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9
진가장에 새 현판이 올랐다·
천하진가(天下振家)·
웅장하게 틀을 가득 메우는 네 글자다·
일단 써 드리기는 했는데·
청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자신의 글씨가 좋다고들 난리지만 청의 입장에서는 고향 땅에서 늘상 보던 평범한 서체가 아니던가·
글씨를 공부해 본 적이 없으니 그 모양에 담긴 철학이나 심상도 없는 그야말로 겉만 흉내낸 껍데기가 아니겠나 하고·
무공이야 다른 무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익혀 날로 먹었다고는 해도 사실 초절정에 오른 깨달음 자체는 청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초절정 초월 초절정 초절청이니 주접을 떠는 일이 스스로 하나 이뤄냈다고 뿌듯해하는 요량이다·
목수 일도 괴물 그 자체인 신체 능력에 기대기는 했지만 요령 자체는 열심히 보고 해보며 스스로 익혔고 의녀 일도 그렇다·
하지만 글씨는 노력한 바가 전혀 없으니 그냥 써지는 대로 쓸 뿐인데 주변에서 아주 제 이마빡을 빠악빠악 세차게 두드리며 호들갑을 떠는 꼴이다·
그야말로 숨만 쉬어도 잘한다 잘한다고 아주 난리를 치는 꼴이라서 민망함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가주는 마냥 싱글벙글이다·
본래가 웃는 상으로 온화한 진가주지만 청이 보아온 꼴 중에 가장 신이 난 표정이었다·
“현판 글씨가 아닌데 괜찮을까요?”
현판에 쓰는 서체는 아예 몇몇 글씨들로 정해져 있다·
국법까지는 아니라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수준?
그게 아니면 근본도 없는 글씨로 현판을 집단을 대표하는 가장 첫인상에 고약하게 장난을 쳤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다·
“이건 내 살면서 본 어떤 현판 서체보다 뛰어난 글씨입니다· 내 장담하지요·”
하지만 중원 사람들에게 청의 고향 식 표준 서체라고 하면 그야말로 눈알이 튀어나올 만한 신세계다·
대충 무게 잡아 쓴 글씨가 아니라 한 획 한 획에 엄중한 세월이 깃들어 그 형태가 제대로 정립이 된 일파의 서체다·
현판에 쓰는 서체가 정해져 있다고는 해도 본래 덕 높은 고승이나 혹은 천자와 같이 높으신 분이 써 주는 글귀는 또 그보다 값진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청의 글씨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청이 천하의 악필이라서 이게 글자인가 낙서인가 수준이라고 해도 이는 공주님이 직접 하사하신 글씨가 아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거장을 모신 예의로 대우해드리고 싶지만 천화검은 부담스럽겠지요?”
“네·”
진가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는다·
이 소탈한 어린 천재는 제 능력에 대해서는 야박하기 짝이 없어서 늘상 겨우 이 정도인데요 하고 겸양을 부리는 것이다·
으레 청년 고수가 가지는 어떤 무례함 자신감에서 나오는 그러한 자만심이 없다·
그러니 어찌 어여쁘지 않을까·
도대체 여광견 선배님께 어찌 이런 선녀 같은 제자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은 어찌 여광견을 낳고 또 천화검을 그 제자로 들이셨단 말인가!
부럽다! 부러워 죽겠다!
원래 자식복이 천하 만복 중 으뜸이고 자식과 제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대모께서 무림대회에서 싱글벙글 어르신 다운 태도로 광견의 편린을 단 한 번도 내보이시지 않았으니 전적으로 말년에 제자복이 빵 터져서 사람이 유해진 덕분이리라고·
온화하고 점잖은 아비를 닮아 자식들도 어디 성품으로는 참 올바르다 평가를 듣긴 하지만·
자제분 성격이 참 좋으시네 하는 칭찬은 본래 어째 성격 말고는 좀··· 하는 욕설처럼 들리는 것이 애비 마음이라서·
청을 바라보는 진자강의 눈빛은 그야말로 청의 고향 그림책에서나 볼 법한 뾰족한 마름모꼴로 번뜩이는 꼴이다·
심하게 부담스러워진 청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진자강의 태도는 과한 것이 아니다·
현판을 바라보는 진가 사람들의 눈가가 붉다·
기울어진 현판은 진가의 꺾여버린 전의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죽어간 혈족들에 대한 추모이기도 했기에·
그렇기에 새로이 단 네 글자를 바라보는 진가의 심정은 단순히 멋진 글자를 얻었다 끝이 아니라 앞으로 다시 잘될 것이라고 막연한 희망을 품게 해주었으니까·
글씨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진가가 아직 건재하다고 과시하기 위함인지 아예 이례적으로 정문을 확 열어붙였다·
명문 세가쯤 되면 일개 양민이나 일꾼이 도구 들고 정문으로 들지 못함을 생각하면 아주 파격적인 조치라고 하겠다·
“와 글씨가 아주 명필이네· 이런 글씨는 대체 얼마쯤 한대?”
“꿈 깨· 금은만 있다고 되겠나· 다 인맥이여 인맥·”
“누가 갖고 싶대? 한 글자만 족자로 있으면 그게 얼마나 하나 궁금해서 그렇지· 왜 우리 조상님은 한 장도 안 남겨두셨나 모르겠네?”
“거야 후손이라는 새끼가 팔아치우려고 눈이 벌건데 남겨두겠어? 이야 글씨가 아주 시퍼렇게 노려보는 것 같네· 이게 바로 광동제일세가지·”
그렇게 진가의 본격적인 공사 시작·
—-
진가장 복구는 담벼락부터 시작이다·
낡은 기왓장 내려버리고 가마에서 나와 쓰인 적 없어 광택이 반짝반짝한 새 머리를 올려놓는 것이다·
거기에 벽면에는 바닷물 뿌려 먼지 씻어내고 잿가루를 발라 새로 단장하면 일단 내부야 시취가 돌건 어쨌건 밖에서 보면 반듯하니 새로 신축한 담벼락 같아질 테니까·
보란 듯이 기지개를 켜는 듯한 진가의 대규모 인원 동원이다·
아들 호소인은 어느새인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으니 청이 생각하기에는 아마 복구 공사를 돕기 싫은 게 아닐까·
애초에 스스로 본좌니 뭐니 하던 놈이다·
일꾼들과 어울리며 기왓장 나르고 올려 쌓는 장면은 상상이 안 되니까·
견포희는 뭘 해도 청만 있으면 즐겁다는 투다·
하지만 청은 영 재미가 없다·
어떤 기술을 요하는 일도 아니고 뚝딱뚝딱 두들기며 손맛을 보는 일도 아니다·
벽에 색칠하기는 안 좋은 추억뿐이고 기와를 올리자니 그냥 단순한 반복 작업의 연속일 뿐이라서·
그리고 꼭 청의 옆에 붙어 치대는 의매의 선업 오백 점에 가까워진 숫자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는 악업이 백 점이 조금 넘었던 의매가 벌써 선업으로 오백 점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있다니·
하지만 의매는 애가 모자랄 뿐이지 본성 자체가 사악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견포희의 숫자를 보면 어쩔수 없이 염휘영의 숫자 역시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 호소인은?
일천 점의 악업을 일천 점의 선업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것일까?
일천 점의 악업을 쌓고 일천 일백 점의 선업을 쌓아 일백 점이라면 그이가 과연 선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 반대로 일천 점의 선업을 쌓고 일천 일백의 악업을 쌓아 빨간 글씨로 일백 점이 넘어버리면 하던 대로 그냥 괴롭히여 죽여도 되는 악인이 될까?
단순히 더하고 빼서 결국 보석상이 금자 삼십 개 손해라고 쳐도 되는 문제일까·
멍청한 소리 한다고 코웃음치던 무천대제 혹은 무청대제의 환상이 떠오른다·
대체 그 영감님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머저리 같은 소리라고 일축할 수 있었을까·
기와를 얹던 청의 손이 느려지다 결국엔 그대로 멈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파르르 떨리는 손에 견포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묻는다·
“의매? 어디 아파?”
“응? 아니· 그냥· 좀· 기분이·”
“기분이? 그럼 안 돼! 어떻게 하지? 내가 안아줄까?”
“어? 응·”
의매의 품에 안겨있자니 조금은 진정이 되는 기분이다·
하지만 계속 미뤄둘 생각인가?
염휘영의 정체를 알고서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피해 왔다·
다행히 엄마는 그만큼 충격적이라서 으 씨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막 돋네·
아닌가? 내가 잘못한 건가? 만약에 구녕이나 난아가 엄마라고 했어도 그렇게 소름이 막 돋았을까? 이거 남성 혐오 아닌가?
아니 아니지· 또 피하려 들지 말고·
청이 본능적으로 멀리멀리 피하려 드는 정신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생각하기 싫다 해서 계속 피하더라도 끝내는 피할 수 없을 때가 오고 말 테니까·
“가주님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려구요·”
“괜찮은가요? 안색이 안 좋은데·”
“그 조금요· 그래서 일찍 쉬려구요·”
“음 마음 같아선 객청을 내 주고 싶지만 아직 악취가 돌 테니까· 푹 쉬고 혹여 계속 좋지 않다면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니 일단 몸부터 추스리도록 하세요·”
진자강이 자상한 태도로 푹 쉬라 격려를 해 준다·
그렇게 의매 품에 안겨서 귀가·
푹신한 침상 위에서 의매 품에 안겨 조금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하니 음·
착한 일 많이 하면 나쁜 짓 좀 해도 괜찮다고 할 수 있나?
선업이 일천 점쯤 되면 심심해서 선량한 양민 죽여서 일백 점쯤 까여도 여전히 구백 점은 되지 않나·
한편으로는 말도 안 되는 비약이라는 생각 역시 든다·
사람이 사는 방식이란 무슨 화면 속 지문을 고르듯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선택의 연속이 아닌 것이다·
선업이 높은 사람은 가만히 놔 두면 계속 선업이 높아지기만 할 테고 왜냐면 선한 사람은 계속 선량한 삶의 방식을 고수할 테니까·
악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갑자기 정신이 홰까닥 돌아버리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어떤 충격적인 계기가 있지 않는 한에야·
하지만 바뀔 수 있잖아?
다들 바뀌지 않았어?
의매가 아들 호소인 그 새끼가 할아범이 설가 상회의 탈주자들이·
내가 죽인 그 모든 악인들이 킬킬거리며 재미삼아 고문하고 쓰레기처럼 내버린 그 사람들 역시 바뀔 기회가 있었을까?
내가 나는·
나는 선량한가?
살귀 그것도 쾌락 살인마· 그냥 재수가 오지게 좋았을 뿐인····
“의매? 의매!?”
“어?”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청이 문득 정신을 차리자 몸이 부서져라 꼭 껴안고 있는 견포희의 품속이었다·
“의매 조금 죄지 않아?”
“아· 정신이 들어? 의매 엄청 떨었어· 식은 땀을 막 흘리면서·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또 발작? 신교에 있을 때처럼 또 그런 거지?”
청을 들여다보는 견포희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견포희의 눈동자에 비치는 청 역시 같은 표정이었지만 청은 어쩐지 의매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느라 눈치채지 못한다·
아씨 이럴까 봐서 생각하기 싫었는데·
하지만 사람의 사고가 생각하기 싫다고 해서 정말로 뚝 관심을 끊어먹도록 생겨먹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애써 떨치려 해도 계속 생각하기 싫은 더러운 생각들이 계속 꼬리를 문다·
청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의매· 가슴 만져도 될까?”
부끄럽지만 도망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이 숫자를 믿어야 하는 건지·
믿는다 하더라도 왜 대체 왜 나한테 이 새끼 나쁜 새끼에요 이 분은 착한 사람이에요 하고 가르쳐 주는 건지·
보여주려면 선업 악업 따로따로 구분해서 보여주든가·
굳이 합쳐서 사람 기분 더럽게 헷갈리고 짜증 나게 만드는 건지·
나는 모르겠고 그냥 가슴이나 주물럭거릴거야· 하고·
—-
본격적인 진가장 복구 공사가 시작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집단이 또 하나·
광주선방이다·
살월파는 일단 관망중이고 금적방에는 큰 재앙이 닥쳤고 또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닥치는 중이다·
하지만 서로의 사정은 모른다·
세 사파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아서·
좋지 않다 수준이 아니라 사실 같이 삼대 사파로 묶이는 일 부터가 불쾌한 사이다·
한 봉우리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만이 존재해야 하는 법· (호랑이들의 의견은 다를 수 있다·)
진가를 몰아내고 나면 결국 광주 땅의 패권을 쥘 세력은 단 하나 뿐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광주선방주는 아예 대놓고 몸을 사렸다·
돌아가는 꼴을 보고 진가가 물러날 때까지 힘을 비축하다가 나중에 뒷통수를 치겠다는 속셈이다·
물론 그 속내가 워낙 뻔하다 보니 사실 남은 두 세력도 속이 부글부글 진가만 쫓아내고 나면 손잡고 저 새끼부터 족치자고 무언의 합의가 된 상태였고·
하지만 그것도 진가를 쫓아내고 나서의 이야기다·
이렇게 진가가 꿈틀꿈틀 용틀임을 하며 다시금 웅비할 기색이면 아무리 구경이나 하다 통수 쳐서 광주 먹겠다던 광주선방도 마냥 구경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 사람은 살던 대로 산다·
선량한 사람들이 불쌍한 이를 보면 꼭 멈춰서서 돕게 되는 것처럼 악독한 마음씨를 가진 놈들이 하는 행동도 짜 맞춘 것처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전에 재미를 본 방법을 그대로 쓸 뿐이다·
다만 이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적어도 일전에 수작질을 부릴 때는 도시 내에 청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청이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글줄이 막혀서 나가지 않으니 영 답답한지라 오늘 밤은 쭉 붙들고 있으려고 합니다·
벼랑끝 전술을 아십니까? 약속으로 배수진을 쳐 보겠습니다· 내일은 오전에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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