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9
보열 여기 연기 속에 있다·
좀 심한 연기 속에 있다·
“망할 놈들 대체 얼마나 피워놓는게야· 목이 다 따숩구만·”
보열은 화경 초기의 고수다·
하지만 본래 독공의 주인은 본래 경지보다 한 계단 정도 아래로 친다·
경지가 오를수록 독이 안 통하기 때문에·
게다가 보라 화경 초기의 고수를 고작 이렇게 허술한 감옥에 가둬놓고는 산공향을 피워놓는것이 고작이 아닌가·
하지만 내공이 전부 흩어지면 독단이 폭주하는 독공이다·
이렇게만 조치해 놓아도 필사적으로 속을 다스리느라 아무것도 못 한다·
그러니 보열도 일단은 독단을 건사하느라 그저 얌전히 갇혀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연기 속에 어렴풋이 인기척이 비치더니 한 놈이 쓱 모습을 드러낸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너 요가네 셋째 아니냐? 이름이 뭐였지? 요민?”
“예 요민입니다·”
보열의 정신이 번쩍 든다·
내 증거물! 증거물이 여기 왔구나!
“뺨은 뺨은 다 나았더냐? 어디 봐 이리 가까이 와 봐·”
그에 요민이 철창에 바짝 다가온다·
보열이 턱을 붙들고는 좌로 돌리고 우로 돌리고 살펴보며 톡톡 두들기며 아프냐 안 아프냐 당기냐 안 당기냐 등등 어쩐지 다급한 기색으로 진맥을 본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다 나았구나· 다 나았어·”
진짜 다 나았다!
소수마공에 뺨다구를 맞았으니 지금쯤 양 볼살이 썩어 떨어져 나가 치아가 보였어야 할 용태인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매끈하니 더 피부가 좋아진 것도 같고·
내 증거가!
보열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민이 묻는다·
“그 제가 향을 좀 챙겨왔는데 이걸로 산공독 연기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잠깐 날 도우려고?”
“예···”
“왜? 염방주가 시키더냐?”
“그게 아니라 진맥을 봐주셔서 감사드리기도 하고···”
보열은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가끔 나오는 늙은이 특유의 변덕이나 부렸을 뿐이다·
애비한테 처맞고 사는 어린놈이 불쌍해서 환부나 한번 보려다 소수마공의 흔적을 읽어내곤 어차피 썩어 떨어질 살점 볼살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라고 금창약 하나 쥐여준 것이 전부다·
다만 애비가 비정하고 형제들에게 치이던 천덕꾸러기에게는 충분히 뜨거운 온정이었던 모양·
요민이 보열의 지시에 따라 화로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갈고 뒤편에 안 보이도록 향을 피워 꽂아놓는다·
이제 자욱한 산공향은 서서히 가라앉고 대신 다른 연기가 눈속임을 할 테다·
산공향만 치우면 탈출이 뭐 어렵겠는가·
강기를 쓸 정도로만 내공 회복이 되면 철창을 자르고 나가면 그만이다·
“저 그럼 저는 이만···”
“잠깐 여긴 어찌 들어왔어? 앞에 지키고 있지 않든?”
“네· 하지만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음· 이봐 애야·”
보열이 자글자글한 뺨을 긁적거렸다·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기 뭐하여 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만 네 은혜를 입었으니 이젠 말해줘야겠구나· 애초에 네 아비놈이 바란 것이 네 죽음이다· 계림검파 놈들이 너를 해치고 나면 그걸 빌미삼아 기한이고 뭐고 당장 쳐들어갈 속셈이었다·”
그에 요민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이내 글썽글썽 눈물이 차오른다·
“아니 제가 제가 뭘 어쨌다고 그렇게·”
“가문에 남아봐야 어차피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세가를 세운다는 놈이 쓸모없는 방계가 생기도록 놔두겠느냐? 그러니 너도 곧장 떠나는 것이 좋겠다마는 내 나이가 벌써 팔십이 넘었으니 안 그래도 수발을 들 놈이 하나는 있어야지 싶기도 하고·”
그에 요민의 벌건 눈이 휘둥그레·
수발을 들라는 말은 제자로 들어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제가 제가요? 하지만 저는 무재가 없어서···”
“원래 재능 없는 놈이 독공을 익혀야 해· 꾸준히 독에만 물릴 줄 알면 한 사람 분은 하지· 그 아니더라도 독공이 의술과 닿는 부분이 많아서 제 밥벌이 하나는 하고·”
요민이 엉거주춤 손을 모은다·
그에 보열이 급히 만류한다·
“생각을 좀 해· 이 늙은 놈은 도망쳐봐야 이제 어디 갈 데도 없어· 그러니 혈교 놈들에게 투신할 생각이다· 무고한 사람을 보고 혈교의 끄나풀이라니 오냐 정 그렇다면 내 진짜 혈교의 끄나풀이 돼 주마· 하지만 넌 아직 창창한 나이지 않냐· 그러니 혈교 그 악종 놈들과 어울리려거든 날 따라오고 아니면 가서 모른척 하고·”
혈교·
그 묵직한 단어에 요민이 침을 꿀꺽·
“혈교 놈들은 인육만 먹는다던데···”
“인육 먹는 새끼들이 한둘이야? 그리고 걔네도 사람인데 맛있는 거 먹겠지 인육만 처먹겠냐· 내 혈교의 아이를 하나 아는데 오히려 사파 놈들보다 더 나아· 어른 모실 줄도 알고· 생각해보니 혈교의 쓰레기 중에서도 사연 가진 이가 있겠다 싶기도 하고·”
그 혈교의 아이 청이 들으면 엥 제가요? 하고 되물을 소리지만·
“그래도 소문이 괜한 것이더냐 대부분 쓰레기라고 보면 될 텐데 남은 삶이 그런 놈들 사이라도 좋으면 날 따라오고· 아니면 이쯤 서로 갈 길 가자꾸나·”
그에 요민이 한참을 망설이나 싶더니 이내 눈빛이 조금은 굳건해진다·
요민이 다시 자세를 잡는다·
“저도 제가 못난 놈인 거 압니다· 무공은 짧고 따로 기술도 없어 어디가서 벌어먹고 살 자신도 없는 놈이지만 거둬 주신다고 하시니 평생 어르신을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의원은 어디 가서 야박한 대우를 받지는 않는 법이다· 혈교 놈들도 사람이면 저네 치료할 의원에게 박하지는 않겠지· 내 따로 사문은 없으니 배사지례 한 번으로 갈음하자꾸나·”
그에 요민이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흐뭇하게 첫 제자를 바라보던 보열이 문득 드는 생각에 이를 악문다·
“그런데· 갈 때 가더라도 이 괘씸한 새끼들한테 한 방 먹여주고 가야 하지 않겠냐? 뭐 충고가 어째?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지 애비보다도 내가 나이가 많을 건데·”
—-
청의 경공은 일절이다·
이를 여중제일인과 신투가 보증한 바 천하 무림에 인정받을 만한 특기라고 하겠다·
단 세 걸음에 최대 속도에 달하는 천마군림보의 폭발적인 가속력 단·중거리에서 가장 빠른 경공인 격공순신 장거리로는 이름값 톡톡히 하는 천리비행을 갖췄다·
월녀산보의 무중력 보행으로 기상천외한 변화에 비상탈출 능파미보까지 마구 써 댄다·
그러니 청은 피맛에 눈이 홱 돌아가 적진 사이에 뚝 떨어지더라도 아차 싶으면 곧장 돌아나올 능력이 있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적들 사이에 홀로 파고들면 그나마 멋지게 활약이라도 하고 죽어야 겨우 호상이다·
아니면 그냥 개죽음이고·
지휘관들이 전투에서 항상 대열을 강조하며 제식을 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의 무사 귀환을 확인하자마자 일단은 안도한 식객 삼인방이 그러고 나니 무언가 허전한 것이·
“견 노!” “노견 할아범!” “견 노!”
창여인 각다귀 문맹시인이 외쳤다·
그에 청이 기세등등·
“구하러 가죠!”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청이 다시 돌진하는 바람에 초절정 식객 삼인방이 창 칼 칼 들고 다급히 어깨를 견준다·
초절정 사인방이 가는 길을 고작 일류 따위가 막을까·
사인방이 파죽지세로 적을 가른다·
“앗 곰탱아· 나도 꿱·”
그 뒤를 따르려던 나양결이었으나 왕부의 식객 하나가 뒷덜미를 탁 잡아채는 통에 턱 숨이 틀어막힌 소리와 함께 두 발만 붕 떠올랐다 다시 내려선다·
“소저는 저희와 계십쇼· 낄 데 껴야지· 초절정 사이에 낑겨봐야 발목만 잡슴돠·”
“아씨 절정 서러워서 살겠나·”
한편 견 노는 잘 싸웠다·
우창 좌검의 기묘한 쌍병은 각기 상산검과 상산창이라는 무공이다·
창과 검이 강맹 일변도로 직선을 그리니 두 팔이 뻗는 직선이 부채살처럼 차르륵 펼쳐진다·
사파 무사들이 저마다 제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른다·
창끝과 검극이 파고들었음에도 몸에 난 구멍은 못자국처럼 작은 점 하나다·
정확히 급소를 톡 찍고 빠지는 고통에 죽어가도록 만드는 지독한 손속이다·
적이 들길래 달려들었던 사파 무사들이 그에 주춤 견 노를 중심으로 둥글게 공터가 만들어진다·
견 노와 적들 사이에 드러누운 사파무사들이 심장에 난 쬐끄만 구멍을 틀어쥐고 살아보겠다고 바르작거린다·
백웅단 무사들이었다·
병법을 거들먹거리는 조광앙이 대열을 짰으니 당연히 피해가 가장 적은 후방에 제 단원들을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 조광앙이 제 수하들 죽어나가는 꼴을 두고만 봐야겠는가·
초절정이라 하나 아직 어린 계집 노련한 초절정 후기 초절정쯤 되면 그 작은 계단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려주겠다고·
그리하여 조광앙이 버럭 호기롭게 소리를 치며 등장한다·
“감히! 사도련의 건아를 해치느냐! 네년 음 누구냐 이 늙은 놈은!?”
분명히 천화검이 떨어져내리는 꼴을 보았는데 정작 들이치고 나니 천화검은 온데간데없고 웬 늙은이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끄으으 바닥을 기는 부하들 목과 가슴을 틀어쥐었으나 출혈은 크지 않은 것 같다·
이미 심장에 구멍이 났으니 살기는 이미 글렀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직 살릴 가망이 있어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조광앙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조광앙이 땅을 박차 소리를 지르며 전의를 돋군다·
“오냐! 늙은 놈아!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이다!”
견 노는 들어 올린 창끝으로 응수한다·
그리고 창을 겨눈 손등 위로 피어오르는 찬란한 광채 납작 넙데데한 지상의 별·
강환이었다·
조광앙이 달리던 속도 그대로 뒤로 물러나는 경이로운 기예를 선보인다·
끼익· 실제로 난 소리는 아니나 눈으로 보고 들리는 듯한 눈으로 듣는 소리다·
그야 사파는 강약약강!
강자에게 물러나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 선배님께서는 성함이 어찌····”
“왜? 늙은 놈이라며?”
“그 전장에서는 다들 그 정도는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전장에서 만났으니 내 손속을 원망할 필요도 없겠지·”
“젠장! 고수를 숨기다니! 이 비열한 새끼들! 이러고도 정파라고 한단 말이냐! 정정당당하게 다 까고 싸워야 할 것이 아니냐!”
도대체 사파에게 정파 무인이란 뭐 하는 모자란 놈들로 여겨지는지 궁금해지는 발언이었다·
조광앙의 면상을 굵은 땀방울이 또로로로 굴러 가로지른다·
허허실실!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구나!
그러나 조광앙 역시 병서를 수십번 넘게 읽어 달달 외운 (자칭) 병법의 대가다·
위기에 몰린 두뇌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가장 뛰어난 계책을 찾아 분주하다·
“쳐라! 백웅의 용사들아! 적은 하나 우리는 여럿이다! 무한창파를 펼쳐!”
무한창파· 무한히 밀어치는 거대한 파도라는 뜻으로 여럿이 다수를 상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합격진이다·
“죽여!!” “우리는 백웅!” “사도건아 사천당립!”
대단히 불온한 외침 하나가 끼는 통에 견 노의 표정이 확 일그러진다·
사파 새끼들이 돌아버렸구나!
일단 대가리 놈의 심장부터 뚫어놓아야겠다고 그 순간 견 노의 표정이 멍하다·
좌우로 움직이며 합격진의 자리를 잡던 사파무사들 중 그나마 몸놀림이 날래다 싶은 놈들이 돌연 뒤로 돌아 빠져나갔기에·
단주인 조광앙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광앙의 머리는 충실하게 계책을 냈다·
삼십육계 중 제 삼십육계 주위상계!
각이 안 나오면 아까워하지 않고 튀어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명령을 내리면 적도 뻔히 대비를 하는 법·
백웅단의 정예들에게 무한창파란 합격진을 펼치라는 소리가 아니다·
답이 없으니 아랫것들 던지고 빠지라는 명령이다·
곧장 전투단을 헤치고 다급히 나아간 조광앙이 문정역을 붙든다·
“당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쳐야 해!”
“그 무슨 소리냐! 갑자기-”
“숨은 고수가 있었어! 화경의 고수가 숨어있었다고!”
그에 문정역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화경 하나쯤은 셋이서-”
“강수양은 누가 상대하고!? 서문청 그 계집은!?”
“절정 놈들이 합격진을 펼치면-”
그에 조광앙이 가슴을 마구 쳐댄다·
“그럼 저쪽 절정은 누가 상대하는데!”
“일단 전투단의 일류를-”
“차용증 돌려막기냐! 삼류까지 내려갈 셈이냐고! 전투단이 몰살당하게 둘 작정이냐! 살릴 수 있는 놈은 살려야 할 거 아냐!”
칼 같은 삼십육계·
사실 조광앙의 판단은 지휘관의 모범과도 같았으니 괜히 병서를 읽은 놈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안 되는 싸움이면 손실이 얼마든 간에 당장 그만두고 물러나야 한다·
과거 그리고 미래에 얼마나 많은 지휘관들이 피해에 매몰되어 도망을 치지 못하다 전투를 말아먹었는가·
삑삑!
마침내 문정역이 퇴각 신호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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