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0
원소절!
원소란 첫 번째 밤이란 뜻으로 으뜸 원에 밤 소자를 쓰며 새해의 첫 만월이 뜨는 날 즉 일월 십오일 첫 보름날이다·
놀랍게도 서역 말의 원(一)과는 상관이 없다·
그냥 청의 고향에서 정월 대보름이라고 하는 그 명절이다·
중원인들에게 원소절은 새해 연휴의 끝을 고하는 마무리쯤 된다·
어차피 일월쯤 되면 딱히 할 일도 없다·
새해 첫날 춘절로부터 줄곧 먹고 놀며 흥청망청 즐기다가 길거리에 온통 보름달을 상징하는 등불이 걸려 휘황찬란하게 빛나면 아 오늘이 원소절이로구나·
그러면 오늘이 연휴의 끝임을 새해 큰 잔치의 마지막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만 청은 원소절보다 원소 그 자체에 관심이 있다·
원소란 원소절에 먹는 꿀떡이다·
보통은 이 원소를 떡국으로 끓여 먹는다·
떡국은 떡국인데 그런데 떡이 꿀떡인·
보통은 설탕과 깨를 넣은 꿀떡 지역에 따라 팥소나 앙금을 넣은 꿀떡을 투명하게 맑은 탕으로 끓여낸다·
맑은 고깃국에 꿀떡이라니·
청은 중화 인민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아니 어떻게 세상에!
어찌 고깃국에 꿀떡을 넣는단 말이냐!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세상에 이러한 음식은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고깃국에 꿀떡이 들어가서는 안 돼!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거라고!
그러니 몽땅 없애버려야 한다!
청이 불타는 사명감 이 끔찍한 음식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도록 제 한 몸을 희생하여 몽땅 씹어 삼켰다·
아주 숭고한 희생 그것도 단짠단짠한 희생이라고 하겠다·
풍요를 기원하는 원소절이다·
제자들 모두 먹고 넉넉하게 남은 원소를 모두 세상에서 치워버렸으니 그 분량이 모두 들어간 윗배가 태산처럼 높이 솟았다·
“과연 형님! 이 우나람 불민하게도 겨우 두 그릇을 해치웠을 뿐입니다만! 역시 차기 천하제일인의 그릇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어찌 사람의 몸으로 원소를 일곱 그릇이나 비울 수 있단 말입니까! 그야말로 기적! 그야말로 경이! 이 위풍당당하게 솟은 배를 보십시오!! 중원의 오악이 모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웅장한 태산! 마천루! 하늘에 닿는 위용! 이 우나람! 감복하였습니다앗!”
배불리 먹고 침상에 퍼진 청에게 우나람이 곁에서 잔뜩 흥분하여 소리쳤다·
듣는 청은 기분이 조금 묘하다·
뭐지 조금 멕이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좋은 뜻으로 말하는 거 맞지···?”
“물론입니다! 식사는 곧 전투! 전투는 곧 식사! 사람이 먹는 것이 종래에는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식사는 곧 몸! 몸은 곧 식사가 아니겠습니까! 형님의 그 강함! 그 비결을 엿보았으니! 바로 인간적이지 못한 식사량! 탈인간적인 식사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앗!!”
“스읍· 멕이는 거 맞는 거 같은데·”
“다만 소녀 우나람!! 형님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그 거대한 음식 주머니를 이 손으로 한 번만 만져 보아도 되겠습니까!? 눈으로 보고 믿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실 청은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다·
배는 부르고 몸은 편하다·
그러니 배 좀 만져보겠다는데야·
“살살 만지는 거면· 누르진 말고· 먹은 거 올라올라·”
“영광! 영광입니다!”
그에 우나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탱탱하니 빵빵한 청의 윗배를 쓸어내린다·
마치 임부의 배를 쓰다듬는 양 아주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점점 손이 위로 올라오더니 살살 부드럽게 문지르는 손끝에 청이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끼야흐악 경박한 소리로 자지러지고 만다·
“아씨 나람아? 거긴 배가 아니거든? 인간적으로 먹은 게 거기 있겠니?”
“앗! 저도 모르게! 태산 같은 봉우리 세 개가 이어져 있기에! 한 산맥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식사가 전부 흉두에 있으니 이만한 웅장함을 갖추신 것이 아닙니까!”
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흉두가 뭐야? 가슴 흉에 머리 두? 가슴 머리? 앗· 이게 또·
“과연! 이렇게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계속 음식을 밀어넣어야 가슴에 육중한 머리를 둘이나 품을 수 있는 것이로군요!”
청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은근 계속 삼두를 들먹이지 않아?”
“앗 실례! 실례했습니다! 이 우나람! 사죄의 거란절을 올리겠습니다앗!! 이야압!!”
우나람이 곧장 두 팔로 섰다·
하지만 거란절도 한두번이여야지· 하루에 세네번씩 보면 감흥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우나람이 돌연 필사적으로 외치기를·
“형님! 죄송하지만! 웁· 소녀가 먹은 것이 많아!!! 역류를 참기 힘든데 일반 적인 절으로 대신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음· 아주 가지가지하는걸·”
결국 무릎 꿇고 손을 번쩍 든 우나람(서른살)이 침울한 태도로 말했다·
“소녀가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솔직히 형님의 미유에 찬양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형님께서 별호로 쓰시기에는 천하제일유가 가장 잘 어울리십니다· 한족들은 큰 가슴을 천박하다고 하지만은 저희 장족에게 여인의 큰 가슴은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인 것입니다· 심지어 거대한 위엄이 쳐지지도 않고 모양마저 아름다우시니 이 우나람 볼 때마다 경이롭고 신비하며 절로 존경심이 솟아오른단 말입니다· 이런 불타는 존경을 참을 수가 없으니 계속 튀어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돌려 멕이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고백이었다·
하긴 보름 조금 넘게 붙어다니면서 이 운동녀가 사람을 돌려서 꼽을 줄 만한 성품이 아니라는 점은 똑똑히 알았으니까·
그냥 주접이 심한 아줌마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원소절의 밤이 깊어간다·
놀랍게도 청은 지금 무림맹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계림검파 가서 놀다 오라는 임무 사부님마저도 가서 대접 잘 받으면서 푹 쉬다 오라는 임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렇게 오늘도 청이 훌륭하게 임무를 또 하루 완수하는 것만 같았지만·
또 연서를 빙자한 독촉장이 날아든다·
「대체 약속을 지킬 생각이 있는 것이냐?
축시 모란실에서 기다리겠다·」
오늘의 활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
남녕제일객잔 용궁루에는 오늘도 사람이 흘러넘쳤다·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고 못다한 회포를 다 풀려는 모양인지 일이층 식탁에 전 석이 매진으로 왁자지껄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하핫 형님들 소제가 또 한 잔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 무엇보다 가장 존경하는 형님들과 함께이니 어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소제가 건배 한 번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그럼 우리 막내 건배를 안 받을 수가 있나·”
“그럼 크흠· 청하오협의 영원한 우애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뭔가 익숙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뭐지? 숫자가 틀린 기분인 것도 같고?
기분 탓인가?
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지난 번 청이 잡았던 용왕실은 칠 층·
사사의 보열이 잡은 매화실은 육 층·
그리고 청이 향하는 모란실은 오 층이다·
뭐지 이 할아버지 돈이 좀 궁해졌나?
청이 보열의 자금 사정에 대해 살짝 우려하며 마침내 모란실 앞·
청이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까랑한 노인네 특유의 음성이 들린다·
-무엇이냐 사람 부른 적 없다·
“왜 이러실까· 사람 불렀잖아요·”
그에 문이 열리고 다급한 표정의 늙은이 보열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청의 시력은 무려 사람 표정을 알아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아주 놀라운 성취였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벌써 빨리 빨리 안 들어와?”
현재 달의 위치는 자시 초·
약속 시간보다 무려 한 시진 반을 일찍 찾아온 청이었다·
그것도 객실 복도를 통해 당당하게 걷기 하며 자연스럽게·
“아니 사사의와 천화검이 내통한다고 아주 소문이라도 낼 셈이냐? 안 그래도 원소절이라 야밤까지 놀아날까봐 내 축시에 보자 하였더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더냐?”
“속셈이요? 그야 저한테 축시가 괜찮냐고 안 물어보셨잖아요· 빨리 보고 나람이랑 야시장 아 나람이라고 아세요? 나람이라고 계림검파 이 대 대사저인데 나람이랑 같이 야시장 둘러보기로 했거든요·”
“뭣? 아니 뭔 뭐 이런·”
기가 막히고 속이 터지는 소리였다·
원래 청의 혓바닥이 이렇다·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구조인 것이다·
“근데 저번엔 육 층에 계셨는데 오늘은 오 층에 계시네요? 거 요가염방에서 어르신 대접이 너무 박한 거 아니에요? 제가 알아보니 엄청 유명하신 의원 겸 무인이시던데· 용궁루에 간다하면 당연히 꼭대기 칠 층에다가 딱! 전세를 내드려야지·”
“오냐! 그래 네 말이 맞다· 소금 파먹는 놈이라 그런지 아주 소금처럼 짠 새끼야· 작전이 길어질 것 같으니 벌써 내놓는 밥부터가 때깔이 안 좋아· 오래 먹여야 하는데 비싼 밥 계속 내어놓기 아깝다는 거지”
“염방이면 돈 많지 않아요?”
“내 말이 그 말이다! 하여간 이래서 소금 찌는 천한 놈들이랑은 상종하질 말아야 하는데 소금장이 주제에 세가는 무슨 세가 하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러게요· 감히 바닷물 퍼다가 파는 놈들이 의원 귀한 줄도 모르고· 그것도 무공 쓰는 의원이면 열 배는 귀한데·”
“내 말이! 하 그래 무식한 칼잡이들이 의원 귀한 줄을 모른다니까· 단주라는 새끼들도 마찬가지야 일전에는···”
보열이 쌓인 설움을 털어놓았다·
청이 ‘맞아요’ ‘너무해요’ ‘대단해요’ ‘진짜요?’ ‘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맞장구의 오행 원리로 대답을 척척 붙여대는 것이다·
덕분에 청이 염방과 사파련 파견 전투단의 대략적인 규모 무위 단주들의 성격 등등 잡다한 정보를 쏙쏙 주워들었다·
“하 나도 의술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야· 독공 좀 익혔다고 아주 대우가 찬밥이야· 초현이란 놈도 그래· 저번에는···”
거기에 더해 사파련 소속의 쪼잔한 마두들에 대한 정보들까지·
“핫· 아니 이럴 때가 아니라!”
보열은 귀한 정보를 막 흘려대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무시무시한 노인 학살자에게 걸리면 대협과 마두를 가리지 않고 속에 든 것을 털어내고 마는 것이다·
“아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벌써 보름이나 지나지 않았느냐· 도대체 언제 하독을 할 생각이야?”
“아· 그게요· 실은 어디다 떨궜는데 안 보여서요·”
청이 생각해둔 변명을 내밀었다·
어디(내 행낭에)다 떨궜는데 (하필 행낭에 들어가서 내 눈에는) 안 보여요
청은 어지간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뭣이! 그 귀한 것을! 잘 찾아봤어야지!”
“죄송해요· 어 그래서 혹시 한 병 더 가진 거 있으세요? 하독을 하려면 독이 있어야 하니까···”
“하· 그게 그게 계림검파 장원 안에서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게 발견이 되면·”
“아· 그건 아니에요· 그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음 정 못 믿으시겠으면 사부님이라도 걸어드릴까요?”
그야 잃어버린 적도 없으니까·
보열이 그에 쯧쯧 못마땅하게 혀를 쯧쯧 차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다·
“쯧· 그게 얼마나 귀한 독인 줄 알아? 한 병에 황금 열 관을 받아도 모자란 귀물인데· 쯧·”
“앗· 그게 그렇게 귀한 독이에요? 역시 천하십대극독이라고 하시더니·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지···”
“크흠 한 병에 일천 마리 뱀독이 응축이 된 것인데 당연하지· 귀한 독사도 독사거니와 그걸 일일이 하 아니다 말을 말지· 자· 이번엔 잃어버리지 말고 아니 아예 돌아가자마자 하독을 해·”
“그건 좀· 나람이랑 선약이 있어서····”
청이 잘 나가다가 삐딱선을 탔다·
“아니! 쫌! 어른이 하라면 네 하지 않고!”
“하지만· 원소절은 오늘뿐이잖아요····”
“하· 그래 나흘 나흘을 주겠다· 닷새 안에 계림검파에 초상이 나지 않으면 네 정체가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야·”
“음 그럼 쓰시는 김에 하루만 더 쓰시면 안 돼요? 손가락도 다섯개고 천하에서 뭘 꼽아도 다섯 개는 꼽는데 닷새는 주셔야지·”
“하아·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알았다· 닷새· 닷새를 주마·”
“헤헤· 감사합니다·”
그야 당연히 감사할 일이다·
결국 청은 하독을 하겠다고 아무런 대답도 안 했으니까·
그냥 나흘 말고 닷새로 합시다·
그래? 그럼 하루 더 받고 닷새로 가·
청은 가끔 거짓말을 하지만 약속만은 꼭 지키기 때문이다·
물론 약속에도 꼭 저 유리한 대로 해석하며 개수작을 떠는 비열한 사기꾼이지만·
남을 속여넘기는 솜씨만 나날이 늘어가고 있으니 평상시에 이 반만큼이라도 머리를 쓰고 살았으면 닥친 위험의 대부분은 피했으리라·
그러니 순진한 늙은이가 노인 갈취 전문 사기꾼을 어찌 이겨먹겠는가·
그리하여 보열은 또 속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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