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6
대순 호의 숙련병들이 눈빛을 나누고는 손가락을 휘젓는다·
무려 수화 척척 눈빛이 오가며 손가락을 펴고 손을 접었다 폈다 주먹 망치로 손바닥을 치는 시늉을 하며 여럿이서 소리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저 기척을 감추기 위해 쓰는 수화 수준이 이러하니 얼마나 정예한 부대인지 바로 알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수화로 나눈 대화들이다·
-정지· 전방에 민간 장애물· 감시초소 둘 돌파 지점 하나 경계병은 없음·
-정지 철강노 시위 대기 선발조 접근하여 동태를 살필 것·
-민간 장애물 상태 폐쇄· 경계병 없음· 적의 기색도 없음· 돌파합니까?
-판단 보류· 잠시 대기하며 청음할 것·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며 약 일 각 후·
닫힌 목조 문짝 좌우로 딱 붙은 정찰조가 다시 수화를 보낸다·
-적의 기색 없습니다·
-대기·
그리하여 장군과 부관이 바람 새는 소리로 소곤소곤 현장 판단에 들어간다·
‘산불을 보았을 터이니 피난을 간 것이 아닙니까?’
‘연기가 여럿 피어오른다·’
‘불단속도 안 하고 떠났을 수도 있겠죠·’
‘그런 것 치고는 먼 곳의 연기가 매우 거칠다· 화재 수준은 아니니 누군가 장작을 새로 채워 불을 높였을 것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강행 돌파입니까?’
‘민간 촌락이다· 괜한 분란을 만들어도 좋은 때가 아니니 일단은 소리쳐 끌어내 보고 응답이 없으면 돌파한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부관이 양손을 번쩍 들고는 한 발 한 발 촌락의 목책문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적의 경계가 없다고 하더니만 과연 달리 무슨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부관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북부 사나이의 우렁찬 성량을 토해내는 것이다·
“나느은-!!” / 끼이익!
동시에 나무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문이 열린다·
부관이 눈을 끔벅거렸다·
뭐지? 아직 열라는 소리는커녕 내가 누구인지 소개도 시작하지 못했는데?
청도 깜짝 놀랐다·
뭔데? 뭔데 이 아저씨는 조용히 문 앞에 서 있다가 열자마자 괜히 소리를 지르는데?
촌락 북측에는 금의위들이 휴식 중이라서 틈을 타 남문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때였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웬 놈이 빽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슴줄 두르고 달구지 떡하니 뒤에다 세워놓고는 한 손에는 고구마를 든 청과 낯선 이의 매우 어색한 시선 교환이 이어졌다·
아작· 청이 일단 입에 씹던 고구마를 한 번 씹고는 아작 뒤로 한 발짝 아작 또 한 발짝 아작 세 발짝 아작 네 발짝· 엉덩이가 그제야 달구지에 닿는다·
청이 달구지를 엉덩이로 주우욱 밀며 후진 그리고는 슬그머니 다시 문을 닫는다·
끼이이익·
나무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닫히는 방책 문 마치 없던 일로 하자는 듯한·
부관이 다급히 소리쳤다·
“멈춰! 멈추지 않으면 쏘겠다!”
꿀꺽·
청이 뜨끔함에 덜 씹은 고구마를 삼켰다·
그래도 생고구마라 목이 메이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쏘겠다는 말은 별 감흥이 없다·
요새화한 마을의 대문은 두터운 판자를 이었으니 철시가 뚫는다 해도 이미 속도를 죄다 잃어버린 유시에 불과할 터다·
다만 소란을 피우다가 금의위 애들 몰려오면 아주 나가리가 된다·
그것도 앞뒤로 포위되어버리면 음·
청이 일단은 시키는 대로 멈춰 보았다·
사실 이러한 문짝이야 양민들끼리 싸울 때나 든든한 것이지 제대로 된 무인에게 걸리면 몇 발짝 뗄 시간조차 벌지 못하는 허술하디 허술한 장애물이다·
그러면서 머리를 굴려보기를 피난 가는 아낙인 척을 해 볼까?
몸 편찮으신 노모와 철없고 병든 남동생을 데리고 피난을 가는 거지·
굳이 멀쩡한 북문 놔두고 불이 난 남산을 향해 나오는 의문의 피난민이겠지만 본래 자리에서 바로 생각해낸 계책이란 물웅덩이처럼 깊이 자체가 얕을 수밖에는 없다·
그리하여 청이 흠흠 목청을 가다듬는데-
“오라· 그래· 누군가 했더니· 수레 끌고 가던 인력거꾼이로군·”
저편에서 누가 아는 체를 하는 것이다·
푸른색 두꺼운 외투를 걸친 사내 군문에는 여인이 없으니 사내겠지 뭐·
청은 초점이 흔들려 안 보이지만 외투 바깥으로 도토리만한 철정이 가지런히 박혀 은빛으로 번쩍인다·
두꺼운 외투처럼 보이지만 동그란 철못머리마다 철판을 달아 안쪽으로 누빈 갑옷의 일종이다·
“앗 그러고보니! 너! 감히 날 차고 갔던 그놈이렸다!”
그에 부관도 청의 덩치를 보고는 곧장 그 인력거꾼을 떠올렸다·
촌것들이 입는 겨울 옷이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는가·
그저 안에 싸구려 솜을 가득 채워 부풀린 정도에 그치는 물건이고 그나마도 솜이 고르게 들어가지 않아 어디는 두껍고 어디는 얇고 솔직히 조악한 의복이다·
거기에 조여놓은 환부 위로 또다시 채대(허리띠)를 맬 수도 없으니 부하니 퉁퉁 불은 거한이 안 어울리게 고운 면사를 뒤집어 쓴 꼴이다·
부관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어쩐지 딱히 적대적인 모습은 아니다·
청이 크흠 사내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걷어찼다고 하시면 좀 억울하고 혹여 몸이 상하실까 싶어 발로 슬쩍 밀어드렸을 뿐인데·”
“뭐? 발로 밀어!? 두 번 밀면 사람 잡겠구나 아주!”
“뒤에 불길이 쫒아오니까 경황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어 죄송한데 달리 드릴 건 없고· 혹시 고구마라도 드쉴-”
“뭐야 이게 사람을 놀리-”
“그래· 급하면 그럴 수도 있지·”
청의 말을 끊어먹은 부관의 말을 끊어먹으며 장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관이 바로 억울한 소리를 냈다·
“장군! 하지만 이놈이 제 가슴팍을 아주 뻥 걷어차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리 견마지로를 다했건만 어찌 이리 홀대하십니까!”
“그건 당사자들이 알아서 풀고· 그래 자네 이름이 뭔가?”
청이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다·
“어 소인은 그 언연영이라고 하는 놈이온데·”
“언여녕?”
“언 연 영·”
“어녀녕? 어 씨더냐 언 씨더냐?”
“언 씨 어 녀 녕 아니 언녀녕 아니 언어영 아씨 나까지 헷갈리잖아요·”
발음이 대단히 어려운 이름이기는 하다·
“뭐 이름이야 어쨌건· 그래 혹시 군적에 뜻이 있던가? 내 자네 용력을 보았는데 내 군대에 아주 딱 어울리는 인재라서· 나랑 같이 가겠나?”
“말씀은 감사하오나-”
순간 장군이 손을 들어올린다·
그러자 차차착 일부러 내는 정연한 소리와 함께 반원형으로 펼쳐진 군사들이 이리 석궁을 겨눈다· 아니 겨누는 것 같다·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인데· 내 딱히 자네 의견을 물어본 것은 아니라네· 세상에 누가 북부군에서 군적을 사려 하나? 차라리 죽겠다고들 하지· 자네는 어느 쪽인가? 살아서 군적을 사는 것이 낫나 차라리 죽겠다고 하는 편인가?”
나랑 군대 갈래 아니면 죽을래·
나랑 재입대할래 아니면 죽을래·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이래서 서양의 모 국왕께서도 재입대를 앞두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왜냐면 어차피 군인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답지 못하게 사느냐·
차라리 사람으로 죽느냐·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재입대 대 죽기 구차한 삶과 평온한 죽음 사이의 문제다·
되느냐 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놀랍게도 청은 무려 군필 절세미녀다·
군대를 다시 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요즘 군대가 어쩌니 해도 여기는 오히려 그때보다 더 과거 그것도 원시 고대 미개한 세상인데 좆같으면 더 좆같았지 덜 좆같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나라법에 따르면 여인은 군적을 살 수 없다·
굳이 왜 나라법까지 제정이 되었으냐고 하면 어기는 년이 정확히는 어기는 놈이 많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군적이란 호마다 할당량을 채우는 것이라서 자기도 가기 싫고 귀하신 아들을 보내기도 싫으면 어차피 남의 집에 팔아넘기는 용도인 딸들이 남는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면 남편의 집에서는 처가를 향해 예물을 보내야 하는데 이 금액을 바로 채례라고 한다·
그러니까 딸이란 잘 키우다가 채례를 두둑하게 채워 한탕 버는 용도이다·
그러니 채례를 포기하면 그 대신 남장을 시켜 군역을 치르게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청이 생각했다·
여인은 군적을 치를 수 없으니까·
일단 알겠다고 하고 어울리다가 자유랑 연 파를 피신시키고 그리고 나서는 유감! 사실 여인이었습니다 하고 빠져나가면 되지 않을까·
“저 장군님· 제게 병든 할멈과 병약한 그 자식놈이 하나 딸려서· 일단 할멈의 몸이 크게 좋지 않아 선녕의 외가로 데려가는 참이었습니다만 혹여 할멈을 좀 모시고 나서 그리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아 그래· 어쩐지 인력거를 끈다고 하더니만· 군사가 아니었던 겐가? 어쩐지 일개 무명병이 가지기는 힘든 용력이다 싶었지· 병든 노모를 모시는 모양이군·”
장군이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못마땅하던 부관 역시 거기에는 눈빛이 누그러져 살짝쿵 온화한 빛을 띤다·
감히 하늘 같은 부관 나리의 가슴을 걷어찬 놈이지만 노모 살리겠다고 다급했다고 하면 그걸 탓하기도 뭐하지 않나 하고·
“그래 그래도 자식이 하나 더 있어 다행이로군· 자네가 군역을 치르더라도 봉양할 이가 남을 테니· 선녕이라고 했나? 삼이· 지도 봐 두었지·”
“선녕이면 산자락 타고 서쪽에 붙어있을 겁니다·”
“그러면 선녕에 들렀다가 북경으로 복귀하면 되겠군· 그럼 전원 대형을 갖추도록 아직 화마의 영향 아래에 있으니 서둘러 벗어나도록 한다·”
“앗 저기요· 장군님?”
그에 청이 장군을 불러세웠다·
“왜 그러지?”
“그 촌락에 지금 다소 수상한 놈들이 눌러앉아서 분명 금의위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요·”
그에 장군의 표정이 팍 상했다·
그에 비해 청의 표정은 조금 밝아진다·
앗 둘이 사이 안 좋나?
“괜히 마주쳐봐야 좋을 일도 없겠지· 흠 이 동네 지리를 잘 알겠지? 눈에 안 뜨이도록 수녕인지 어디인지 갈 길을 알 게다· 안 그러한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구요·”
눈에 안 띄는 길이면 그냥 야지를 돌파해 서쪽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니겠나·
그러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앞장을 서라·”
그렇게 청이 달구지 끌고 앞장을 서서 막 출발하려는 때였다·
“멈춰라!”
금의위가 아무리 군기가 개판이라고 해도 초절정 여럿에 화경을 대장으로 두었다·
그러니 남문이라고 해도 목청 좋은 부관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소리를 못 들었겠는가·
물론 다들 억지로 나오기는 했다·
걸걸한 목소리에 피난민이라도 돌아왔나 하고 다들 신경 끄고 있다가 단단히 삐친 대장께서 수상한 소리를 듣고도 퍼질러 앉아있냐는 심술을 부렸으니까·
그러나 가끔은 이러한 심술도 성과를 내는 법이었으니 금의위 위사들이 지금쯤 한창 불타고 있어야 할 북부군 대순 천호의 모습을 포착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활짝 열린 남문으로 금의위 별기군 위사들이 나타나 오만한 태도로 척척 어깨를 맞대 선다·
남문 바깥에는 북부군 군사들이 포위를 친 상태·
“이게 누구야· 이 장군 아닌가? 내 분명 지엄하신 황명을 전해드렸던 것 같은데? 방화선까지 불이 붙어 역적이 소사한 사실을 확인한 후에 복귀하라고·”
“바람이 거칠었는지 예정보다 훨씬 빨리 불타버렸지 무엇입니까· 임무는 예정대로 완수하였으니 걱정은 마십시오·”
어쩐지 팽팽한 긴장감에 곧장 관전에 들어간 청이 고구마를 와작와작 씹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말이 안 될 것은 무엇입니까?”
“사리가 안 맞지 않느냐! 우리가 촌락에 든 지가 겨우 반 시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 놈들이 여기 와 있다면-”
“어사께서 눈으로 보셨습니까? 저는 제 눈으로 방화선까지 타는 꼴을 똑똑히 보고 철수하였는데 이런 촌구석에서 여유작작 놀고먹고 계시던 분이 그리 말씀하셔도 말입니다·”
“이 감히 뭐 뭣이? 놀고먹어? 네놈이 감히 어른께 하는 버르장머-”
“엄연히 계통이 있으니 천호장인 제가 굳이 나리께 하대를 들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군부에게 존중을 표하십시오·”
삼 연속 말허리 끊기에 막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오냐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모양인데 오늘이 바로 너희 놈들의 제삿날이다· 전원 발검하라!”
착· 금의위 위사들이 칼을 뽑는다·
장군 역시 팔을 들어올리니 이미 반원으로 포위망을 구성한 병사들이 철강노를 들어 위사들을 겨눈다·
청의 눈빛이 초롱초롱· 입은 쉬지 않고 와그작와그작·
오오 한 판 붙나? 지네끼리 싸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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