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58
몇 달 전 각 군에서 쓸모없는 숙련병을 차출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사령관들은 옳다구나 하고 폐급들을 잘 모아서 보냈다·
쓸모없는 숙련병이 무슨 소리인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군사들의 월봉도 아주 조금씩은 오른다·
쥐꼬리만한 월봉이기는 하나 매 년차마다 조금은 오르기는 한다·
문제는 월봉이 오른 값을 하냐는 것이다·
병사들이 가장 충성스럽고 말을 잘 듣는 때는 의외로 일 년 차 신병일 때다·
점점 머리가 굵으면 작업을 시켜도 슬슬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고 혼자만 빠지면 될 것을 제가 이끄는 십호 전체를 빼려고 아주 온갖 수작을 부린다·
연차가 쌓인다고 북방의 ‘진짜 군대’처럼 숙련병이 되는 것도 아니니 데리고 있어봐야 손해만 나는 명령 알기를 우습게 알고 그걸 요령으로 전수하는 폐기물들이다·
그래서 천호소 어사들 사이에서는 은밀한 거래로 이러한 폐기물들을 지운다·
서로 폐기물 죽여주기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군사가 작전 중에 죽으면 위로금을 장부에 편성할 수도 있다·
유가족에게 전달되지 않는 위로금이기에 폐기물 처리는 경제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상황을 상부라고 모를까·
무려 친왕을 시해하는 작전이다·
성공하면 입을 막고 실패하면 처형이다·
그러니 화공이다·
어차피 죽일 놈들이니 태워버려도 아깝지도 않다·
귀찮게 하나하나 처형할 필요도 없으니 편리하다·
그렇다고 나라의 군대가 모두 이렇지는 않았다·
방화지대 바깥에는 진짜 군대가 있다·
북방군!
북방에서 오랑캐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 실전으로 단련된 강병들·
제대로 된 무공을 하사받고 충분한 녹봉과 막대한 보급 거기에 자식들의 출세에 커다란 가점까지 받아 충성심도 투철하다·
중원에서 정예하다고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군사들이다·
이런 군사들은 애초에 취급부터 귀하다·
그러니 방화지대 불이 번지지 못하도록 나무와 낙엽등을 싹 치우고 땅을 갈아엎은 맨땅 뒤에는· 화공에 타서는 안 되는 진짜배기 군대가 매복중이다·
굳이 화공을 쓰는 것이 아니다·
수색 섬멸 작전?
군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어서 어떻게든 피하고 숨고 넘기려는 폐기물들을 데리고 무슨 수색 섬멸인가·
그대로 뻥 뚫려버릴 터이니 이는 적을 놓아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북방군을 투입하기엔 숫자가 모자라고 혹여 잃으면 후환이 있을 수 있는 나라의 귀한 자산(이게 중요하다)들이다·
그런데 불을 붙이면 얼마나 편해·
폐기물들과 함께 타죽으면 그것도 좋다·
살더라도 삼면에 불을 붙이면 어차피 한 면으로 튀어나올 터 제대로 진을 친 정예병들이 처치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어슬렁어슬렁 순찰 흉내나 내며 산을 수색하는 방화선 내에 군사들은 일종의 봉화나 효시 비슷한 역할이다·
만약 안에서 혈사가 일어난다?
어떤 이유로든 놓친 호위와 합류했건 다친 늙은이가 죽음을 각오한 사투를 벌였건 간에 사냥감이 그만한 전력을 갖췄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방화선 작업이 어떻건 간에 일단 불을 지피면 된다·
어차피 불이 번져도 뭐 천한 것들 조금 타 죽는 것이 대수겠는가?
계두 투구를 쓴 사내가 웃었다·
“화공을 개시하게· 지금 편서풍이지?”
“그 풍수사가 말하기로는 북풍이나 남동풍이 불 수도 있다고·”
편서풍이 불면 날이 따뜻해진다·
그렇게 온도가 오르면 둘 중 하나다·
북해에서 찬 바람이 남하하거나 드물기는 해도 남해에서 더 뜨거운 바람이 북상할 때가 있다·
그에 계두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동남풍이라니 크큭· 그 풍수사 성씨가 혹시 제갈이라더냐?”
대놓고 비웃음이었다·
사실 원시 고대 미개 중원의 일기 예보란 그저 경험으로 쌓인 통계의 집합이기에 적중률이 그리 높지 않다·
(청의 고향도 마찬가지지만 그 자료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막대하고 연산도 빼어난 기물들이 대신 한다·)
“나흘 아니 사흘만 말미를 더 주시면-”
군부의 장군이 간곡히 애원하는 말을 계두 사내가 딱 자른다·
“지금 해·”
“허나 불이 번지면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저희는 황상의 백성들을 수호하는-”
“이놈!”
퍽 계두 사내의 수장이 장군의 머리를 후려친다·
내공을 담은 일격에 투구가 하늘을 날고 장군이 비틀거리다 겨우 중심을 잡는다·
“하 멍청한 새끼· 너희는 황상의 군대고 황상의 백성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장 존귀한 황실을 황실만을 수호하는 것이다· 이봐 자성이· 자네·”
“예 대감·”
“당장 저기에 역적이 있어· 그렇다면 군대가 무얼 해야 하지?”
“···추살해야 합니다·”
“흥· 이리 마음이 여려서야 군재가 뛰어나다 해서 기대했더니 큰 인물은 못 되겠군· 출신이 천해서 그러한가?”
장군이 이를 악물었다·
큰 인물은 못 되겠다는 말은 네 진급은 여기서 끝이라는 선언이었다·
“가서 태우게· 역적이 도시에 숨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겨· 도시를 태울 일은 없었으니까 말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
대자로 누워 귀를 기울이던 청이 문득 하늘 끝에 일렁이는 붉은 광채를 보았다·
청은 당혹스러웠다·
뭐지? 여명? 내가 혹시 졸았나?
근데 왜 서쪽에서 여명이 일어?
해가 진짜 서쪽에서 뜨는 건가?
고대 원시 미개 중원이라 가끔 날 잡아서 해가 서쪽으로 뜨는 행사가 있는 건가?
바람을 말할 때 서풍이라 하면 서쪽으로 흐르는 바람이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뜻한다·
그러니 편서풍이 부는 겨울 화공을 쓴다고 하면 당연히 서쪽에 먼저 불을 붙인다·
화광충천이라는 말이 있다·
불빛이 하늘을 찌른다는 말로 큰 불 혹은 그러한 기세를 말한다·
청이 눈살을 찌푸려 초점을 잡으려 노력하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이치인가 혹시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극광(오로라)인가?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 불났네· 산불·
음? 잘 된 거 아닌가?
어디 동굴 같은 데 숨거나 땅이라도 아주 깊숙이 파고 숨어버리면·
청의 출신이 출신이라 하는 생각이었다·
청의 고향에서는 사람들이 산과 숲을 끼고 살지 않기 때문에 산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재난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산불에 휘말리면 뜨거운 공기에 일단 폐부가 상한다·
이 열풍은 펄펄 끓는 기름보다 두 배 이상은 뜨거운 것이라서 숨 한 번 들이키면 기도부터 허파까지 순식간에 익어버린다·
그런가 하면 번지는 속도도 바람에 따라 다르지만 달리는 말의 속도와 같거나 혹은 강풍이 불면 두 배 이상 빠르다·
중원인들은 이러한 산불의 무서움을 알아 마귀의 소행이라고 화마라 부르는 것이다·
동굴에 숨으면 청이 아니라 통 청 찜이 되어 발견될 터고 깊은 동굴이라 해도 숨을 쉴 공기가 모자라 물 밖에서 익사한다·
땅을 파도 숨어들어도 마찬가지 북경오리가 아니라 북경청이 될 뿐이다·
“연 파? 지금 산불이 난 것 같은데요·”
“뭣이야!? 당장 당장 도망쳐야 한다! 왕야 왕야 일어나셔야 합니다!”
연 파가 희게 질려서는 왕야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끔찍하게 아끼는 친왕의 옥체를 마구 흔들어대는 꼴만 보아도 얼마나 다급하여 크게 당황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연 파?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무슨 소리냐! 화마다 화마가 밀려들고 있지 않느냐!”
“아직 멀리-”
“이 모자란 계집 같으니! 화마는 준마의 습보(전력질주)보다 빠르게 닥쳐오는 것이다! 순식간에 덮쳐온단 말이다! 왕야 당장 수레에 오르십시오!”
청이 군사의 임시 진지를 털다가 가져온 작은 짐수레였다·
옆구리 때문에 사람을 업지는 못한다·
업힌 사람이 놀라 다리를 움츠리는 순간 청이 격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구를 테니까·
청의 속도로 내달리다 구르면 업힌 이는 최소한 경상 심하면 중상이다·
앞으로 안으면 양손이 묶이고 어깨에 들면 격렬한 동작이 안 된다·
어깨로 둘러멘 이의 내장을 파괴하는 특이한 형태의 철산고가 될 테니까·
심지어 짐짝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청이 멀쩡하다면 하나는 등에 하나는 앞에 둘둘 포대기 감아서 돌파했겠지만·
그러다 짐수레를 보았다·
청의 고향에서 폐지를 모으시는 분들이 끄는 딱 그 크기 정도의 작은 짐수레였다·
청이 보고는 그럼 저기다가 짐짝들 실어놓고 내가 끌면 되겠다고·
“서두르지 말고 잘 묶어요 튕겨 나갈 수도 있으니까· 자유도 최대한 몸을 낮추고·”
“어찌 그리 태평해!”
“급하면 될 일도 안 되지 않겠어요?”
청이 그리 말하며 마구를 들어 제 가슴 위 겨드랑이 아래에 끼워 조였다·
음 도중에 장애물이 커서 아래로 내려가 옆구리 조일 일은 없겠네·
그런데 좀 그렇긴 해·
인간 말 내가 말이 된다? 좋은 말 두고· 왕궁둥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말 말고기 말고기 육회 먹고 싶다····
“자 어서 가자꾸나! 서둘러!”
“꽉 잡아요! 위쪽에 우마차로까지는 많이 흔들릴 테니까·”
그리하여 청이 달려나갔다·
사람 둘 태워놓고 짐수레를 끄는 여인이라 하면 저자에 약장수도 뜨악하여 시선을 떼지 못할 차력 행사다·
그것도 울퉁불퉁한 산비탈을 콱콱 치달아 오르는 그 꼴로 산을 타고 오르는 것이다·
세인들이 보았다면 진짜 항우장사가 되는 약이라면서 금자를 아끼지 않고 사려고 들었을 것이다·
닥치고 내 돈이나 받아! 하고·
—-
중원의 일기 예보 수준은 형편없다·
비가 내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정확한 확률이요? 요즘에 비가 통 내리지 않았으니 아마도 제법 높지 않겠어요?
아니면 말고· 하늘의 뜻을 인간이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그러니 풍수사들은 최대한 넓은 범위로 예측한다·
지금은 편서풍이지만 북풍이 불 수도 있고 동남풍이 불 수도 있고 그러면 비가 올 수도 있고 날이 춥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눈이 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해도 정답 하나는 맞추게 되는 셈이니까·
풍수사들이 책임을 피하는 법이었다·
물론 이런 얄팍한 수작질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가뭄이나 큰 태풍 따위로 피해가 나면 먼저 풍수사들이 매달리기는 하지만·
다만 풍수사는 상상력을 더 발휘했어야 했다·
편서풍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밤이 깊어가며 편서풍이 돌연 휘이이잉 매서운 소리를 내니 숲을 뒤흔드는 광풍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바람이 강하면 불씨는 더 빠르게 그리고 멀리까지 번진다·
그리하여 점점이 불똥 달고 화기를 품은 낙엽들이 마구 휘몰아치다가 사람이 알량한 힘으로 뒤집어놓은 십 장 너비의 황무지를 아주 손쉽게 뛰어넘었다·
풍수사가 취약하니 이십 장은 파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래도 나름 용하다고 소문난 풍수사였던 것이다·
불이 피어오른다·
거대한 화마가 탐욕스럽게 내달린다·
—-
텅 터텅! 쾅!
인력으로 끄는 수레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산을 오른다·
수레는 굴러가기보다는 날아간다는 말이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바퀴가 땅에 붙어있는 때보다 허공에 뜬 시간이 훨씬 많았으니까·
대략 일 대 구 정도의 비율이었으니 이 정도면 그냥 수레가 비행 중이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중원 최초의 비행 수레를 탄 노소는 그 거친 승차감에 아주 죽을 맛이다·
자유는 멀쩡하지만 무공을 모르고 연 파는 고수지만 몸에 구멍이 여럿이고 찢겨서 꿰인 상처가 전신이다·
그러니 수레에 모로 여럿 걸어둔 안전줄을 붙잡고 튕겨나가지 않는 선에서 이리저리 쿵쿵 튕겨다닐 수밖에는·
그래도 외투가 세 겹에 모자도 세 개를 써서 찧고 부딪쳐도 버틸 만은 하다·
청도 수레 안쪽에서 우당탕탕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짐짝들의 움직임을 느낀다·
“조금만 참아요! 저 위에 가도까지만!”
그러다 왼쪽 바퀴가 큰 돌부리를 밟고 위로 붕 떠오르니 수레가 옆으로 벌떡 일어난다·
청이 이를 악물며 왼손을 들어 짐말 지지대를 붙들고 아래로 쑤욱! 갈비뼈가 으악! 옆구리의 근육 세 자매가 으악으각아각! 그 아래 골반이 기지는 산속에 있다! 차라리 죽여라! 으아아악!
순간 왼쪽 다리에 힘이 쫙 풀린다·
어쩔 수 없는 생리 반응·
청이 이를 악물며 오른발을 콱 밟아 깡깡이 발로 하나 둘 셋 넷 다섯·
“끄으···”
눈앞이 흐린 것이 시력 때문이 아니다·
격통에 저도 모르게 차오른 눈물에 앞이 흐리다·
하지만 흐리나 마나 잘 안 보이기는 매한가지라 별 문제는 아니다·
그리하여 작은 능선 하나만 넘으면 길이 적어도 수레가 흔들리지는 않는 가도가-
“도망 도망쳐!”
“불길이 번진다! 빨리 도망쳐!”
능선을 넘자마자 도로에 우르르 내달리고 있는 산적 떼거리 수상하게 고급 털옷을 입은 산적 호소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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