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94
계림과 장산의 제자들이 관아 앞에서 진을 친 채로 사파무인들이 나오는 족족 목을 베었으니 누군가는 비겁했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계림과 장산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러하다·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피값을 물을 생각을 하고 갔다·
그런데 저네들이 한 번에 안 나오고 찔끔찔끔 나오는 것을 우리가 어찌하겠나·
아니면 제자들의 원수를 갚는 자리에서 적이 모두 몰려나와서 진형을 갖출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는 것이냐·
그건 정정당당이 아니라 저저능능 저능아나 할 짓이 아니냐·
아니면 관부와의 수상한 유착에 대해서 캐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공식적 입장은 이렇다·
관무불가침 모르시오?
관부에서 판단한 바가 있으니 한 번에 안 내보내고 분리했겠지·
안 그래도 우르르 뭉쳐서 사고를 친 놈들이니 한데 모이게 하기 싫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일개 무술 사범들이 무슨 권력이 있어서 관부를 조종이라도 했단 말씀이오?
계림검파 문주 강수양이 수시친왕의 교지를 받은 일은 아주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그 배후의 조종일랑 사실 계림검파가 뭐 한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친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우리 양민들은 그저 감사할 뿐이지·
그래서 요 며칠간 광서성의 사파 사업장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광서성 각 도시의 제일가는 정파 문파가 갑자기 미쳐 날뛰며 때는 지금이다 사업 확장의 시간이다! 하고 적극적 공세를 펼쳤으니까·
이미 사도련의 전투부대가 개박살이 난 꼴을 본 데다가 무림맹 전투부대가 지원을 오는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파가 없었으니 어째·
게다가 그렇게 돈을 처먹은 관리들도 얼굴을 싹 바꿔 각박하게 구니 그나마 조금 감정적으로 가까웠던(혹은 약점 잡힌) 관리들에게는 귀띔이라도 들을 수 있었으니·
저 높으신 진짜 높으신 곳에서 정파를 밀어주려 한다·
지금은 바짝 엎드려 폭풍을 피할 때라고·
아니면 이참에 사파 그만두고 정사지간의 애매한 지점으로 슥 갈아타든가·
분위기가 이러하니 이월 초 청이 광동성 광동진가에 찾아가려 한다는 말에 강수양이 아주 흔쾌히 그리고 꽤나 섭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파의 은인에게 아직 제대로 베푼 바도 없건만 벌써 떠나려 하시오?”
“에이 귀빈 대접도 하루이틀이어야 특별한 기분이 들죠· 계속 이러다간 진짜 아주 당연해져 버리겠어요· 막 손가락질 하면서 감히 천화검에게 이따위 대접이라니 하며 패악질을 부릴지도 몰라요·”
청의 소탈함을 익히 겪은 소탈함을 넘어 뭐라고 해야 하나 거지에 가까운 어쨌든 그러한 강수양이다·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구나 하고 허허 웃음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문주님! 소녀 우나람! 드릴 말씀이-!”
“안 된다·”
대제자 도달전이 우나람의 말을 끊었다·
“헉! 아직 소제는-!”
“천화검을 따라가겠다는 소리 아니냐?”
“역시! 제자의 마음을! 그렇게나 훤히 꿰뚤어보시는군요옷!”
“하아· 다른 때라면 모를까· 사파 놈들이 호시탐탐 빌미를 찾을 때가 아니냐· 이런 때에 계림 제자가 그것도 이 대 대사저가 광동에 드는 것이 영 좋지 못하다·”
“네····”
우나람의 어깨가 축 처졌다·
“형님! 다음에 꼭! 꼭! 꼭 다시!”
우나람의 말을 끊으며 도달전이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서문 소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맹의 지원부대는 도착하는대로 광동진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지금 진가장이 딱히 물리적 위협을 받는 상황은 아니라고 하나 사파 놈들의 꿍꿍이가 워낙 고약할 수 있으니 부디 보중하십시오·”
청이 계림검파의 최고급 객청에 들렀다·
작별 인사다·
“음? 떠난다고?”
“광서 요리는 이제 두루 섭렵했으니 광동 요리 먹으러 가 봐야지· 천하제일요리에 제일 가까운 게 광동이랑 항주라며?”
중원 오대요리란 지역별 특색으로 나눈 다섯 종류라 미식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중원 사대요리를 꼽으라 하면 일단 먼저 광동과 항주를 꺼낸다·
자기네 지역이 최고라 우기는 중원인의 영혼 속에도 고향 특별 점수를 빼고 양심적인 채점으로 가장 맛있는 지방요리라고 하면 역시 둘 중 하나를 꼽는 것이다·
“아이고 아가씨· 모처럼 두분이 오붓히 시간을 좀 보내시지 어디를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무슨 남녕에 이사왔어요? 어차피 자유도 집에 가야 할 건데·”
“크흠·”
자유가 느끼기에도 섭섭한 감이 있다·
대뜸 찾아와서 떠날 거라며 작별 인사를 날리다니·
청이 본래 만나고 헤어짐이 대단히 담백한 사람임을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미리 말을 해 줄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럼 또 봐·”
“또 보세·”
그렇게 인사 건네고 나왔더니 득달같이 달려드는 인물이 한 명·
“아이고오 이제 가시면 또 언제 영명한 옥안을 뵐 수 있습니까아· 그 약소한 것이나마 여정에 도움이 되시라고-”
하지만 청이 함을 열어보기도 전에 창여인의 손에 질질 끌려나간다·
“이 새끼는 자꾸 금은이 어디서 나서 뇌물이 솟아나는데·”
“길다가 주운 것이오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아아아·”
각다귀의 목소리가 쭉 멀어져간다·
청이 함을 열어보니 세상에·
칠보에 산호까지 더해 무지개색으로 화려한 장비녀가 척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금은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명품이다·
아니 이런 걸 자꾸 어디서 주워와?
혹시 중원에 신투 비슷한 뭐 신득이라거나 유사 업종이 있어서 남의 집에서 막 주워 오고 그러나?
청이 가볍게 콧김을 뿜으며 웃었다·
사실 그럴 리가 있겠나·
자유가 주라고 맡겨놓았겠지·
자기가 직접 건네기는 좀 민망했던 모양·
“내 곰탱이· 자기 다음에 봐·”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난주에서 신녀문은 멀지 않잖아? 일단 사문의 어르신들께 보고부터 올리고 네게로 돌아올 테니까· 내 사랑·”
“나는 안 사랑인데·”
나양결이 청을 지키겠다고 전투에 참여한 것만은 아니다·
나양결은 사파 무인들에게 희롱을 당한 당사자인 것이다·
백도로 분류가 되지만 정식 무림맹 소속이 아닌 천화전당이다·
그러니 본인과 사문의 명예를 위해서도 무조건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안 그러면 일방적으로 무림맹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 되어버리고 마니까·
같은 연장선에서 광동까지 따라가기는 좀 어렵다·
물론 그래도 지켜주겠다며 별동대까지 따라온 점은 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왕부의 고수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원해 달라붙었으니 사지를 불사한 애정은 조금 기특하다는 점수는 줄 수도 있겠다·
“그럼 또 봐·”
나양결이 제 입술을 찍어 후우 분다·
청이 손으로 튕겨내는 동작으로 응수해 준다·
그리고 나서야 인사 끝·
“서문 소저 몸 조심하십시오!”
“다음에 꼭 놀러오십시오!”
“광서제일주당의 자리를 두고 또 한 번 붙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웅하러 우르르 몰려나온 이들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응수해 준 후 청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땅을 박찼다·
—-
광동진가·
오대세가까지는 아니고 중원십대세가에 드는 이 가문은 유명세로만 따지자면 사실 오대세가에 결코 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태극권 때문이다·
태극권의 창시자 진씨는 누구라도 진가장의 문을 두드리면 태극권의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당의 개파조사 장삼봉이 진가 태극권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무당파 전용 장가 태극권과 태극검을 창안하기도 했고·
물론 진씨가 태극권의 진의를 전부 전수하지는 않았다·
가르침을 푼 태극권은 실전 무술보다는 건강을 위한 선도 체조에 가까웠으니까·
몸의 잠력을 이끌어내고 유연함과 근력을 기르며 동공의 효능으로 신체에 기를 깃들도록 하는 신묘한 체조다·
물론 십 년쯤 꾸준히 수련해야 유의미한 결과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한 효능이기는 하다·
하지만 워낙에 널리 퍼진 덕분에 양민들 역시 건강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휘적휘적 투로를 밟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니 광동진가?
아 진가 태극권의 그 진가?
이렇게 천하만민이 아는 유명한 집안인 것이다·
그런데 온 세상이 아는 유명한 가문인데 어째서 오대세가에 끼지 못 했느냐고 하면·
이는 무투가의 한계라고 하겠다·
무투가 개인의 한계에 대해서는 도구도 쓸 줄 모르는 덜떨어진 원숭이들은 하나같이 감히 소림 혹은 무학대사를 들먹인다·
무투로 천하제일에 오르지 않았냐고·
이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심지어 수학적으로도 심한 헛소리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고수가 되면 이러한 소리를 하는 놈들도 있지만 애초에 무투가는 고수가 거의 없을 뿐더러 만약 생사경을 넘었다고 쳐서·
무형권과 무형검 심권과 심검 중 무엇이 아플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기어권을 쓰려면 팔을 잘라야 하나?
그런데 무투가의 진정한 약점은-
상대의 병기와 부딪쳐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점도-
그래서 병기를 부딪치지 못해 받아치질 못해 피해다녀야 한다는 점도-
그러면서도 거리가 너무 짧아 지칠 때까지 피해다니다 결국 혼자 지쳐서 쓰러진다는 점도-
이 모두 아니다·
혼자서도 무능하지만 뭉치면 더욱 무능해진다는 부분이었다·
무투가 대 검객과 무투가들 대 검객들은 양상이 심각하게 다르다·
그래도 어찌 거리 조절 잘하고 공격을 잘 피해서 잘 달라붙어 잘 때리면 이길 수 있는 개인전하고는 다르다·
단체전에서야말로 무투가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뭉치면 서로의 회피를 방해해 칼을 맞고·
흩어지면?
원래 단체의 싸움은 흩어지면 죽는다·
그러니 광동진가에서 고수 개개인이 무력과는 별개로 진가의 전투부대는 아무래도 좋은 평가를 주기가 어렵다·
심지어 좌우로 큰 변화를 그리는 태극권의 보법을 더하면 아주 개판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런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십대세가에 이름을 올렸으니 오히려 유명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그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진가 일행이 무림대회에서 복귀했을 땐 푹 썩은 장원의 식솔들 뿐이었다·
주택이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급격하게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사람이 살지 않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사람의 시체가 놓이면 손상이 훨씬 더하기 마련이다·
혈교와 얽혔으니 좀도둑조차 출입을 꺼려 방치된 장원은 이미 폐가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하지만 진가는 망하지 않았다·
큰 행사에 오랜만에 중원 나들이라 하여 직계들이 총출동했으니 죽은 이들은 안타깝지만 충분히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고·
기울어진 장원을 새단장하고 세가보다는 무관의 성격을 갖더라도 널리 제자를 받아 성세를 되찾으면 될 것이라고·
그리고 사도련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사파라 해도 혈교에게 참변을 당한 진가장에 쳐들어갈수는 없다·
차마 마지막 양심이나 인지상정 같은 동정 때문이 아니라 그랬다간 정파 무림에서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파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시작은 장원 복구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이 하나둘씩 시체로 발견되면서부터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인부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그러다 결국 복구공사가 중단되고 나자 그 참변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다 다시 복구공사가 시작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인부들이 죽어나갔다·
아무리 많은 금은을 받아도 죽을 자리에 나서고 싶은 이는 많지 않은 법이다·
당장 수입이 끊긴 진가장에서도 복구공사 따위에 누군가 목숨을 걸 만큼의 재화를 내어줄수도 없다·
그러니 어째·
복구공사는 중단·
진가장은 계속 반쯤 폐허로 남았다·
반쯤 폐허인 무관에 누가 제자로 들어가고 싶겠는가·
물론 진가 태극권의 명성으로 들고자 하는 제자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파 방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제자를 모집하며 지금 입문하면 하나 더하기 하나 신공 더하기 영약이 무료 따위의 인심 좋은 행사를 벌이는 것이 아니겠나·
장원 복구도 못 해·
새로운 인력을 충당하지도 못 해·
광주 한복판 가장 좋은 목을 차지하고도 흉가 꼴을 면치 못하고 있는 판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쯧쯧 혀 차는 소리요 진가장이 망했다느니 하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과거에는 감히 진가의 진 자도 함부로 입에 올리기 어려워했던 양민들이었다·
그리하여 천하에 쟁쟁하던 진가의 명성도 스러지고·
금으로 칠한 현판도 기울어진·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나 혀를 차는·
진가가 세인의 농담거리가 된 지금에·
한 여인이 광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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