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5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추기라도 할 양으로 천천히 흐르는 듯한 일순(눈을 한 번 깜박이는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늘어지는 때가 있다·
이는 생명의 위기 앞에서일 수도 있고 혹은 목숨보다 소중한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랑에 빠졌을 때라던가·
곡량 창고의 인기척으로 혹시 예쁜 여인이라도 있을까 싶어 찾아온 류망역(금의위 별기군 삼십칠세 기혼)에게도 바로 이러한 기적의 순간이 찾아왔다·
쪼그려 앉던 여인이 몸을 돌리는 순간 아마 저 아는 누군가가 찾아왔다고 착각했는지 반갑게 웃는 얼굴이 눈동자에 콱 박힌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이어져서·
진정한 미인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법 한없이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 천천히 돌아보는 천하제일의 미인이 여기에 있었다·
퐁당 빠져버릴 것만 같은 커다란 눈에 섬세하게 뻗어나간 긴 속눈썹이 저를 향해 위아래로 반기며 꽃잎처럼 피어오른다·
류망역은 그저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그렇게 오도카니 서서 하염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대단히 극적인 순간이었다·
청에게는 아니다·
뭐지 이 새낀?
자유인 줄 알았더니 웬 모르는 놈 하나가 입을 헤 멍청하게 벌려놓고 눈은 개개 풀려 약쟁이 같은 낯짝을 하고서는 남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수레 끌 때는 모자와 목도리로 위장했지만 강에서 헤엄치느라 면사도 푹 젖어버린 통에 말린다고 맨얼굴로 나온 청이다·
청도 자기 예쁜 줄은 안다·
하지만 그 미모가 얼마나 해로운지 특히 사내에게 얼마나 강한 파괴력으로 그 눈과 뇌를 터뜨리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다만 얼빠진 낯짝을 하고서는 차림새를 보아 이 동네 주민은 아닌데 하고·
이런 시골 촌락에 비단옷 입고 멀끔한 놈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칼 찬 놈이면 더욱더·
청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그제야 류망역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크흠 소저· 본 위사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오· 그리 노려보지 말아 주시오·”
“나쁜 사람이 자기 입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걸 보셨 아 많이들 하긴 하지·”
인간 말종들이란 저네들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에 대해 자부심을 품고는 한다·
덕분에 청 앞에서 제 악업을 자랑하며 부풀리다가 억울하게 더 아픈 꼴을 당한 놈이 한둘이 아닌 판이다·
물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청이 위사의 머리 위 번진 세 글자를 확인했다·
번진 글자의 밀도를 보면 다른 숫자는 몰라도 숫자 일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위사의 첫 숫자는 밀도 있게 부한 꼴이라서 적어도 일백구십구 점은 초과한 상태가 아닌가·
“뭐 어쨌거나요· 누구세요?”
“본 위사는 정정류가의 망역이라 하오· 그 혹시 정정류가를 아시오?”
“유명한 가문인가요?”
“그렇소· 내 자랑 같지만 정정 일대의 대지주로 일백네칸의 장원을 소유한 북경의 명가 명가 중의 명가라오· 그리고 본 위사는 북경에 일곱 칸 장원을 소유하고 있고·”
뭐지? 자기 과시? 자기 자랑 맞지 않나?
“그리고 본 위사는 금의위 별기군에 소속된 황군이라오·”
류망역이 그리 자기 소개를 했다·
사실 금의위쯤 되면 자기소개가 곧 수작질이다·
가문 좋고 수도에 따로 사는 자가 보유 직업 좋아서 월봉도 많고 업무가 항상 밖으로 나돌기에 집에 붙어있는 시간도 별로 없다·
그야말로 최고의 신랑감!
하지만 청의 표정은 떫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고·
그리고 금의위면 아까 죽일 듯이 쫓아오던 새끼들 아니었던가·
류망역이 청의 표정을 보고 아차 싶었다·
시골에 살던 여인이라 이것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나보다 하고·
“금의위란 황상의 명만을 모시는 최고의 장군들이오· 그리고 본 위사가 바로 그러한 금의위 중에서도 최고 정예군 숨만 쉬어도 진급하여 탄탄가도를 밟는다는 별기군 소속 위사인 것이오·”
청이 류망역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가 혼자 왔을까?
아까 숫자가 제법 되었는데 나머지는 어디에 있고?
지금 상태에서 도망칠 수가 있나?
그 손에서 불 뿜는 애는 화경이었던 것 같은데 일 대 일이면 모를까 거기에 적들 붙이고 나는 혹만 붙인 상태인데·
“그리 경계하실 필요는 없소· 내 솔직히 말하리다· 소저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오· 내 부인이 되어 주시겠소?”
그에 청의 눈이 땡그래진다·
초면에 갑자기 청혼을?
그것도 촌구석 고구마 창고에서?
뭐지? 병신인가?
굳이 말하자면 청을 병신으로 여긴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촌년이니까 첩도 아니고 무려 부인으로 들여주시겠다는데 당연히 눈물 줄줄 흘리며 감동해서는 따라오겠지 하고·
청의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솟는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현 상황을 알아볼 좋은 기회이기는 했다·
육체적 접촉을 통한 진실 탐구 행위의 편이 훨씬 즐겁기는 하지만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그렇게 얻은 정보의 신뢰도가 딱히 높지도 않으니까·
“음 저희는 이제 초면인데 어찌 알고 소녀에게 대뜸 그러한 희롱을 하시는지요?”
“아! 소저의 이름도 묻지 않았군· 내 사죄하리다· 혹여 소저의 영명을 들을 영광을 베풀어 주시겠소이까?”
그에 청이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녀는 진주언가의 언연영이라고 한답니다·”
이제는 아주 망설이지도 않고 튀어나오는 이름이었다·
—-
모처럼 언연영을 팔았지만 딱히 보람은 없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저승 간 류망역이 염라대왕에게 ‘언연영이 날 죽였어요 그년 나쁜년이에요’ 하고 일러바쳐 봐야 어차피 명부에 ‘서문청에게 두루두루 얻어맞아 전신 복합 골절 및 장기 다발 손상에 따른 고통으로 인한 충격사’라고 쓰여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고·
어차피 죽일 놈이라도 가명을 대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한 청의 신중함 하나만은 분명 성장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천하의 살성을 눈앞에 둔 지도 모르고 비위 맞추겠다고 아는 이야기 모르는 이야기 죄다 털어낸 류망역이다·
적어도 가는 길이 후련하기는 했을 터·
현재 북문 근처에 자리를 잡은 금의위의 숫자는 총 스물네 명·
두 명은 중상이라 전력 외로 쳐도 스물셋에다 화경의 고수가 한 명 초절정이 다섯 명 나머지 열일곱이 절정 고수다·
모두 황상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데 청이 아는 바로는 남의 피 빨아먹고 몸이 단단해지는 무슨무슨 대법을 받았다는 뜻이다·
위사 말로는 황은성혈대법·
진짜 천자의 피가 들어간 최고의 은혜이며 최고 실력자들이 받는다나·
그 외의 위사들은 황은방혈대법이라고 어쨌거나 황실의 피가 들어간 좀 떨어지는 대법을 받았다는데·
이렇게 대법을 받은 약쟁이 위사들을 별기군이라 따로 묶어 부른다는 모양·
아니 황실의 피가 무슨 영약이라도 되나?
그럼 내 피도 막 먹으면 단단해지나?
하지만 독 할아버지 당가의 태상가주에게 듣기로는 본래 혈교의 사악한 대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피를 모아 입힌다고 했으니 거기에다가 피 한 방울 섞어다가 황은이니 뭐니 생색을 내는 것이라고 대충 추측을 해 볼수도 있고·
무공도 죄다 훔쳐다가는 황은무슨신공으로 이름을 다 비틀어 놓았듯이·
그러니 사람 갈아넣어서 단단한 육체에다 덤으로 돌덩이같이 단단한 하물 여인을 초죽음으로 만드는 정력을 얻은 위사들의 충성심이 하늘을 찌른다고·
후자의 경우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걸 여인 앞에서 으스대며 자랑하는 시점에서 그 새끼는 아주 글러먹었다·
어쩐지 수레 끌 때 악업들이 다 가로로 길더라니 죄다 죽어 마땅한 쌍놈들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위사들의 전력이 보통이 아니다·
물론 대법의 부작용으로 속도를 잃은 놈들이다·
최초 서른 한 명이 고작 수레 하나를 제대로 따라잡지를 못해 허우적거렸으니 꽤 심각한 부작용이기는 한 모양이지만·
덕분에 청의 안색만 심각해졌다·
부작용이고 나발이고 단단한 놈들이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오면 답이 없으니까·
“지금 촌락에 금의위 놈들이 들었어요· (아작아작) 일단 한 놈 잡기는 했는데 시간이 없으니 (꿀꺽) 당장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요· 아유 고구마가 어떻게 생으로도 이리 달지· 호박 고구마인가?”
청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 고구마를 아작아작 씹으며 말했다·
고구마 구워먹을 시간도 없으니 아쉬운 대로 생 고구마다·
내용은 심각한데 말하는 년이 고구마나 씹고 있으니 영 와닿질 않는다·
연 파가 생각했다·
그래도 음 체력 비축을 위해?
왕야를 피신시키기 위해 말하는 시간조차 아껴서 고구마를 입에 밀어 넣는····
이건 아니지·
아까 무쇠솥이 넘치도록 죽을 끓여다가 반절 이상을 홀라당 처먹고는 또 고구마를 그리 씹어댄단 말이냐·
어떻게든 점수를 주려던 연 파가 이번엔 도저히 안 되어 포기했다·
물잔에 물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야 그래도 물이 있기는 있구나! 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건 말건 하지 아주 말라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무리가 아니겠는가·
“그래 어쩔 생각이냐?”
“그냥 몰래 빠져나가려구요· 북쪽 수녕현으로 간다고 하니까 우리는 산자락 타고 돌아서 서쪽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금의위 놈들 쉬고 있을 때 몰래 남쪽으로 빠져나가겠다는 퍽 단순한 계획이었다·
“마침 소달구지가 있길래 끌고왔어요·”
그에 자유와 연 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또? 또 수레야?
그에 청이 씩 웃는 것이 아닌가·
“에이 이번엔 승차감에 신경을 좀 쓸 테니까 그리 질색하지 마시구요· 침상 하나 얹어놓고 모포 덮으면 되잖아요·”
그에 연 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 수레 투정이나 할 때던가·
“아니 그 몸으로 또 수레를 끌겠다고? 침상까지 얹어놓고?”
“그게 연 파가 몸을 회복하기에도 좋을 테고 자유도 그게 훨씬 편하잖아요?”
그에 연 파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그놈의 회복 타령!
여인으로 태어나서 어찌 우마처럼 수레를 끄는 일이 기껍겠는가·
어찌 보면 암말이나 암소 취급을 한다고 치를 떨며 표독스러운 낯을 하고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해도 이상하지 않은 치욕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처하여 나서는·
제 몸 상태도 성하지 않으면서·
어찌 이런 사람의 마음씨가 어찌 이리도 곱고 어여쁠 수 있단 말인가·
새아가의 기특한 마음씀에 일백 점 추가·
자유는 청의 백옥석 같은 등짝이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듯한 생에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이었으니 어련할 것인가·
하지만 동시에 옆구리에 달린 참혹한 환부를 호박만큼 부풀어오른 썩은 고구마(이제 고구마의 실물을 눈으로 확인했다) 역시 뇌리에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가 없다·
이미 가족과 같이 여기던 수하 여럿을 잃었으니 거기에 연 파마저 잃고 싶지는 않아서·
그야말로 뼈에 사무치는 무력함이다·
자유의 표정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음· 친구 면목이 없네· 연 파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 내 차마 거절하질 못하겠군·”
“에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친구인가····”
“자· 그러면 일단 짐들 싸요· 나는 수레에다가 침상 좀 얹어놓을 테니까· 이참에 좀 이리저리 덧대놔야 쓰겠다· 군용 수레만큼 튼튼하진 않을 테니까····”
수레 개조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청의 힘은 천하제일 항우장사마저 남청으로 개명하게 만드는 괴력녀가 아니겠는가·
거기에 새끼 목수의 능숙함이 더해지면 달구지 하나 개조하는 데에는 딱히 도구조차 필요가 없는 판이다·
그리하여 수레 이 호 승차감 개조판이 탄생했다·
“이건 음 의외로·”
“계집이 손재주도 신통하구나· 그래 뭐든 재주가 있으면 좋은 일이지·”
새아가의 손재주에 십 점 추가·
어쨌거나 짐덩이들도 만족스러운 모양·
그러나 온갖 혹사를 다 당하다가 끝내는 조각조각 개박살로 해체되어 수장이 되어버린 수레 일 호의 저주인지·
아니면 만지다가 보니 재미가 들어 개조에 너무 공을 들였던 까닭인지 원래 무언가를 단단히 준비하여 만들어 두면 쓸 일이 없게 되는 일이 허다하므로·
수레 이 호가 활약할 일은 오지 않았다·
남문으로 몰래 빠져나오자마자 단단히 무장한 군대와 딱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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