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1
청이 웃음기 가득한 소리로 묻는다·
“어찌 여인의 침상 아래에서 쥐새끼처럼 기어 나오시나요? 색마는 사형인데?”
“그· 그것이·”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망치를 내려다보며 청이 뒤이어 한 마디 덧붙였다·
“대답·”
참으로 대장부다운 한 마디였다·
대장부라면 역시 한 단어로 자신의 뜻을 전해야 하는 법·
그 박력에 망치가 압도되어 곧장 대가리를 처박는 것이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
진가장의 무인 중 유달리 개운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어떤 한자락이라도 떨쳐낸 듯이 홀가분한 새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렇게 홀가분했던 만큼 간밤에 우미가인신당에서는 곡소리 아니 비명소리가 널리 널리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양민들이 눈을 빛내며 입술이 부르트도록 소문을 내고 다녔더란다·
내 밤중에 소리를 들었는데 무슨 소린지 아나? 소름끼치는 그야말로 사람이 죽어라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이었던 게야· 그런데 내 그걸 어디서 들었는지 아는가?
크흠 목이 좀 마른데·
캬아· 살겠다· 그래 보채지좀 말고· 바로 우미가인신당이야· 토목선녀한테 저주가 내린 거지· 억울하게 죽은 진가장 사람들이 악귀가 되어 몰려든 게야·
그래· 귀곡성이지· 내 떠올리기만 해도 으 소름이 돋는 끔찍한 소리였네·
토목선녀? 몰라· 진짜 용한 무녀라면야 살아서 나타나지 않겠나·
지루한 중원에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빠르게 술을 사고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이번엔 내가 얻어먹을 차례라면서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하고 말을 꺼내놓는다·
거기에는 술 안 사고 남의 술상에 귀를 쫑긋 기울여 공짜로 얻어들은 이들도 많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중원에서 소문이 한 도시 내에서 하루면 충분히 쫙 퍼져나가는 이유다·
여담이지만 중원에서 도시 밖으로는 소문이 잘 나가지 않는데 일단 소문을 가진 사람이 도시 바깥으로 나가야 하고 게다가 남의 동네 소식이란 듣는 이가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고 설명하는 이도 재미있게 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 토목선녀라고 항우장사를 모시는 무녀가 있었는데 아 그 전에 진가장 참사에 대해 말해줘야겠구만· 그게···
어쨌거나 저자가 토목선녀 대 진가장의 저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결국 토목선녀가 이겼냐 저주가 이겼느냐 중원인답게 여기저기서 내기판이 벌어지기는 예사다·
이렇게 할 일 없는 겨울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니 그 소식이 살월파에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뭐야? 씹 왕우 왕우 새끼 불러와!”
그렇게 살월파 총관 왕우가 들자마자 연적이 하늘을 날았다·
저걸 피해? 말아?
왕우가 잠깐 고민하다 그냥 목을 움츠려 충격에 대비했다·
벼루면 모를까 연적 정도는 맞아줄만도 하니까·
쨍그랑!
연적이란 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가는 물을 담아두는 물건을 말한다·
당연히 물이 담겨있으니 깨져나간 연적 안의 물이 촤아악 뿌려진다·
뒤를 이어 살월파 문주 이왕출이 시퍼런 분노를 토한다·
“너 너! 뭐 하는 새끼야! 내가 직접 가서 해결하랬잖아! 총관 달았다고 이제 엉덩이가 무거워졌다 이거야? 언제부터 시발 애새끼들만 보내놓고 너는 나몰라라야?”
“···죄송합니다·”
왕우가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적신 물줄기가 또르르 이마를 가로질러 코끝에 맺혀 뚝뚝 떨어진다·
나름 고수인 왕우가 연적에 맞았다고 그 질긴 머리가죽이 찢어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분은 참 더럽다·
만약 중원에 자기개발서가 있었다면 살월파 문주 이왕출도 이런 모자란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부하를 추궁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원한과 반발뿐이지 진심으로 반성할 리가 있겠는가·
청의 고향만 봐도 알 수 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시발 내가 더러워서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해서 참고 있을 뿐 상상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진작에 죽고 또 죽고 죽을 놈이 한둘이겠나·
그러니 왕우도 솔직히 기분이 나쁘다·
제가 명령을 어긴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추궁은 전혀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시발· 이거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니냐·
나도 아우들을 일곱이나 잃었는데 위로는 못할망정 이런 푸대접이나 받고 있어야 하다니·
게다가 내가 망치 놈 아끼는 거 형님도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안 그래도 방 책사 파벌이 계속 커지고 있는 중이다·
이 때에 아우가 오른팔을 잃었으면 일단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진정하시지요· 문주님· 총관도 믿을만한 수하에게 지시하지 않았겠습니까· 왕 총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소·”
웬일로 저 새끼가 내 편을 들어주나 하고 왕우가 방 책사를 조금 다시 보는 순간도 아주 잠시 편을 들어주는 척 은근히 멕이는 것이다·
“일곱이나 보냈는데 개중에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적이 만만치 않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왕 총관도 당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왕 총관이 직접 갔더라면 모르는 일이겠습니다만· 왕 총관의 실력이 모자라면 가서 죽었겠고 뛰어나면 성공했겠지만 그래도 몸을 사려서 이리 무사하지 않습니까?”
“하 차라리 가서 죽었어야지!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왕우는 억울하고 분하다·
총관이 물러나고 나서 이왕출이 책사 방점명을 붙들었다·
“이보시오 방 책사· 그 토목선녀라는 년이 그렇게 고수였을까? 혹시 무슨 사문이나 그런 게 있어서 복수하러 오는 건 아니겠지?”
건들고 실패하고 나서야 무림의 격언이 떠오르는 것이다·
무림에서는(중략)조심해라·
그러나 방점명은 고개를 젖는다·
“그보다는 진가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뭐야? 그러면 진가장 놈들이 우리 수작질을 알아차렸다는 것이 아니오!”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으십니다·”
“어차피 진가장도 이미 심증으로야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제 물증을 잡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문주님께서는 모르는 일이시지 않습니까?”
“음?”
“왕 총관이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습니까? 문주님이 지시하였습니까? 아니면 제가 지시했습니까?”
그에 이왕출이 깨달은 표정을 했다·
“그렇군!”
내가 시킨 일이 아니다·
왕우가 저 혼자 판단해서 제멋대로 벌인 일이다·
“왕 총관을 넘겨주는 선에서 좋게 해결이 될 겁니다· 이제 저주는 못 써먹겠지만 이미 재미를 톡톡히 본 이후가 아닙니까·”
그리고는 방 책사가 킬킬 웃었다·
“진가장은 어차피 못 쳐들어옵니다·”
“어째서?”
“진가장은 무사가 없습니다· 직계 고수들만 쳐들어와도 열 명 정도지 않습니까? 그러면 진가장은 확실히 망할 테니까요·”
“그러면 우리도 망하지 않소?”
“어차피 금적방과 광주선방도 같이 일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세 사도 명문이 힘을 합치면 아무리 진가주가 화경의 고수라고 해도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다 무림맹이 움직이면···”
“그때는 저희 사도련을 믿으셔야지요· 사도련에서는 문주님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큽니다· 제가 살월문에 파견을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방 책사는 사도련에서 보내준 인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유능한 책사라도 허약한 서생이 텃세 없이 녹아들 수 있겠는가·
아무리 문주가 싸고돌아도 허약한 놈은 시비가 걸리기 마련이지만 사도련을 뒷배로 둔 놈에게는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역시 그대가 바로 내 장자방이오!”
“후훗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장자방의 본명은 장량 초한시기의 전략가이자 책사로 고금제일책사 제갈량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는다·
그렇기에 ‘그대가 내게는 장자방과 같은 사람이라오’ 하는 표현은 중원에서 지략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찬사다·
‘시발놈들 놀고 앉았네·’
그리고 장지문 너머 처마 아래 숨어서 이야기를 엿든던 왕우가 이를 갈았다·
나만 빼고 무슨 소리 하나 엿들은 것이 천운으로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잘린 꼬리 신세로 진가의 손에 넘어갈 뻔 하지 않았겠나·
이래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으니 항상 조심하라 하는 것이다·
—-
사파 놈들의 심문이 끝난 지금 진가주의 안색이 창백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보고 있단 말인가·
어찌 세상에 어찌하여· 이러한 끔찍한 광경이란 오십 넘도록 본 적이 없다·
내 천화검이 참으로 번듯하고 예의 바른 훌륭한 아이인 줄만 알았더니 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너무나 잔혹하고 끔찍한 행위에 진가주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달싹·
그에 청이 배시시 웃음을 짓는다·
참으로 어여쁜 미소지만 정파의 어른으로서 할 말은 해야 하겠다·
“크흠 천화검· 차란 뜨거워야 하는 것이지요· 어찌 차를 차갑게 먹는단 말이죠?”
“앗· 하지만 냉차도 냉차 나름대로 맛이 있는걸요·”
“냉차는 차가 아니에요· 차로 냉차를 해서는 안 됩니다·”
냉차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차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과일청을 타거나 과일을 우리거나 꽃이나 볶은 곡물을 우려낸 가짜 차들만 차갑게 먹을 수 있다·
진짜 찻잎을 우려낸 차는 차갑게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에이 진짜로 괜찮은데·”
“크흠·”
그 온화한 진가주마저 차마 어쩌질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더니·
무공도 인성도 외모도 완벽한 후배님이 이런 끔찍한 기벽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아니 이 정도로 끔찍한 단점을 가지고 있어야만 이렇게 뛰어난 신룡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인가!
하늘은 어찌 이렇게 훌륭한 아이에게 이리도 끔찍한 취향을 내리셨단 말인가!
진가주가 하늘을 원망하며 탄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이 물었다·
“그러면 무림맹의 지원부대가 도착하면 결판을 내시는 건가요?”
“음· 안타깝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지요·”
진자강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 사파 새끼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애꿎은 저주 탓으로 돌렸잖아요·”
그에 진가주가 쓴웃음을 머금는다·
“애초에 사파놈들의 수작인지는 알고있던 상황이었으니 이제 와 증인이 추가된다 해도 다르지 않고 그래봐야 저놈들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꼬리나 자를 테지요·”
진가주가 청을 위해 설명해 주었다·
살월문의 문주실에서 한 이야기 그대로였으니 거대 세가의 가주쯤 되면 이러한 정략에도 통달하고 있는 법이라서·
“그럼 이대로 놔두자구요? 저 놈들을?”
진자강이 분통을 터뜨리는 청을 온화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제 일처럼 화를 내 주고 있으니 참으로 갸륵하고 고맙고 기특하다·
마음 같아선 며느리 삼고 싶지만 솔직히 아들 중에 변변한 놈이 없어서 갖다 대기 미안할 정도다·
여광견 선배님이 딸처럼 아끼시는 제자를 수양딸로 거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제 더는 복구 공사를 방해하지 못할테니 진가도 후에는 과거의 성세를 되찾게 되겠지요· 장부의 복수는 아무리 늦어도 늦지 않다고 했던가요? 그때가 되면 나 역시 선봉에 서서 저 사파 놈들을 모조리 갈아버리고 말 테니까요·”
청이 사파 놈들의 심문을 떠올렸다·
사파 놈들이 뭐 의리가 있겠는가· 그런 거 없다·
불기야 진작에 불었고 진실인지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진가의 한풀이가 이어졌을 뿐이다·
음· 참 재미있었는데·
그렇게 안 봤는데 진가 분들도 좀 치시더라고·
하지만 청은 영 아쉽다·
그 표정을 본 진자강이 미소짓는다·
늙은이가 보는 젊음의 혈기란 이다지도 눈부시기에·
“무림맹의 지원부대가 오면 쳐들어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리하면 무림맹 무사들이 피해를 입지 않겠어요? 진가의 원한을 위해 무림맹의 건아들에게 피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말씀이었다·
사파 놈들을 맨손으로 갈아버리던 모습도 멋지셨지만 확실히 정면으로 전쟁이 벌어지면 다치고 죽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청이 누구인가·
악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집요하고 악랄한 천하의 악녀다·
“가주님· 그럼 쳐들어가는 거 말구요· 제가 떠오른 것이 하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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