭐 막 새로운 눈알이 돋아나고 그런 걸까·
수학 문제도 아니고 궁리한다고 해서 답과 풀이가 나오는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그리고 청은 수학 문제도 못 푼다·
진작에 수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청이 답 없는 문제를 떠올리며 점점 속만 상하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거리는 발소리·
자유라면 부스럭이 아니라 거의 낙엽들을 차는 수준으로 파사사삭 난리를 치며 걷기 때문에 자유는 아니고·
그렇다면야 한 명 뿐이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계집년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천것들처럼 대자로 뻗어있길래 번을 선다더니 잠이나 퍼질러 자는 줄 알았더니?”
“어차피 잘 보이지도 않는걸요· 귀로는 열심히 집중하고 있어요·”
“음 그래· 그래야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태만을 부린단 말이냐· 그래서는 안 되지· 암· 안 되고 말고· 그래· 안 되지·”
계속 안 된다는 말만 중언부언 계속하는 연 파였다·
그에 청이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고맙기는요· 기왕에 배운 의술 놀리기도 뭐하고 안 쓰면 녹슬까 봐서 한 일인데·”
고맙다는 말이 하기 힘들어서 빙빙 돌리고 있으니 표독한 시어머니처럼 생기셔서 이래서 관상은 과학이라고 하나?
하기야· 중원 역사만큼 쌓인 표본들의 집합이니까·
“커흠· 계집이 눈치만 빨라가지고는· 뭐 그 하나는 아주 마음에 차는구나· 좋구나· 계집은 눈치가 빨라야 해·”
그리고는 픽 웃는 소리·
“그래· 인연은 인연인가 보구나· 계집이 되어서는 천한 것들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기에 도저히 못 써먹을 년이 아닌가 싶었더니·”
“뭐예요 사내는 천방지축으로 날뛰어도 되는 거구요?”
“어차피 사내놈들이 타고난 귀천에서 벗어날 수 있다더냐? 그냥 영원히 천것으로 천한 성씨나 남겨줄 것들이니 천것이 천것처럼 천한 것이 뭐 흠결이 되겠느냐· 다만 계집들은 아니지·”
사내들은 대대로 계속 천하지만 여인은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청의 고향에서는 전문 용어로 취집이라고도 했다·
그에 청이 긴가민가했다·
이건 어느 쪽이지? 사부님이 아시면 노발대발하실 소리인가 아닌가·
“특히 너는 더욱이 그러한 몸이 아니냐· 항상 염두에 두고 몸가짐을 정갈히 우아한 귀부인처럼 행동하지 못하겠느냐·”
언제나 정갈하게· 우아하고 아름답게· 강호의 여류 고수로서 품위를 지켜라·
항상 사부님이 하시던 말씀이다···만·
생각해보니 요즘엔 안 그러시네?
포기하셨나?
어쨌거나 청이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왜 저만 더 그러한데요?”
“그야 크흠· 아니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느냐! 계집이 눈치가 이리 없어서 대체 어디다 쓴단 말이냐· 쯧쯧·”
“방금 전에는 좋다고 하셨으면서···”
“흥· 그래· 네깟 것이 감히 왕야의 친우를 자처하지 않더냐· 본래 사람의 됨됨이를 볼 때 그 친우를 보라 하였으니 네가 그리 천방지축이면 왕야께서도 욕되는 일이 아니더냐·”
“음 노력해 볼게요·”
그에 연 파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라도 그리하니 밉지는 않구나·”
그러고는 그제야 본론을 꺼내 든다·
“너는 왕야를 모시고 떠나거라· 늙은 년이 최대한 난장을 피워댈 것이니 네게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털끝 하나 상하지 않으시도록 엄중히 모셔야 할 것이야·”
“그건 자유 의견도 들어봐야겠는데요·”
“쯧· 어른이 말하면 들어야지·”
그에 청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남겨드리고 가 봐야 자유 속이나 더 상하지· 아직 뭐 제대로 해 본 것도 없는데 벌써 버리고 가라에요?”
“귀하신 분을 모시면서 내 진작에 각오했던 일이다· 천것이 응당 해야 할 일이고·”
그에 청의 표정이 팍 찌그러진다·
“아니 왜 자꾸 천하니 귀하니· 무슨 왕후장상 핏줄에는 피가 아니라 금맥이라도 박혔어요?”
“하· 아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당연히 금과 지푸라기를 보면 천하의 누구라도 무엇이 더 귀한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역적이나 할 소리가 아니냐? 천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천한 소리나 하는구나·”
“당장 불 피워야 할 일 생기면 황금이 수천 관이라도 뭐해요· 당장 불씨 붙일 지푸라기가 더 귀하지· 그리고 그런 식이면 나도 핏줄에 금줄기 흐르거든요? 나도 공주님 하려면 공주님 할 수 있거든요?”
“하 아주 역적질 하겠다고 동네방네 다 알리고 다니지 그러냐?”
“지금도 뭐 군사 잡고 다니는 게 역적질 아닌가·”
그에 연 파의 이마에 힘줄이 볼록·
그리고 뒷목이 얼얼한 것이 더 말을 섞다가는 울화통이 터지게 생겼다고·
그러나 이어진 말에 한숨이나 푹 내쉬고 만다·
“어쨌든 자유한테는 황금보다 연 파가 더 귀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말씀 하지도 마요·”
“계집년이 순진해 빠져서는· 아직 세상물이 덜 든 게야·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여기서 세상물이 더 들었다가는 천하의 살성이 탄생하게 생겼지만·
하지만 연 파는 몰랐다·
그냥 계집이 독하지 못하고 무르구나 왕야의 옆자리를 지키려면 더 독심을 품어야 할 텐데·
허나 한편으로는 기껍기도 하고· 왕야 곁에 어울리는 계집이기는 하다면서·
주문도 하기 전에 밑반찬을 배가 터지도록 처먹는 꼴이었다·
청의 고향에서는 김치국을 처마신다고도 한다·
“어쨌거나요· 음 저 놈들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아는 거 있어요? 몇 놈 잡아다가 물어봤는데 다 소속이 달라· 그거 합치면 일천이 넘어가던데요·”
“철강노들이 몰려온 꼴은 알겠다· 세상에 북방군을 빼어 여기까지 들일 정도면 대체 북녘을 누가 지키고 있단 말인지·”
그에 청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혹시 다른 분들은요?”
“금의위에 동창에 온통 진을 쳐 놓고는 사방에서 철시가 쏟아지더구나· 이 늙은이는 그래도 재간이라도 있어 이리 숨이 붙어있지 다른 놈들은 아마 다 뒈졌을 게야· 그래 뭔가 뾰족한 방도라도 있느냐?”
“아직은요· 일단 며칠 상황이나 좀 두고 봐요· 연 파도 사나흘이면 운신하기 편하실 테고· 제가 봤을 때 군기도 엉망이고 수색도 대강대강 딱히 열중하는 꼴도 아니더라구요· 내일은 몰래 뒤를 따라볼까 해요·”
“내 두고는 보겠다마는 네년 하는 꼴이 정 불안하다 싶으면 당장 소리를 지르며 날뛸 것이야· 온 사방에서 몰려올 것 같으면 네년도 왕야를 모시고 도망치겠지·”
“무슨 협박이 그런 식이에요?”
여차하면 내가 시선을 끌고 죽겠다니·
이래서야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늙은이나 다름없는 꼴이다·
청의 표정을 본 연 파가 끌끌 다 죽어가는 늙은이처럼 웃더니마는 제 품에서 또 비급 한 권을 꺼내 내미는 것이다·
“아· 그래· 이것도 받거라·”
청은 손으로 받아들어서 알았다·
무공창이 새 예비 무공을 알리면서 크게 번진 불빛으로 깜빡거렸으니까·
청이 비급을 제 코에 닿을 듯이 갖다대어 한 글자 한 글자 어렵사리 읽어내린다·
“전 륜 마 겁· 엥· 이거 천하십대마공 아니에요?”
“귀천이 왜 중요한 줄 아느냐? 천한 년이 익히면 천하의 악독한 마공이요 귀하신 분이 익히시면 신묘한 신공으로 둔갑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 살지 모르는 늙은이 말고 네가 갖고 있다가 익히건 말건 하거라·”
“마공이 그래서 마공은 아니지 않아요?”
“도가의 무공으로 초절정에 이른 계집이라면 이미 마음 수양이 되어 있지 않느냐? 인제 와서 마공 하나 배운다고 그 심상에 잡아먹히기야 할까· 악독하기는 해도 세상에 그만한 강기공이 얼마 없다· 그리고 내 말하지 않았느냐· 귀해질 계집은 마공 좀 익혀도 돼·”
강기공·
본격적으로 강기를 다루는 무공들이다·
아예 강기의 성질을 바꾸거나 혹은 그 외 기상천외한 방식들로 강기를 운용하는 독특한 기예들을 강기공이라고 불렀다·
청이 익힌 강기공이라고 하면 손끝에서 강기의 광선을 발사하는 천마광선 천마지가 있겠다·
뭐지 넌 내게 마공을 줬어?
이건 무슨 의미지?
그야 당연히 할망구가 죽을 생각이 가득하다는 거지·
죽음을 앞둔 이가 하는 물품 정리·
그러니까 대충 이런 뜻이었다·
사태가 정 다급하게 흘러가면 노인네를 버리고 가 달라고·
그래서 청이 비급을 받아들었다·
정 안 되면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이다·
청도 무림인으로서 마냥 희망찬 이야기들처럼 악으로 깡으로 근성으로 도전한다고 해서 다 해결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귀해질 계집은 또 뭐야?
그에 연 파가 미소를 짓는다·
“그래· 그러고 보니 능파미보도 네게 주었었지· 어떻더냐· 아주 엉망진창인 무공이 아니더냐?”
“음· 좀 그렇기는 해요·”
청이 항상 적을 등지고 나타나는 아주 도주에만 쓸모가 있다는 뜻에서 그리 대답했다·
그러나 연 파는 다른 대답으로 알아들은 모양·
“도대체 사람이 익히라고 만든 무공같지 않지· 익히지도 못할 비급 한 권 때문에 그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러니 항상 조심하거라·”
“엥· 원래 못 익히는 거예요?”
“흥· 왜 익히기라도 했느냐? 흉내 비슷하게라도 낼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연 파의 말이 뚝 멈추었다·
누워있던 청의 신형이 여덟 가지 방법으로 몸을 일으키며 제각기 팔방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으니까·
“음· 왜 적을 등지고 나타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돼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연 파가 눈을 비볐다·
내가 뭘 본 거지?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