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2
만약 누군가 굉장히 할 일 없는 양반이 무림인의 싸움 양상에 대해 자료를 모은다면 개중 반절 이상이 객잔에서 벌어진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을 터다·
의외로 요리점은 드물고 다점에서는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점잖게 군다던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요리점은 기본적으로 단가가 있다·
손님이라고 하면 너도나도 제법 부유한 전낭을 찬 이들이라 함부로 시비를 걸었다간 큰 봉변을 맞을 수 있다·
그리고 다점이야 뭐·
애초에 다점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취미를 가지는 이는 함부로 병기를 뽑지 않는 법이므로·
하지만 객잔은 아무나 든다·
무림 식의 표현으로는 개나 소나 들르는 장소다·
그리고 무림인의 싸움은 대개는 우월함의 표출이다·
내가 이렇게 우월한데 감히 이 몸을 더 공손하게 더 특별하게 대우해 주지 못해?
그러니 혜주비호 사흔의 분노는 제법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대 천하무림 사도건아 합종연합회의 흑급 전투단의 단원님이시다!
천하무림 사도건아 합종연합회!
줄여서 사도련!
그러니 대 천하무림 사도건아 합종연합회의 흑급 전투단의 단원님께서 노래나 파는 천한 년에게 다리를 벌려라 내 우월한 씨를 베풀어 주겠다고 말하면 당연히 천한 년은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한 년은 그러고 싶지 않았으므로 싸움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사파 놈들의 특징 중 하나는 소속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홀로 다니는 일이 드물다는 점이 있겠다·
흑웅단 단원 몇 명이 친목 도모를 위한 회식(비용 각출)을 즐기던 중에 천한 주제에 어여쁜 유랑가객을 희롱하려다 잘 안 되니 둘러싸고 병기를 들이밀어 당장 옷을 벗으라고 천인공노할 협박을 하는 것이었 아악! 백단으로 짠 탁자가!
주렴 드리운 주방의 허리께쯤 되는 턱 뒤에 숨은 점소이가 상황을 설명하다 서글픈 비명을 터뜨렸다·
거기에 기대 이야기를 듣던 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 놈들이네 아주·”
“맞습니다! 여인의 적! 이런 색마 놈들은 아주 죄다 거세를 해 버려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청이 객잔에 들어왔을 때는 천한 유랑가객이 사파련의 무사들을 상대로 아주 북어 다지듯이 쥐어패고 있는 것이다·
음· 간만에 피를 좀 볼까 했더니·
열심히 패대는 걸 보면 피 보는 분위기가 아닌가보다 하고·
게다가 흔치 않은 각법의 고수가 펼치는 싸움이다·
청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며 미리 구경 중이던 점소이에게 사정을 듣는 중이다·
강호 선배들이 아주 입에 달고 살기를 아이와 여자와 노인을 조심하라 한다·
듣는 이의 귀에 피딱지가 얹을 정도로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아주 꿈에서도 들릴 만치 만나는 강호의 모든 선배가 한 마디씩 던지는 조언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조해도 도통 들어먹질 않으니까·
아름다운 외모의 유랑가객이라면 어쨌든 그 미모를 하고서도 강호를 돌아다닐 자신이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사나이란 모름지기 머리가 아닌 고환으로 생각하는 법!
특히 머리는 하나지만 고환은 둘이라서 일 대 이 그래서 사나이는 절대 고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잘못 건드리면 바로 이렇게·
여인이 사내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탁자에 쾅 찍어낸다·
그에 단도를 들고 덤비는 사파무사 그러나 휙 풍성한 치마가 꽃잎처럼 넓게 펼쳐진다·
유군각이라 부르는 종류의 각법으로 폭이 넓고 팔랑거리는 치마에 몸을 숨겨 싸우는 것이 특징이다·
“젠장! 죽여버리겠다!”
마침내 사파무사들이 검을 빼어든다·
그러자 붕 뜬 치마 끝에 슬쩍 비치는 발끝이 사파무사의 턱 아래를 스친다 싶더니 서걱·
엥 서걱?
타격음이 아닌 절삭음에 청이 눈을 찌푸린다·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라 초점이 잘 안 잡혀서· 자세히 보려고·
그제야 여인의 신발 끝에 뾰족하게 솟은 은빛이 눈에 비친다·
신발에 칼날을 달아놓은 것이다·
목을 틀어쥔 사파무사가 바닥을 구른다·
그 뒤를 노리는 다른 무사·
여인이 빙글빙글 팽이처럼 돌자 치마가 날아 무려 세 겹· 상중하로 펼쳐진 치맛자락에 여인의 몸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치마가 펼쳐지면 어김없이 아악 비명과 함께 베인 자리를 붙들고 바닥을 뒹구는 것이다·
그러다 한 놈이 그 활짝 핀 꽃에 낭아도를 휘두르나 고운 비단이 맥없이 펄럭일 뿐이니 여인의 몸통이 아래로 바짝 엎드린 이후다·
그리고 놈의 발목 사이로 솟구치는 강맹한 발끝! 발끝에 달린 칼날!
“어우·” “허으으·” “잘한다!”
청과 점소이가 그 참혹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이 새고 만다·
저 고통을 모르는 우나람만 흥이 나서 크게 목소리를 높일 뿐이다·
우나람의 응원을 들었는지 돌연 이쪽을 돌아본 유랑가객이 눈을 찡긋하고는 손바닥 끝으로 입술을 찍고는 후 하고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싸움 도중에 추파를 던질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만·
“죽엇!”
어디선가 솟구친 사파 무사 한 놈이 양 손에 유엽도를 번쩍 치들어 달려든다·
일류쯤의 준수한 도기가 담겨 긴 꼬리를 그리며 유랑가인의 뒷통수를 향해-
땅!!
망치로 쇠 두들기는 듯한 소리·
시간을 되돌린 듯 사파 무사의 손이 다시 위로 번쩍 들린다·
유엽도의 종잇장같은 도신이 낭창낭창 격렬하게 휘어대며 위잉위잉 기묘한 소리로 울부짖는다·
그 서슬에 못 이긴 사파 무사가 무기를 가누려 애를 쓰니 마치 사내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다·
청의 고향에서 영이(〇二)라 부르는 바로 그 춤이었다·
“아씨·”
눈만 버리는 추태에 청의 인상이 와락·
그리고 왼손에 한 줌 크게 쥔 젓가락을 한 개씩 집어 연신 날려댄다·
나는 것은 젓가락이나 쐐액쐐액 소리만은 아주 강맹한 철시나 다름없다·
“암기! 고수가 있-”
사파무사 하나가 그리 경고하려다 관자놀이에 발끝이 거기 솟은 칼날이 깊숙이 안을 헤집고 돌아 나온다·
본래가 고수인 유랑가객에 더불어 초절정 초월 초절정인 초절청이 작정하고 던져대는 젓가락이 가세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그에 연검 뽑아든 우나람까지 가세하여 촥촥 검기를 뿌려댄다·
백흑황 중 중간인 흑급 전투단 그것도 단주 부단주 없이 따로 눈치 보고 저들끼리 회식을 하는 놈들이 얼마나 버티겠는가·
마지막 사파무사가 털썩 쓰러진다·
분전이라도 했다면 모양이 살았겠지만 등을 내보이고 도망치다 뒷목에 젓가락이 돋아나는 꼴사나운 죽음이었다·
그러고 나니 유랑가객이 청에게 다가와 인사를 올린다·
손바닥을 일직선으로 교차한 후 제 입을 가리고는 고개는 살짝 아래로 무릎을 굽혀 예의를 차리는 숙배(肅拜)라 하는 여인이 할 수 있는 두 번째로 공손한 인사다·
참고로 가장 높은 천읍례는 황제와 스승 부모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 하늘에게만 할 수 있으니 사실상 가장 공손한 예의를 표했다고 하겠다·
“천화전당의 나양결이 여류 무인 선배님께 큰 인사를 올립니다· 혹 실례가 아니라면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청이 여인의 오해를 깨달았다·
젓가락을 던져 도기 어린 도격을 막는 것도 모자라 해소되지 못한 경력에 사내가 흉한 춤을 추도록 만들기까지 했으니 아주 심후한 내공을 가진 여류 고수인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여류 고수란 연세가 좀 드신 편이므로 면사 쓴 청을 보고 강호의 대선배쯤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신녀문의 서문청이에요·”
“서문청? 천화검 말인가요?”
“부족한 몸이지만 그리 불리고 있어요·”
그에 어째서인지 여인의 표정이 떫었다·
“으음· 천화검이시군요· 우리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요? 안 그래도 당신을 찾았던 참이라서요·”
—-
천화전당은 천화(千花) 즉 천 송이 꽃의 장원이라는 뜻이다·
오로지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여인들만의 신비 문파다·
참고로 유명세로만 따지자면 아미파가 일 위 천화전당이 이 위 그리고 신녀문은 삼 위에 불과하다·
방으로 자리를 옮긴 나양결이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흘린다·
“사실 제가 남녕에 온 이유가 천화검을 만나기 위해서랍니다·”
“저를요?”
나양결이 머뭇거리다 어렵게 입을 연다·
“저희 천화전당에서는 오래전부터 장제자를 천화(天花)라 부른답니다· 이 대의 대사저는 지화 삼 대의 대사저를 인화라 부르지요·”
“음· 그런데요?”
“비록 모양이 다르다고는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화(花)와 화(華)는 같은 글자가 아닌가요· 그러니 천화검께서 쓰시는 별호가 저희 천화전당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란한 일이 되고 말았답니다· 심지어 본 문파의 이름이 천화전당이니 천화검께서 본의로 가진 별호는 아니시겠지만 그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앗·”
청이 곤란한 소리를 냈다·
그야 그렇기도 하다·
만약 여류 고수가 있어서 별호가 신녀검 혹은 요희검 요희신녀 이래버리면 요희께 제사를 드려 모시는 도관인 신녀문이 대체 뭐가 되겠는가·
화산과 관련 없는 화산마검 무당과 관련 없는 무당질풍검 또 어떤 검객이 소림신검 막 이래 버리면 다들 아주 곤란한 일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물론 감히 구대문파를 건드리는 간 큰 놈은 없을 터다·
하지만 여류 무인 중에 신녀문 아닌 신녀가 가끔 등장했으니 역시 덜 유명하고 가진 무력이 약한 것이 죄라고 해야 할까·
“제가 별호를 바꿔야 하려나 봐요· 그런데 별호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에 나양결이 고개를 젓는다·
“그 전에 소저의 얼굴을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네?”
“당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소저가 천화라는 별호를 쓸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셨으니 만약 화중천화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는 별호가 사실이라면 전당은 기쁜 마음으로 당대의 천하제일미에게 찬사를 보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건! 너무한 처사가! 아닙니까!!”
함께 듣던 우나람이 버럭 소리질렀다·
표현을 에둘러 기쁘게 찬사를 보낸다고 하지 천화검이 천하제일미가 아니라면 별호를 인정할 수 없으니 바꾸라는 소리다·
하지만 천하제일미를 도대체 누가 정한단 말인가·
한족에게 큰 가슴은 멍청 음란 사악의 상징이지만(물론 싫다고는 안 한다) 장족에게 가슴 크기는 여인의 아름다움 중 제일 중요한 요소다·
무림오화만 해도 보라·
현화처럼 더러운 눈매에 사백안까지 곁들여 사나운 인상의 미인을 선호하는 이들이 의외로 있는가 하면 설화처럼 차분하고 병약한 미인상을 좋아하는 청 같은 사람도 있다·
혹은 독화 같은 (외모만) 순둥한 귀염상 검화처럼 당돌한 귀염상 등등 저마다 추종자의 취향이 다르지 않던가·
아니면 그냥 미인 도드라지는 특색 없는 전통 미인인 백합도 있고·
미의 기준이 점수로 나오는 종류가 아닐진대 어찌 확인하고 자시고 인정하고 말고를 천화전당이 정하겠는가·
그러니 말이야 인정이니 뭐니 하지 그냥 바꾸라는 소리다·
우나람이 발끈한 이유도 바로 이러했다·
“에이 나람아· 하지만 천화전당 분들도 좀 그렇잖아· 만약 내 별호가 막 계림검후 이러면 계림검파가 얼마나 곤란하시겠어·”
“흠···· 역시! 형님! 이 우나람! 감복 또 감복! 감동 또 감동! 감탄 또 감탄! 진정한 대협이 바로 이러한 넓은 아량! 넓은 가슴! 드넓은 가슴! 웅장한 가슴! 그 거대한 가슴 안에 족히 천하를 품는 대협이십니다앗!!”
음· 악의가 없다는 건 알겠는데·
계속 기승전가슴이네·
난아처럼 탐내는 건 아니지만 음 난아 그래도 난아는 쪼끔 보고 싶네·
집에 돌아갈 때 사천이나 잠깐 들를까·
“이해해 주시니 감사드려요· 솔직히 저도 입 밖으로 꺼내기 워낙에 민망한 말이라서 별호에 대한 문제는 저희가 무림맹에 의논을 드려서 논의하도록-”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변명하듯 말을 쏟아내던 나양결이 돌연 말을 뚝 멈춰버리고 만다·
그리고 몽롱한 듯 혹은 얼큰하게 취한 것처럼 혹은 믿지 못할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만 사람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고 면사를 걷어낸 청의 미모를 영접한 부작용이었다·
“나 소저?”
그에 나양결이 핫 하고 정신을 차리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당주님께 전권을 위임받은 자격으로 저희 천화전당은 화중천화의 자격을 인정하겠어요· 과연 천하제일인께서는 안목도 천하제일 서문 소저가 천화가 아니면 세상에 그 어떤 꽃을 천화라고 하겠습니까?”
“엥·”
뭐지? 갑자기 사건 해결?
청이 황당함에 눈을 꿈벅거리자니 나양결이 결연한 표정이 되어 청을 똑바로 본다·
“서문 소저 다만 다른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시겠어요?”
“뭔데요?”
그에 나양결이 대답했다·
“제 반려가 되어주세요· 사모하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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