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19
진해루 한 주루에 그것도 장지문으로 막혔다고 한들 한 층에서 정파와 사파가 나란히 연회를 여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것인가·
진해루주를 탓할 수는 없다·
무림맹 화룡조 인원들이 먼저 도착했다면 모르겠지만 엄연히 따졌을 때 선객은 살월문 간부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파 무인들이 꼭대기에 경치 좋은 자리 있냐며 쳐들어왔다·
그것도 개중 진설이 끼어있지 않겠나·
그러면 루주 입장에서 절대 살월문 이야기는 입에 담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사파 놈들 받느라 너희를 못 받는다고 할까?
그건 네놈들이 그리고 진가가 살월문만 못하다는 뜻이 되어버리므로·
안 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입에 담는 일부터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조심하거나 주의해 달라고만 해도 심각한 모욕이 될 수 있으니 그저 자리가 없어요 하고 돌려보내는 정도가 최선일 터·
하지만 꼭대기에 광동진가 전용 특실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진가 전용 특실이 비어있지 않으면 또 무척이나 이상한 그림이 되어버린다·
즉 자리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쩌랴·
그냥 기도의 힘으로 극복해야지·
부처님 옥황상제님 공자님 제발 별일 없게 해주세요 하고·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면 적어도 달리기로 승부를 보아서는 안 된다·
본래 승부란 제 강점은 살리고 상대의 단점을 부각시켜야 승리를 쟁취할 수 있으니까·
뱁새가 황새를 이기고 싶거든 체급은 감추고 귀여움 따위로 겨뤄야 한다·
하지만 견포희는 그렇게까지 영리한 인물이 못 된다·
그러니 이런 회식에서 청의 뒤를 술자리의 거인이자 음주의 화신이며 주취의 황새를 감히 쫓아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앗 만나서 반가워요· 반가우니 한 잔?
우리 얼굴 알고 이름 알면 친구니까 이제 친구끼리 한 잔·
자자 힘드신 분은 잔 덮어 두시고· 나는 아직 쌩쌩하다 더 받을 수 있다 천화검이 따라주는 술 한 잔 더 먹어봐야겠다 이야 전부? 사나이다 사나이 대협이다 대협· 짠· 짠짠!
앗 저쪽 주탁이 서운해 보이는데 잠깐 놀고들 계셔요 잠깐만 갔다 올테니까 그럼 잠깐 이별 이별주 한 잔? 자아 짠!
그리고는 또 술잔 하나 달랑 들고 쪼르르 달려나가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어요? 아 실례 자리 좀· 헤헤 자자 반가워요 일단 술 한 잔 받으시고····
그리하여 청이 회식 자리를 두 바퀴 돌았을 때 의매가 마신 술의 총량을 구하시오·
견포희는 당연히 청이 주는 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니까·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따라주는 술이다·
가족인 자신이 받지 못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청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꼴깍꼴깍 연신 술잔을 들이키는 것이다·
혹여 나는 못 받고 쟤는 받을까 봐서·
“앗 창빈이 심심해 보이네· 아· 술 따라준다고 약속했었는데· 나 잠깐만 갔다 올게요? 돌아왔는데 뻗어 있으면 안 돼요?”
청이 그렇게 넉살 좋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빈의 주탁으로 향했다·
부글부글 끓는 듯한 표정의 진설과 아마 그 원인이 분명한 조 형 그리고 술잔이라는 물건이 너무 신기해서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는 창빈을 향해서였다·
그때였다·
문득 와락 목덜미를 휘감아 몸을 던지듯 아니 몸을 던져 안겨 매달리는 견포희였다·
목을 붙들고 늘어져 대롱대롱 매달린 견포희가 청의 가슴팍에 턱을 기대놓고는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헤헤· 의매애·”
청이 깜짝 놀랐다·
견포희는 절대 청에게 기대는 법이 없다·
청이 불편할 만한 행동을 일체 하질 않는 것이다·
그러니 청만 안기고 기대고 더듬고 온갖 진상을 일방적으로 부리는 관계였으니 이리 아예 체중 실어 매달리는 견포희는 청도 처음 보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청은 놀랐을지언정 당황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술자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앗· 의매· 괜찮아? 어쩐지 계속 먹더라니· 취한 거 아냐?”
“응? 응· 취했나 봐· 나 취해써· 헤헤·”
“아이고 이거 눈 풀린 거 봐· 이기지도 못할 술을 계속 마셨어? 의매? 주기를 좀 몰아내야 어허 멈춰· 여기선 말구·”
제대로 내가 공부가 된 무림인이라면 운기를 통해 몸에 든 주정을 몰아낼 수 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술기운을 몰아내는 일은 대단한 실례이기도 하다·
어느 술보다도 더 독한 주정이 뿜어지면 술냄새가 아주 그냥 진동을 한다·
증기처럼 뿜어지는 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량이 약한 사람이 만취할 정도다·
그러니 정 못 이기겠다 실수하겠다 싶으면 잠시 바람 좀 쐬고 온다든가 하여 자리 밖에 탁 트인 곳에서 몰아내고 돌아와야 한다·
“그럼 어디서?”
“안 되겠다· 바람 좀 쐬고 와야지· 잠깐 바람 좀 맞자·”
“응· 바람 싫어 춥잖아· 근데 바람 쐬고 싶은 거지? 빨리 가자·”
“자자 기대지 말고 읏차·”
“앗· 안 돼· 내가 안기면 안 되는데· 의매 다리도 불편한데 그러면 안 돼· 그런데 음 불편해 답답하고 뭐야 이건· 좁잖아·”
“그렇게 민다고 가슴이 막 밀려나고 그러지는 않거든? 어허 가만히 있어요·”
“헤헤· 응· 아· 좋다·”
견포희가 청의 목덜미에 얼굴을 폭 파묻고는 헤헤 바보같이 실실 헤픈 웃음 소리를 흘린다·
장지문 열고 진해루 망루 난간에 기대니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피부를 스친다·
사실 광동 날씨로 겨울이지 청의 체감으로는 진작부터 봄이었다·
광주는 가장 추운 날의 가장 추운 밤에도 청의 고향 식으로는 영상 십 도가 넘어가는 온화하고 따뜻한 겨울 그리고 습하고 더워 그야말로 찜통 속에 든 듯한 혹독한 여름을 가진 동네라서·
물론 이미 거의 한불침에 이른 청이다·
휘이잉 귓가에 소리를 질러대며 거친 바닷바람 들이치는 광주 내 가장 높은 망루에 있으면 청이나 설씨들 정도가 아니면 그냥 춥다·
“추워·”
“자· 주기 몰아내고 빨리 들어가자·”
“응 싫어·”
“엥?”
잘 나가다 삐딱선이다·
뭐지 의매는 술 먹으면 반항적으로 변하는 구조인가?
“언니· 언니 해줘· 언니· 빨리·”
“음· 그건 좀·”
“그럼 나 안 가· 여기 계속 있을래· 막 여기서 혼자 추워서 덜덜 떨고 있을 거야· 나 얼어죽고 그러면 나중에 의매 막 슬퍼서 울텐데 끄흑·”
“얼씨구·”
“그러니까 히잉 빨리 언니· 언니 해 줘· 안 그러면 나는 여기서 얼어죽을거고 흑 끄흐윽·”
“의매 뚝· 아니 다 큰 어른이 왜 울고·”
“의매 아냐· 언니· 빨리·”
“어 음·”
청이 입을 뻐끔 또 뻐끔·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그런지 팔뚝부터 시작해서 전신에 소름이 빠르게 번진다·
차라리 아들 호소인한테 엄마 소리 듣는 게 낫다·
내 입으로 언니 소리 하려니까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지고 소름은 쫘악 돋고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손가락이 저절로 비비 꼬여 나비 모양 매듭이라도 지어질 기세다·
청이 대신 너스레로 은근슬쩍 뭉개본다·
“의매는 여기서 살아· 의매는 집에 갈 거야·”
“싫어? 왜 왜? 그 왜? 내가 언니답지 못해서 그래? 내가 멍청한 년이라서?”
“그게 아니라· 아니 잠깐· 멍청한 년이라니 누가 감히 의매한테 그딴 소리를 해?”
“아냐· 나도 내가 멍청한 거 알아· 환희궁에 있을 때 사저들이 항상 그랬어· 멍청하고 모자란 년이라고· 응· 으읏· 의매도 그게 창피하니까· 의자매 결국 가짜라고· 응·”
그리고는 눈물이 주르륵·
청이 아차 싶었다·
생리적으로 도저히 무리라서 그냥 의매라 부르고 있었을 뿐인데 본인에게는 또 그걸 항상 마음에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청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견포희가 다급하게 제 눈물을 훔친다·
“아냐 헤헤· 나 안 울어· 내가 취했나?”
“의매?”
“그으 귀찮다고 생각한 거 아니지? 아 그 가슴 만질래? 의매 가슴 좋아하지? 자 어 안 풀리는데 잠깐 잠깐만·”
견포희가 제 앞섶을 풀어헤친다·
그러나 손이 덜덜 떨려서인지 아니면 급히 풀러내다 오히려 줄이 죄고 말았는지 영 풀지를 못해 낑낑대는 꼴이다·
청이 그에 견포희의 손등에 지긋이 손을 올린다·
“의매· 아니· 후우우우·”
청이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언니·”
그에 견포희의 눈이 휘둥그레 어울리지 않게 도발적이던 음란한 눈매는 온데간데없이 땡그란 원형이 되어 청을 바라본다·
“이거 보여? 나 소름 돋은 거· 내가 언니 소리 안 하는 건 좀 개인적으로 좀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야· 의매가 창피해서 그런 건· 음 사실 조금 창피하긴 해· 다 큰 처자가 막 울고불고 이렇게 탁 트인 데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가슴을 까고·”
“응····”
“솔직히 말해 봐· 내가 의매를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그런 놈밖에는 안 돼?”
“놈이 아니라 년-”
“쓰읍· 어쨌든·”
“···아니·”
그에 청이 빙그레 웃으며 견포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사실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언니지만 그래도 내가 어디 가서 숨긴 적 있어? 저 안에서도 그래· 천화검 의자매가 견포희라고 난 한 번도 숨긴 적 없어·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고· 부끄럽든 창피하든 의매는 내 의매고 그래· 가족이니까·”
“응···· 그런데 창피하긴 한 거야?”
“가족끼리는 거짓말 안 해·”
견포희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가족이라고 하니 기쁜데 한편으로는 또 대단히 복잡한 내가 창피한가? 진짜?
“멍청해도 괜찮아· 나는 그런 의매도 좋으니까· 귀엽고 하찮기도 하고· 똑똑해서 막 잰체하는 의매보다는 항상 진심으로 날 아껴주는 의매가 백 배 천 배 좋으니까·”
“일백 일천인데···”
“이놈의 중원은 왜 일을 못 붙여서 안달인지 모르겠네· 의매 아니 그러면 견 매· 아니 성씨가 다른 걸 강조하는 것 같으려나? 그럼 그냥 희라고 할까? 희랑 희매 중에 어떤게 좋아? 언니는 내가 좀 힘들고·”
“그럼 희매···”
손윗누이의 호칭은 포기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청이 씩 미소를 지어준다·
“그래· 희매·”
“응!”
“내 마음 알겠지? 자· 그럼 이리 와·”
청이 견포희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 그래· 그런데 누가 희매한테 멍청한 년이라고 손가락질하면 아주 손가락 아니 손가락으로 되겠어? 그냥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아주 팔병신 되도록· 그리고 딱 말해· 내가 멍청한데 뭐 보태준 거 있냐? 내가 멍청하고 하찮긴 해도 그게 매력적인 부분이거든? 백치미 모르냐! 하고·”
“백치미?”
“원래 미인은 멍청하고 모자란 게 오히려 더 좋은 거거든? 나는 똑똑하고 잰 체하는 사람보다 내 희매처럼 하찮은 사람이 훨씬 더 좋아· 정도 있고· 그리고 내가 똑똑하니까 희매는 멍청해도 상관없잖아?”
“응? 그렇네· 헤헤·”
“자· 그러면 이제 주정 몰아내고· 춥지는 않지만 밖에 있기도 뭐하네· 들어가야지·”
“그으· 소매 먼저 먼저 들어가 있을래? 나 눈이 빨갛지? 잠깐만 쉬다가 들어갈 테니까·”
소매 여동생이다·
의매의 의를 계속 신경 쓰고 있으면서도 소매라 부르지를 못했으니 그게 또 얼마나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었겠는가·
내가 그리 확신을 주지 못했던가·
청이 조금 반성했다·
아주 조금만·
사실 희매가 멍청하고 아둔해서 남의 속도 모르고 혼자 오해한 잘못이 훨씬 크지 않은가·
그러니 굳이 과실을 따지자면 일 대 구 물론 청이 일이다·
“응· 너무 오래 있진 말고· 감기 걸릴라·”
—-
청이 견포희에게 말하기를 누가 멍청한 년이라고 손가락질하면 아주 손목을 갈아 버리라고 했다·
물론 이는 누가 욕하면 가만히 듣고 있지 말라는 소리다·
그러나 들은 사람이 견포희다·
그래서 견포희는 대단히 감탄했다·
역시 내 소매 소매는 항상 다 생각이 있구나· 어떻게 이럴 줄 알았을까?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끄륵·”
견포희의 발치에 사내 하나가 거품을 문 채로 널브러졌다·
한바퀴 반쯤 돌아가 꽈배기 같은 형상의 팔뚝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견포희가 그런 사내를 내려다본다·
아무런 관심조차 없이 그냥 길가에 널린 돌맹이라도 내려다보듯 무심한 눈빛이다·
“아· 소매 기다리겠다·”
견포희가 몸을 돌려 좌우 장지문으로 길게 늘어진 복도를 따라 자박자박 걸어나가다 돌연 멈칫·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흠흠 목청을 다듬고는 말하는 것이다·
“내가 멍청한데 뭐 보태준 거 있어? 그 나는 매력있지만 멍청하고 하찮은 백치 백치 몰라?”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