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90
진정한 사도건아라면 퇴각에 있어 한 점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퇴각은 그저 다음을 기약하는 행위 현재의 비웃음을 견뎌내고 다시 힘을 길러 복수하겠다는 열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는 절대 도망 혹은 도주가 아니다·
적에게 등을 돌려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희망찬 행진이다!
“퇴각! 퇴각하라!”
“퇴각 신호다! 가자!”
“각자 산개하고 염방으로 모여!”
백웅단 백호단 두 백급 전투단과 흑웅단 흑급 전투단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어쩔 줄 모르고 적에게 붙들려 당황하는 흑웅단 놈들과는 달리 백급 전투단은 ‘오 기다리고 있었수다! 돌격! 앞의 반대로!’ 하며 곧장 사방으로 흩어져나가는 것이다·
“적이 도망친다! 잡아 죽여! 살려두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놈들이다!”
강수양이 역시 사파의 이러한 속성 절대 원한을 잊지 못하는 쪼잔함을 알기에 곧장 고함으로 사태를 알린다·
“와아아!!”
그에 정파 무인들의 기세가 확 살았다·
당연한 소리지만 굳이 칼을 들고 베어야 한다면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상대하기 훨씬 수월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은 뒤를 보지 못하고 관절은 등 뒤로는 힘을 쓰지 못하니까·
그러니 아무런 반격 걱정 없이 푹푹 찌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청의 동공에서 기이한 광채가 번진다·
일견 보기에는 붉은 것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붉지만 푸른 녹음이 우거진 화마 뒤틀린 혈액의 색 수천 수백만 물고기들의 사체로 언덕을 이룬 해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죽은 생선의 눈깔이 발하는 죽은 광택이·
흉흉한 안광과는 달리 활짝 벌어진 입가에는 가지런히 단아한 치아가 새하얗다·
그리하여 베고 또 베고· 앗· 어딜 도망가?
그러다 갑자기 청은 도망치는 사파무인의 뒷모습이 그 등돌린 등판이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생각을 한다·
문득 청은 어딘가에 서 있었다·
흑백의 외곽선으로만 그려진 세상의 여기는 시장인가? 와르르 쏟아진 채소를 당당하게 밟고 선 익숙한 뒷모습과 팔다리 휘두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떤 노파· 차라리 죽여라 죽여라 이놈아· 애미애비도 없느냐 어찌 이러느냔 말이다·
그러자 분노에 찬 칼집이 호되게 노파의 머리를 후려친다·
널브러진 채소들 사이로 털썩 쓰러지는 늙은 몸 흑백의 세상 속에 머리에서 흐르는 피만이 오직 선명하게 붉다·
시뻘건 혈액이 시장바닥에 닿아 기이한 움직임으로 나아가고 갈라지며 굽어지고 휘고 만나고 교차하다가 끝내는 사람들이 숫자라고 부르는 글자의 모양을 갖추고야 만다·
일백칠십이·
그 아래의 뒷통수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뒷모습이 어쩐지 굉장히 낯이 익어서· 익숙한 태라서·
“헛·”
아리송한 기시감에 청의 고개갸 갸웃·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하긴 튀는 새끼들 뒷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지· 도망치는 놈 얼굴은 안 보이니까·
청이 직도를 크게 휘두른다·
도신이 허벅지 바깥으로 들어가 허벅지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노파의 아니 사파무사의 다리 잃은 몸통이 우당탕 바닥을 구른다·
청이 또 멈칫·
뭐지? 방금 뭔가 휙 스치고 지나갔는데?
하지만 떠올리려 해도 이미 지나간 꿈처럼 꿈을 꾼 것은 알겠지만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내용처럼 그저 찝찝하고 뒤숭숭한 뒷맛만 남길 뿐·
뭔가···
청이 꿈결을 붙잡으려 뇌리를 뻗는다·
그래 분명 내가 본 장면이 있었는데 그게-
-삑삑삑! 삑삑!
그 순간 요란하게 귓가를 후벼파는 호적 소리!
아스라히 잡히려던 어떤 것들이 순식간에 와장창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청의 눈가엔 불길이 한번 화르륵! 크게 번져오른다·
“어떤 새끼가·”
청은 신호용 피리 종류에 매우 몹시 아주 유감을 가지고 있다·
감히 신성한 전투에서 피리를 불어?
불려면 잘 불기라도 하던가!
층간소음!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리하여 청이 돌연 속도를 높인다·
“아가씨!”
창여인이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뒤쫒으려 하나 각다귀가 그 머리 꽁지를 콱 붙잡아 막는다·
“너이새끼 감히 여인의 머리채를-”
“보내 드려· 어차피 다 도망치는 판인데 위험하실 일도 없으실 걸· 즐기시게 놔 드려·”
“뭔 소리야? 즐기기는 뭘 즐겨? 무슨 마마께서 사람 베며 기뻐하는 살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껄일래? 연 파한테 이른다?”
“연 파도 아니 됐다· 너는 여인이면서도 진짜 눈치란 게 에휴· 됐다· 말을 말지·”
각다귀가 살래살래 고개를 젓는다·
창여인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은 달린다·
어차피 사파무사들도 달리는 상태라 청을 막는 이가 없다·
그러나 누가 어깨를 나란히 하길래 옆을보니 사파 무사다·
음 구십구 점· 아씨· 일 점 모자라네·
청이 직도의 손잡이 뒤편으로 사파무사의 옆구리를 콱 찍었다·
억 하고 우당탕 바닥을 구르는 놈을 뒤로하고 삑삑 요란하게 불어대는 저 새끼 저 새끼는 용서할 수 없다·
호적 부는 새끼는 다 죽여버려야 해·
그리고 마침내 청의 신형이 길게 쭈우욱 늘어지며 신경질 가득한 고함이 울려퍼진다·
“시끄러! 피리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연신 퇴각 신호를 보내던 문정역이 돌연 튀어나온 고함에 깜짝 놀라 검을 치든다·
캉! 칼날이 부딪쳐 불꽃이 튀어오른다·
“너는-”
“공공! 장소에선! 조용히! 제발!”
깡! 깡! 깡! 깡! 한 마디에 불꽃이 한 번씩 문정역도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난다·
물러나는 걸음마다 문정역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진다·
무슨 계집년이 힘이 이렇단 말이냐! 하고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절규를 막아내기 위해 굳힌 표정이었다·
달리 기교도 없는 순수한 궤적 그러나 거기에 담긴 힘이 천근 거력이다·
숙련된 검사일수록 사량발천근 즉 부드럽게 공격을 흘려 빈틈을 만들어내는 기예에 능숙한 법이다·
그러나 말이 넉 냥으로 일천근을 상대한다고 하지 구르는 바퀴에 칼을 비스듬히 댄다고 마차가 방향을 틀지는 않는 법이다·
칼이 부러지거나 칼 든 놈이 튕겨나갈 뿐이지·
칼을 비스듬히 대어 청의 궤적이 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문정역의 칼이 밀린다·
그러니 어째 일보일보 뒤로 물러나 피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잠깐! 나는 문정역-”
“문정? 그럼 나는 북경역이다 이 새끼야!”
깡! 깡! 깡!
문정역은 청의 분노를 이해할 수가 없다·
뭐지? 왜 이리 화를 낸단 말인가? 혹시 나도 모르게 무언가 천화검과 원한이라도 산 일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무인의 인생이란 모르는 곳에서 원한이 쌓이기 마련이다·
어쩌면 천화검의 지인을 베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물론 삑삑 신호용 피리 소리가 청의 분노를 이끌었을 뿐이지만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무인이라 해도 이러한 연유를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갈! 검도의 선배에게 할 소리더냐!”
“헹· 선배는 개뿔· 사파 새끼를 선배로 둔 적은 없거든? 해준 거 하나도 없으면서 대우만 받으려는 놈들이 선배 타령이지·”
“뭣이야?”
“자 문답무용! 월광검 아니 지옥 아니 그래 참월도 딱 참월이네!”
청이 어느새 친숙해진 거대 식칼 직도에 척 찰떡같은 이름을 붙였다·
“가자 참월도!”
문정역은 청의 허리가 콱 비틀리는 모습을 보았다·
기이할 정도로 팩 돌아간 오른쪽 어깨·
어찌 사람 관절이 저러나 싶도록 아예 왼쪽 어깨 너머로 직도를 쥔 오른손이 빼꼼 들여다보인다·
아무리 유연해도 저게 가능한 자세인지는 둘째치고 안 그래도 힘만 센 년이 아주 온몸을 비틀어 칼을 쏘아낼 준비를 마친 것이다·
문정역이 아예 검신에 왼손까지 턱 얹어 비스듬히 내민다·
그리고 깡!! 격렬한 충돌·
“헉· 참월아?”
칼날이 뚝 부러져 손잡이 위로 한 치만 남은 참월(이었던 것)이 남았다·
복주제일검쯤 되면 병기도 아무 검이나 쓰지 않는다·
그러나 청의 참월도는 동네 철장이 대충 무쇠 두들겨다 만든 싸구려다·
강기 대 강기의 싸움에서 신병이기의 중요성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청이 분기에 가득 차 소리쳤다·
“감히 내 애병을! 용서할 수 없다!”
참월에게 자아가 있었다면 ‘뭐? 본 도가? 애병?’ 하고 되물을 소리이며 지금은 저승에 있는 직도의 원래 주인도 ‘저거 완전 날강도년이네’ 하고 혀를 찰 소리다·
그러나 병기는 말이 없고 죽은 자는 더더욱 말이 없다·
“흥! 무기를 잃고는 기세만 살았구나!”
문정역의 눈빛이 번뜩인다·
기회! 검수가 검을 잃었으니 음? 검수? 왜 검수가 직도를 애병으로? 대체 왜?
돌연 치미는 의문점에 문정역의 칼끝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흔들리건 흔들리지 않았던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병기를 잃은 천화검이 반사적으로 제 오른쪽 손바닥으로 검을 붙잡으려 들었으니까·
천고의 기재라더니 빈손으로는 당황하고야 마는구나·
잃으려거든 왼손을 잃어야지 하고· 문정역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 순간·
깡!
깡? 문정역의 면상이 멍청해졌다·
그야 초절정 후기가 검강을 듬뿍 담아 휘두른 검을 수강을 둘렀다고는 해도 맨손으로 잡아챌 수는 없는 법이니까·
순간 청의 왼손이 문정역의 복부를 강타한다·
문정역의 몸통이 비수 비(匕)의 형태로 뒤로 훨훨 날아간다·
문정역의 뇌리에 문득 사사의의 주름살 자글자글한 얼굴 그 억울함과 답답함으로 숨이 넘어가려던 표정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화검 그년이 소수마녀라고! 진짜라고! 진짜 소수마녀라니까! 진짜야! 진짜!!’
아·
문정역이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그게 왜 진실인데 말이 되냐고·
문정역은 억울하다·
그러나 억울해 할 시간도 없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천화검·
번쩍 들린 창백하고 길쭉한 손가락들 과연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더니·
문득 면사 너머로 비치는 혼불 아는 이들은 전륜이라 부르는 저주받을 마공의 부작용이다·
“왜 진짜 전륜-”
문정역의 말은 거기까지·
문정역은 머리에 손날이 파고들고 나서도 말을 이어갈 정도의 근성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성만 있다면 머리에 쇳조각을 박고서도 지전을 말아 피우며 여유롭게 좋은 시절을 추억하다 죽어갈 수도 있었을 터·
이래서 사람은 근성을 길러야 한다·
복주제일검 문정역· 머리가 갈라져 사망·
정예하고 노련한 무사일수록 앞장서서 도망을 쳤다·
아우들 던져주고 살아남은 똑똑한 형님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살았다는 안도도 잠시 대로에 못 보던 담벼락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가까이 도착하니 담벼락이 아니라 방패의 벽이다·
“멈춰라! 감히 국법을 어기고 병장기를 패용한 사특한 죄인들아!”
방패벽 사이로 장창이 튀어나왔다·
사실 중원 사람이라면 저 뒤로는 궁병이 쫙 깔려있다는 사실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다·
왜 갑자기 관부 놈들이?
“나리 저희는 무림인-”
“닥쳐라! 무림인은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더냐! 당장 병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지 못할까!”
“나리 관과 무림은-”
“이놈들! 화구를 열어라!”
장군이 사파무인의 말허리를 자르며 내리는 명령에 방패벽이 좌우로 갈라지며 화포의 뻥 뚫린 포구가 드러난다·
이 시대의 중원인은 포구 앞에서 갑자기 순한 양으로 돌변하는 습성이 있다·
그야 저 포구에서 날카롭기 그지없는 쇳조각 수천개가 날아올 테니까·
사람 둘은 앞에 세워야 세 번째 사람이 겨우 살아남는다고 하는 위력의 철편들이다·
“꿇겠습니다! 꿇겠습니다!”
사파무인들이 너도나도 무기를 집어던지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정파의 추적대가 밀어닥친다·
도망치던 놈들이 갑자기 꿇어앉은 모습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쪽을 향해 방열이 된 포구다·
정파 무인들도 도착하는 족족 얼어붙어 얌전히 칼을 집어넣는다·
“너희는 무엇이냐!”
“저희는 계림검파의 무인들인데···”
“아· 왕야께서 말씀하신 선량한 무술 사범들이로군· 사특한 무리가 무술 도장을 습격한다 하여 추포하러 나왔으니 이제 그만 안심하고 돌아가시게나·”
사파무인들의 표정은 팍 썩는다·
누구는 사특한 죄인이고 누구는 선량한 무술 사범이라니!
“어· 음· 수고하십니다·”
정파무인들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관부가 왜 편을 들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화포 앞에서 물러나기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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