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12
보통 선방이라 하면 배를 만드는 제선(조선) 빌려주는 대선 사무역이라 쓰고 밀무역이라 읽는 잠상 대놓고 해적질의 성과를 자랑하는 해상 강도들 등의 집합체였다·
해궁대선은 광주 제일의 대선방이다·
문지기 둘이 피거품을 뿜으며 나뒹구는 그 사이에서 청이 해궁대선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현판은 단체의 얼굴이자 자존심이다·
광주선방의 간부들은 동업자 겸 경쟁자들이니 은근히 서로 자존심 강한 여러 부자들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그 결과 중 하나가 궁전에나 붙을 만한 화려한 현판이다·
유명한 서예가를 초빙하여 글씨를 쓰고 그 틀은 최고급 적단을 사용하여 대대손손 물려줄 만한 튼튼한 귀물을 짜냈다·
그러한 이유로 해궁대선의 무사들에게는 재앙이 덮쳤다·
터더덕! 현판에 도검이 박힌다·
나무에 박힌 도검이란 본래 빼내기 힘든 법이라서 어어 하는 사이 청이 대궁대선 네 글자를 힘주어 앞으로 민다·
거대한 성벽이 들이닥치듯 무사 여럿이 일제히 나동그라진다·
그 위로 부웅 떨어져내리는 망치머리가 골반 한편을 내리찍었다·
와그작·
골반의 뼈대 반절이 폭삭 주저앉았다·
오래 살아봐야 몇 달·
운수가 좋아서 살더라도 평생 한쪽이 축 처져 내려앉은 짝궁둥이로 살아야 할 터다·
그 운명을 직감한 모양인지 아악 모골이 송연해지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망치머리가 다시 솟구쳐오른다·
그러다 멈칫·
필사적으로 팔다리 저어 물러나는 무사의 가랑이로부터 빠르게 짙은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었기에·
청의 얼굴에 떠오르는 선연한 경멸·
망치는 다른 무사의 어깨를 빻고 대신 현판의 곧은 테두리가 장성처럼 땅에 깊이 박혔다·
무릎의 압제에서 벗어난 종아리 두 개·
떨어져 나간 신체가 맞이한 자유를 만끽하며 바닥을 나뒹군다·
“그물 그물을 던져!”
청이 흠칫하다가 이내 그물 뭉치를 한아름이나 품에 안은 채로 달려오는 무사들을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찬다·
조업용 그물을 땅에 던지려고 해봐야 그게 잘 될 리가 있겠는가·
청의 근처에도 못 오고 맥없이 바닥을 뒤덮어 괜히 고통에 신음하는 무사들과 엉켜 괜한 고통만 되려 키울 따름이었다·
침입자에게 달려들어서 바닥을 뒹굴고 이 꼴이다·
한솥밥 먹던 식구를 잃은 슬픔과 분노보다 정체불명의 토목신녀와 그 시녀쯤 되는 고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지는 순간이다·
용기보다 두려움이 커지는 때가 바로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하는 순간과 같다·
그렇게 나 살려라 각자도생 도망치는 가운데서도 그래도 호위대장이라 하는 무인은 나름의 기개가 있기는 했다·
“제가 막겠습니다· 도망치십시오!”
기개만 좋았다·
호위대장이 한 합 만에 하늘을 날았다·
도망치랬다고 정말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망치던 해궁대선방주의 등짝을 덮쳐 둘이 하나로 나뒹군다·
참으로 눈물 나는 충정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뒤엉킨 와중에서도 방주를 몸으로 덮어 보호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청이 무심히 걷어차 덮개를 치운다·
배를 걷어차인 호위대장이 몸을 부르르 떨며 연신 피를 게워내지만 방주는 그보다 제 안위가 더 중요했던 모양·
“잠깐! 살려 살려주십시오!”
“음·”
그러고 나니 방주가 쓰러진 사이를 틈타 혼자 내빼던 놈이 견포희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로 끌려오는 것이다·
잠시 후·
방주와 총관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청의 눈치를 살핀다·
눈치를 살펴봐야 면사로 가린 눈이 보이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고자 하면 시도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청은 삐딱하게 서서 둘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둘의 악업을 보았다·
망설일 필요 없이 쳐죽일 만큼의 충분한 악업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죽어야 하는데·”
돌연 청이 꺼낸 말에 두놈의 어깨가 크게 튀어올랐다·
“방주? 내가 그쪽을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날 설득해 봐·”
“그건-”
방주가 다급히 입을 연다·
하지만 쿵· 망치가 땅을 두드려 방주의 말문을 막았다·
“총관? 너는 방주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해· 내가 방주를 죽이도록 설득을 하란 말이야· 왜? 너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네 넵!”
“자· 그럼 시작해 봐· 방주부터 해 볼까? 왜 살아야 해?”
“제 제가 없으면 당장 광주의 어민들이 굶게 될 겁니다· 광주 선박의 셋 중 하나는 제 소유라서-”
“아닙니다! 어차피 저놈이 죽게 되면 주인 없는 배가 아닙니까? 오히려 저 새끼 때문에 광주 어민들이 가난한 겁니다!”
배를 빌리는 가격은 싸지 않다·
게다가 청의 고향식 표현으로는 정찰제가 아니라서 일단 선금을 내고 잡은 어획량에 따라 후불금을 또 내야 하는 구조라고·
그러니 어민들은 항상 먹고만 산다·
어차피 생선 잡는 일이 아니겠는가·
정 배고프면 생선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중원식 사다리 걷어차기다·
어부의 꿈이란 한 푼 두 푼 모아서 언젠가는 자신의 배를 마련하는 것이지만 배를 빌려줘야 하는 처지에서는 그래서야 어디 장사하고 먹고살겠는가·
그러니 만선으로 물고기를 가득 실어도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동전뿐이다·
그래서 막대한 수입을 올린 선주들은 그 돈으로 건달을 고용하여 반항하는 어부들을 두들겨 팬다·
어부에게 돈을 주느니 인간 말종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사람 패도록 시켜먹는 편이 훨씬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음· 마음 같아선 때려죽이고는 싶지만· 상인이 이문을 추구하겠다는 것이 뭐 죽을 죄까지라고 할 수 있나?”
그에 방주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에 총관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다·
“그뿐이 아닙니다! 일부러 배에 흠집을 잡아 배상금을 잡고 폐기할 배를 태워 죽여버리고는 뱃값 물어내라며 그 자식새끼 팔아먹는 놈입니다!”
“너 네놈이!”
“건달들 보내 가족들 두들겨 패서 약값이 필요한 놈들 데려다 잠상에 팔아넘긴 숫자가 오십은 넘을 겁니다! 이 천하에 악독한 새끼 같으니!”
“내가 혼자 했냐! 건달 모아다 돈푼 쥐어준 새끼가 누군데!”
“씨발 시키는데 그럼 안 해!? 안 하면 나도 죽여다 바다에 던져놓을게 뻔한데!”
정작 명줄 쥔 강도를 눈앞에 두고는 두 놈이 서로 나쁜 새끼라면서 싸우는 꼴이다·
총관이 악행을 폭로하면 방주가 또 격분하여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내가 누구한테 시켰냐 중간에 금은 빼돌려 한 몫 잡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았냐 내 총관이라고 그냥 눈감아 넘어가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냐·
그러니 딱히 궁금하지 않았던 악행들이 튀어나와 차곡차곡 쌓이고 만다·
듣자하니 진가가 건재하던 때에는 그래도 양심적인 선주들이 몇 있었던 모양·
그러나 광주선방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나서는 의문의 습격과 사고가 이어져 줄초상이 났다·
그리고 여기에 그 범인 중 하나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해를 못 하겠네· 나쁜 놈은 왜 진짜로 나쁜 놈이냔 말야· 이러면 죽여야 하잖아·”
어김없이 선한 이는 선한 이고 나쁜 놈은 나쁜 놈이다·
특히나 사파라고 하는 새끼들은 더욱이 틀려먹는 법이 없다·
애초에 그런 새끼들이 사파가 되는 건지 사파라 되었기에 사악해지는 건지·
청이 현판을 들어올린다·
그에 방주가 넙죽 엎드려 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청의 움직임이 우뚝 멎어버리고 만다·
숨 쉬는 일조차 잊은 사람처럼 어떠한 미동도 없이 불전 앞의 사천왕처럼 그렇게 딱 멈춰서·
진심일리는 없겠지만 만약 진심이면?
이제라도 개심하여 뉘우치면 앞으로 진짜 선량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면?
그때다·
“죽엇!”
총관이 품에서 비수를 뽑아 달려든다·
푹· 살을 가르는 소리는 귀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아 들리는 종류다·
방주가 떨리는 눈빛으로 제 뱃가죽을 파고든 비수를 내려다본다·
“너 너···!”
“이익!”
총관이 비수를 뽑으려 드나 방주의 생존 의지가 단단히 손을 붙들어 놓지 않는다·
그에 총관이 주먹을 휘두른다·
아예 위로 올라타 양 주먹이 얼굴을 두들긴다·
뻑 뻑 주먹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손길 커흑 커헉 숨넘어가는 소리 총관이 악을 질러댄다·
“죽어! 죽으라고!”
그러다 어느 순간 총관의 악업이 사 점 떨어지며 삼백이의 숫자가 이백 구십 팔 모든 숫자가 일시에 뒤바뀌는 것이다·
아주 극적인 변화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풉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냥 터진 게 아니라 아주 빵 터졌다·
혼자서 빵 터졌다·
어찌나 심하게 웃어대는지·
아! 그야말로 정말 웃겨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맙소사 이와 같은 명장면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혹여 가보로 내려오던 것입니까? 덕분에 정말 웃겨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바로 중원의 농담 대학사입니까? 완전한 농담 황제가 틀림없습니다! 내 배꼽 사라진 내 배꼽을 보상해 주십시오! 호흡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살인 농담입니다! 제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청의 그 강철 같은 복근이 다 아리고 눈물은 그렁그렁 시야가 물기로 흐릴 정도였으니·
꺄하하핫 맑은 웃음소리가 무사들의 신음소리를 다 묻어버리겠다는 듯이 그렇게 성량 높여 세상을 메운다·
총관이 오히려 겁에 질려 허우적거리며 멀어져간다·
그러다 턱 벽에 등이 닿고서는 어쩔 줄 몰라 그저 덜덜 떨며 두려운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하아아· 그래· 꽤 인상적 큭 크흑·”
거의 웃는 게 아니라 흐느끼는 수준이다 보니 여진이 남아 계속 웃음이 터진다·
그에 견포희가 걱정스런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다·
“의매? 괜찮아?”
“응· 뭔가 후련해졌네·”
그냥 죽일 놈 죽이면 그만인데 뭘 고민까지야·
청의 눈동자에 흉험한 색채가 긴 꼬리를 그리며 휘돌다 팡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흩어져서는 눈깔 전체에 광택이 되어 뒤덮는다·
겨울 낮의 맑고 밝은 청명한 하늘 불길한 흉성이 반짝 싱그러운 미소를 드리운다·
“역시 웃으면 복이 온다더니 괜히 엄격 근엄 진지하게 철학자 흉내를 내니 사람이 땅을 파고 들어가지·”
“누가 땅을 파? 땅 파서 도망가려고?”
견포희가 주변을 둘러보지만 땅 파는 인간을 찾지는 못한 모양으로 고개만 갸웃거린다·
청이 그런 의매를 옆구리로 잡아당겨 척 끼고서는 어깨동무로 목을 휘감고는 앞섶으로 희고 긴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것이다·
무려 무영신수 신투의 신묘한 금나수를 응용한 초신속 젖가슴 침투다·
역시 가슴 가슴이 최고라니까·
내 가슴 말고 남의 가슴만·
“꺄흣 간지러워·”
고혹적인 외모와는 맞지 않게 간지럼을 타는 견포희가 아이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튼다·
그러거나 말거나 옆구리에 여인을 끼고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청이 총관에게 상냥한 목소리를 낸다·
“총관님? 꽤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둘 중 하나는 죽는다고 했지 둘 중 하나만 죽는다고 했던가요?”
총관이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볼멘소리를 낸다·
“그 그런 약속이-”
“어허·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청이 총관의 말허리를 끊어내고는 웃음기 가지시 못해 여운이 남은 채로 말을 이어간다·
“내가 요즘 좀 우울했는데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멋진 악인참 잘 봤어요· 제 점수는요· 구십육점! 축하합니다! 통과!”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요· 착한 일 하셨으니 보답을 받으셔야지·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쁜 놈들 때려죽이시기를 바래요·”
“네 네!”
“대신 재산 챙기고 가족 챙기고 막 그럴 시간 없거든요? 내 눈에 다시 띄면 죽는 거니까 지금 그대로 멀리멀리 도망가시는 거예요? 알겠죠? 약속?”
“네! 바로! 바로 도망가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꺼져요·”
그에 총관이 헐레벌떡 지금까지 꿇었던 무릎이 모두 지금의 탈주를 위한 추진력을 모으기 위해서였다는 듯이 기민하게 내달려 자취를 감춘다·
“아· 맞다· 의매? 걔는 어딨어? 그 우리 길 안내 해주던· 음 이름을 안 들었네· 뭐 궁금하지도 않기는 한데·”
“아 걔? 저기 어디쯤 놔뒀는데····”
청이 견포희를 따라 시선을 돌린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꼴이라고는 신음과 고통으로 가득한 사위에 조업용 그물 아래 바르작거리는 중환자들만 가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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