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4
“장군님 대순 파견대 일백인 전부 모였고 나머지는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장군이 인상을 쓴다·
“일백? 내 서른이라 하지 않았나?”
“너도나도 남겠다며 싸움이 날 판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우들끼리 주먹질을 할 수도 없잖습니까·”
“하 멍청한 놈들·”
“죽을 자리에 나서는 것도 아니고 장군님 모시다 조금 늦게 돌아가겠다는 정성을 어찌 말립니까?”
죽을 자리·
그 말에 장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애초에 저런 산불 속에서 누가 살아남는다고 목숨까지 걸고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피 같은 부하들 목숨 일백이 함께 걸린 판이라면야·
“죽을 자리가 아니다· 그래 이런 데에서 산불 번지는 꼴이나 지켜보다 화마에 휩쓸리면 그만한 개죽음이 또 어디에 있나· 북방을 수호하는 북부군이 의미없이 죽어서야 그야말로 불충이라고 하겠지·”
황명이란 있는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황명을 헤아리려 들다간 어느 순간 충정은 편리로 둔갑하여 제 편한 대로 사용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명이 불구덩이에 뛰어들라는 자진 명령이라 해도 그대로 수행해야 한다·
그러니 이 장군이 지금 하는 소리가 바로 이러한 황명을 어기는 일이었다·
“금의위 놈들은?”
“제일 먼저 튀었습니다·”
“마지막 철수조가 떠나면 우리도 이 각 후에 출발한다· 불길이 올 때까지 지켜보라 했으니 그 정도면 올 때까지 충분히 봤다 할 정도가 아니냐?”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의복을 적셔 봐야 괜히 방해만 되겠군요?”
“그래· 무장도 제대로 갖추도록 복귀 길에 도적이라도 만날지 모르니까·”
“도적 도적이로군요· 알겠습니다· 충!”
예정보다 현저히 빠른 철수가 들키기라도 하면 아예 입막음을 하겠다는 소리다·
척하면 척이라고 곧장 알아들은 부관이 착 절도 있게 군례를 올렸다·
—-
위사들이 속바지 하나 입고 저마다 찻물 마시며 몸을 덥힌다·
막석은 그 꼴이 보기 싫었던 모양인지 꽝! 심술궂게 애꿎은 벽면을 부수고는 바로 옆집의 벽면을 타고 꺾어 사라져 버린다·
위사들은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찬 공기 들어온다고 문도 닫아놓은 판에 벽면에 구멍을 뻥 뚫어놓고는 자기는 또 그게 싫으니까 문으로 들어가려고 꺾는 것 좀 봐·
소갈머리가 아주 좁쌀 한 톨도 안 들어갈 치졸한 새끼다 정말· 하고·
팔기씩이나 되는 놈이 치졸하고 유치하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이란 나이를 먹으면 감수성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유치해지고 마는 슬픈 짐승이다·
청의 고향에서도 일명 부장님 온갖 이유로 삐친 부장님들이 괜히 문도 안 닫거나 혹은 생전 아낄 줄 모르던 전기를 아낀다며 공기 조절기를 꺼 버린다거나 하는 유치한 수작질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한 놈이 부서진 벽의 잔해들을 들고 와선 활활 크게 불을 피운다·
그때였다·
“한 바퀴 돌아보고 올 사람? 혹시 알아? 남은 촌놈들 중에 계집이라도 있을지· 재수 좋으면 재미도 좀 보고·”
“뭐? 왜? 귀찮게·”
“저 새끼 또 시작이네· 또 좆이 서냐?”
“너희들이 몰라서 하는 생각인데 이런 촌구석에야말로 절세미인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거라니까? 자기가 미인인 줄도 모르는 촌년으로·”
그에 부관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촌년은 촌년처럼 생겼다· 소 닭 돼지 중에 하나랑 비슷하게 생겼지· 그리고 불도 안 끄고 도망친 놈들이다· 계집년을 안 끌고갔을까·”
“그럼 뭐 보물 같은 거라도 없겠습니까? 촌놈들이니까 뭐가 귀한 줄도 모르고 가져다 놓고 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촌놈들도 눈 있고 보물이 생기면 죄다 들고 도시로 튀어 촌놈 그만두고 도시 놈 하려 눈이 벌겋다· 이런 폐쇄적인 집성촌은 아주 먼지가 나도록 털어봐야 곡량 한 줌 말고는 딱히 집어갈 것도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뭐 정 그렇다면야 말리지는 않겠다만· 혹시 찻잎 말린 거 보면 좀 가져와라· 그래도 대장인데 찻물 한 사발은 챙겨줘야지· 저번처럼 무청 말려 널어놓은 걸 찻잎이랍시고 가져오진 말고· 무청 가져오려면 아예 어간장이랑 쌀알도 챙겨와·”
왁짜지껄 웃음이 한탕 터져나온다·
“그래도 나름 맛은 좋지 않았습니까? 거 건더기까지 다 건져드시곤· 시장하신 모양인데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일어난 놈이 너스레를 떤다·
“그래서 보물 찾아 떠날 놈 없냐?”
“잘 가· 계집 찾으면 혼자 먹지 말고·”
“금의위 의리 다 죽었다 진짜· 어디 딱 봐라 내가 천하절색으로 일곱 번째 첩 하나 딱 데려올 테니까·”
그리하여 경박한 금의위가 채 마르지도 않은 금빛 동계 위사복을 걸치고는 문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것이 원시 고대 미개 중원의 한계다·
만약 중원 놀이 문화가 혁명적으로 발전하여 영화라는 기물이 진작에 탄생했다면 사내도 감히 혼자서 나서지는 않았을 터·
본래 살인마가 노리는 첫 번째 희생양은 무조건 먼저 씻는 여인 여인이 없는 고추밭이라면 제일 경박한 놈으로 결정이 되어 있는 것이다·
—-
혼기 꽉 찬 자식을 가진 늙은이들이란 어쩔 수 없이 자식 또래의 이성을 보면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평가를 내리고는 한다·
많이 온건한 늙은이는 참한 이를 보고는 우리 사위/며느리가 저러했으면 우리 ㅁㅁ이랑 아주 잘 어울리겠어 반대로는 못된 이를 보고는 저런 몹쓸 놈/년은 안 데려왔으면 하는 정도로만 그리 생각하고 나서는 나도 참 주책이야 하고 웃으며 넘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야단스러운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아주 유치해 빠진 극성맞은 늙은이들은 하나하나 점수를 매겨대며 아주 주책을 떤다·
사실 연 파는 청이 그리 눈에 차지 않았더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듯한 낯가죽 그리고 숨풍숨풍 애 잘 낳게 생긴 궁둥이 말고는 도대체 마음에 차는 구석이 있어야지·
물론 그것만으로도 기대가 되기는 하니 왕손께서는 얼마나 어여쁘실 것이며 그리고 그러한 왕손이 바글바글하면 따로 하늘을 찾을 것도 없이 바로 왕부가 곧 극락이지 않겠나 하고·
청에게 얼굴과 몸매에 오 점 가점·
하지만 외양이 뛰어나니 그만큼 처신을 요하건만 계집년이 사내가 유별하기는 커녕 아주 허울이 없어 함부로 팍팍 치댄다·
거기다 그 수박만 한 가슴은 또 어떻고·
본부인으로서는 심각한 결격이다·
가슴이 큰 계집은 천성부터가 음란하고 천박하며 사악한 데다가 심지어 멍청하기까지 하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물론 청이 그렇지 않다는 점은 알겠지만 그걸 세상 사람들은 어찌 알겠는가·
어찌 저런 요물을 본부인으로 들였냐면서 온 세상 사람들이 혀를 차며 손가락질할 큰 결함이다·
청에게 얼굴과 몸매에 십 점 감점·
그래도 왕야께서 마음이 있으시다면야 어쩔 수 없으니 후에 눈물이 쏙 빠지도록 단단히 교육을 시켜 버릇을 아주 제대로 들여놔야겠다고·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요소 하나는 의리다·
당가에서도 친구 지키겠다고 그 난리를 치던 아이였으니 친구 끔찍한 줄 아는 년이 지아비라면 더더욱 끔찍하게 아끼리라고 생각해서·
청에게 의리 점수 오 점 가점·
그리하여 더하고 빼서 영 점이다·
사실 영 점도 아니다·
말투는 괄괄하고 몸가짐은 장군처럼 굴고 왕야께 예를 갖추지도 않고 학식이 모자란 것은 몇 마디만 나눠봐도 알겠으며 등등·
그러니 점수는 저 아래로 추락 또 추락·
그랬는데 지금 의리 점수 대량 추가 굳이 숫자로 표현하자면 십 점 만점에 일백 일백 점 만점에 일만 점이다·
이 세상에 어떤 이가 친구를 구하겠다고 제 몸뚱이 썩어가는 중임에도 마다치 않고 헌신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연 파가 보기에 청의 옆구리는 이미 창이 심각하게 들어차 썩어가고 있는 상태다·
청이 알았다면 엥 제가요? 하고 되물었을 테지만·
심지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프면 아프다고 태를 낼 것이지 그렇지도 아니하고 우직하게 쾌활한 척을 한다·
혹여 걱정이라도 살까하여 아픔을 감춘 배려가 아니겠는가·
이제 생각해보니 짝을 지으려면 세상에 그만한 여인이 달리 없다·
천년만년 의리를 지키며 해로할 것이며 위험한 때에 다시 만나 목숨을 건진 사실만 보아도 하늘이 내린 인연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뜻을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법·
그러니까 청에게 일천 점 아니 아니다·
우리 귀한 새아가 아니 왕부의 주인마님께 어찌 미천한 종년이 감히 점수를 다 매기고·
청이 알았다면 김치국도 모자라서 아주 장독대에다 육수 부어다가 한 방에 들이킨다고 할 주접 중의 주접 왕주접이다·
“곡량고 좀 뒤져보고 올게요· 이맘때면 그래도 창고에 뭔가 그래 감저(이하 고구마)가 잔뜩일지도? 군고구마 와 군고구마 미쳤다 미쳤어· 금방 갔다 올게요·”
왜 군고구마가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가가 미쳤다면 미친 거지· 하지만·
“여기 있거라· 내 다녀오마·”
연 파가 청을 만류했다·
“아니 쉬고 계셔요· 상처도 다 터지셨는데 운기라도 한 모금 더 돌리셔야지·”
“몸이 성치 않기는 마찬가지가 아니냐· 어차피 쓰고 버릴 늙은 년 몸뚱아리가 상하는 편이 더 낫지·”
“에이 전략적 판단이거든요· 고수가 힘을 비축해야 위험할 때 쓸 거 아니에요·”
“···말만 이쁘게 할 줄 알지 아주 고집이 쇠심줄이야 쇠심줄· 여인이 되어서는 고집이 이리 세서· 흠 그래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줏대 없는 년보다는 훨씬 낫긴 하지·”
오 점 감점 그러나 십 점 가점!
거의 물이 반이나 남았네 급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친우는 좀 쉬거라· 고구마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고가 홀로 기력이 청정하니 왕래하여 챙겨오겠노라·”
“왕야께서는 어쩜 자상하기라도 하시지· 그래 왕야께서 손수 아가를 위해 왕림하겠다 하시지 않으시냐· 몸도 성치 않은데 좀 쉬지 않고· 다만 왕야 고구마가 어찌 생긴 작물인지 아십니까? 칙칙한 자색을 띤 길쭉하고 펑퍼짐한 작물입니다만·”
“고구마가 자색이라고? 노랗지 않고?”
자유가 뭔가 큰 위화감을 느꼈다·
그야 연 파가 오히려 등을 떠밀었으니·
하지만 고구마의 진실에 대한 충격이 더 컸다·
보라색이라니?
그리 상서로운 색을 가진 작물이 어찌 민간에 있는가?
익히면 색이 빠져서 노랗게 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 꼴에 청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완전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시네·
저걸 어떻게 혼자 보내·
“자유도 쉬어· 마음은 고맙지만 솔직히 말해서 자유는 지금 들개하고 싸워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들개랑 싸워도 질 텐데·”
연 파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저것이 왕야께 버르장머리도 없이 대체 귀하신 분께 무슨 말버릇이냔 말이냐!
하지만 숨기지 않고 직언을 해주는 이가 바로 곁을 지킨다면 세상에 또 그만큼 복된 일이 있을까·
본래 쓴 약이 입에 좋은 법!
연 파의 표정이 도로 부드러워졌다·
“크흠 들개 정도는 고라고 해도·”
“뭐야 들개 무시해? 건장한 성인이라도 들개랑 만나면 도망치는 법이야· 콱 물리면 견광증이 들어서 뒈지는 수가 있다? 견광증에는 약도 없어· 광동창은 고쳐도 견광증은 못 고친다고 하는 거 몰라?”
“들개가 그리도 위험한 생물이었더냐!”
“말투·”
“들개가 그리 위험했을 줄이야· 몰랐네·”
“피곤할 텐데 더 쉬고 있어· 나야 고수고 연 파는 초고수지만 자유는 아니니까·”
“···알겠네·”
사실 두 사람은 창고의 고구마를 찾을 필요 없이 청의 옆구리에 제대로 솟은 대형 고구마를 보았다·
색도 모양도 고구마고 크기만 호박이다·
옆구리에 썩은 호박을 달고 있는 주제에 또 일을 하겠다고 하는 판이다·
하지만 청의 말이 일리가 있다·
평소에는 입만 열면 헛소리를 하는 주제에 이럴 때만 아주 정론이다·
청도 이미 군고구마를 떠올리고 말았다·
이제는 옆구리가 터졌던 뭐건 일단 고구마 냄새라도 좀 맡아야겠다·
이제 십이월 십일월에 수확하는 고구마가 아직 창고 가득 남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역력하지 않은가·
피난길에 곡량을 챙겨가더라도 고구마는 가장 나중으로 밀릴 테니까 그래도 조금은 남아있겠지 하고·
근데 중원에도 은박지가 있던가?
불에 그냥 던지면 군고구마가 아니라 탄고구마가 되는데?
뭔가 대체할 수단이 없나?
분 나게 감자 삶듯이 물 덜 넣고 삶아다 팍팍 흔들어 봐야 할까?
청이 행복한 고민을 하며 침을 줄줄 흘리면서 곡량 창고로 향했다·
그리하여 청이 기대로 부푼 가슴으로 그렇다기에는 기대를 심각하게 많이 하여 너무 부푼 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신이 나서 곡물 창고를 활짝·
그 서슬에 활짝 열린 옆구리가 분노의 오중창으로 청을 응징하는 통에 잠깐 허어억 몸을 떨고서는·
그리하여 고구마 있다?
있다!
청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계절만 보고 고구마를 유추하여 기어코 찾아내다니·
이제는 완전히 닳고 닳은 숙련된 무인이 되고 만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강호 경험이 풍부한 최고의 무인들만이 남의 창고에서 고구마를 도둑질할 수 있다·
내가 누구? 신투· 신투가 누구? 서문청·
신투에게 어울리는 위대한 업적 고구마 서리!
태원에서 봄학기를 준비하는 천유학이 알았으면 아주 울화가 터지다 못해 홧병으로 드러누울 만한 쾌거라고 하겠다·
그렇게 청이 고구마 자루를 챙기고 겸사겸사 다른 것들도 살펴보고 있던 때였다·
이건 뭐지? 토란? 토란인가? 토란 치곤 좀 잘지 않나? 산잠 종류인가? 어디·
우웩 으흡 퉤 퉤엣 카윽 퉤! 쓰다 써!
씨이 왜 천마를 곡창에 넣어놓는데?
먹지도 못할 쓸모없는 천마를 헷갈리게스리·
청이 천마의 끔찍하게 쓰고 찝찝하게 시고 아리게 떫은 가운데 생강처럼 매운 정말이지 끔찍한 맛에 몸을 떨었다·
황제내경에 따르면 세상의 끔찍한 맛들이 전부 들었다고 하는 천하에 가장 맛대가리 없는 약재로 꼽히는 천마다·
청이 천마 맛 좀 보고는 헛구역질하며 오만상을 쓰고 있을 때였다·
자박자박 한량처럼 느즈막히 걷는 소리·
뭐야 자유 녀석 쉬랬더니 기어코 돕겠다고 따라왔나?
청이 그에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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