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22
사파의 악인에게 존엄을 지켜 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정파 무인의 십중팔구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악인은 족발에 맞아 죽어도 되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난색을 표하며 아무래도 그건 좀 심하지 않으냐고· 차라리 주먹으로 때려죽이지 그 얼마나 잔혹한 손속이냐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마저 우스갯소리로 만드는 최악의 살해 방식이니까·
죽을 방법이 없어서 족발에 맞아 그것도 일문의 주인이라는 연륜 있는 무인이 족발에 맞아 죽는다?
그러면 그 장례에서는 무어라 말하고 남은 이들은 어떻게 복수를 결의해야 겠는가·
족발에 맞아 돌아가신 문주님의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
문주님께 족발을 휘두른 간악한 원수를 처단하겠다!
그년의 족발은 내 검 앞에 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왕출은 위기 중에서도 큰 위기 그 어떤 무인도 아니 인류가 맞이한 적 없는 미증유의 거대한 위기를 맞이했다· (유인원들은 자주 맞이한 위기일 것이지만)
이러한 위기 앞에서는 주저앉는 이가 있고 오히려 이를 악물고 돌파하는 사람이 있다·
이왕출은 단연코 후자다·
일파의 수장쯤 되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살점 한 조각이 없어 반들반들 빤닥빤닥 깔끔한 돼지 뒷다리 뼈가 눈동자에 비치는 순간 이왕출의 잠재력이 폭발한다·
족발에 맞아 죽을 수는 없다는 간절함이 불러일으킨 기적이었다·
바닥의 목재가 부러져 디딤발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이왕출이 혼신의 힘을 다해 한 발짝-
그렇다! 단 한 발짝·
순간 전신의 근육이 근육이 부리는 힘줄이 힘줄이 붙은 뼈가 뼈가 이어진 관절들이 오로지 한가지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친다·
그것은 장엄하고도 조화로운 합창이었다·
과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
큰 근육들이 뼈와 관절을 당기는 그 절묘한 힘의 배분이 오히려 모자란 힘으로 그저 잔근육들의 등을 밀어 자리를 양보하는 대인배의 행보다·
그리하여 이름도 없는 자잘한 근육들이 일시에 폭발하듯 제 이상의 힘으로 불안한 균형으로 휘청하는 몸통을 붙든다·
그리하여 단 한 걸음·
다급하지도 않게 그저 대단히 자연스러운 형상으로 한 걸음 물러났을 뿐이지만·
휘잉· 수직으로 떨어지는 족발의 둥그스름한 관절부가 코끝을 스친다·
그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도 허락하지 못할 만큼 가까이에 최단 거리에 닿았다가 아래로 빠져 허공을 가른다·
여상한 뒷걸음질 작은 발걸음 하나·
하지만 이왕출에게는 위대한 도약이었다·
그 순간 거대한 깨달음이 찾아온다·
진정한 힘이란 그저 윽박질러 밀어붙인다 하여 따라오는 것이 아니로구나·
큰 것과 작은 것이 저마다 제 소임으로 움직여 각기 다른 뼈 각기 다른 근육 그 모든 것들이 오로지 하나 하나로서 기능을 완성해야만이 비로소 내가 온전한 개인으로 이 몸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로구나·
억지로 붙들어 몸에 잡아두던 내공이·
이를 정(精) 사람이 품은 기운이라 한다·
반복으로 몸에 기억했을 뿐인 기술이·
이를 기(氣) 물질을 취한 원리라고 한다·
구결과 원리로 이해했다 생각한 지식이·
이를 신(神) 정신이 품은 힘이라고 한다·
셋의 경계 내공과 머리와 몸의 ‘앎’이 하나로 녹아들어 온전한 하나· 온전한 이해 즉 일원(一元)·
그리하여 무인들이 말하는 온전한 이해 내공과 기술과 이해의 온전한 조화·
조화의 경지 화경!
스스로를 초월한 무인이 이제는 스스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
떠나간 족발도 갑자기 다시 찾아왔다·
빡!
한 방에 머리가 열린다·
위대한 화경 무인의 두뇌가 육신의 굴레에서부터 벗어나 생전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자유를 만끽한다·
족발로 인해 찾아온 깨달음이 족발로 인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유시유종 시작한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 마무리하는 미덕이다·
“엥· 뭐야· 왜 가만히 있어?”
청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족발을 쥔 팔을 늘어뜨린다·
빨갛게 맺혀 뚝뚝 떨어지는 것은 선지가 아니다·
기습을 피해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는데 신묘한 움직임으로 스르륵 물러나 벗어나더라·
그런데 그리고 나선 개개 풀린 눈빛을 하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멀뚱멀뚱 멍청하게 서 있지 않은가·
심지어 호신경조차 일으키지 않았으니 한 방에 대가리를 깨 버리고 말았다·
뭐지? 뭐 어쨌든·
두뇌가 탈출한 놈이 살아날 것 같지는 않으니 굳이 궁금해봐야 알 방법도 없다·
그러니 청이 문주가 어째서 저 혼자 기절 같은 상태 이상에 빠졌는가 궁리하는 대신 그저 의기양양 목소리를 높일 뿐이었다·
“적장! 물리쳤다!”
살월파 무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주님!”
화룡조 젊은이들도 정신을 차렸다·
“악적을 처단하자!”
그러나 본래 적장을 물리치고 나면 크게 소리쳐 외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에게 있어서 대가리의 유무가 생과 사를 가르듯이 집단에게 있어서도 대가리의 유무가 승패를 가르는 법이라서 그렇다·
문주의 대가리부터 깨져나갔으니 화룡조 젊은 혈기가 그야말로 충천(衝天) 한자 그대로 하늘을 찌른다·
병기 쥐고 달려나가는 화룡조 후기지수들은 이 순간 진정한 협객이 되었다는 해방감 젊은 혈기가 사랑하는 행위 일 위 악인참 협을 행하는 나 자신에 취하고 말았으니 그 자신만만함이 기로 발하여 악을 베어낸다·
그러나 문주의 머리통이 족발 뼈다구에 터져나가는 꼴을 본 살월파의 무사들은 이미 그 잔악한 손속에 질려버린 이후다·
사람의 죽음마저 모독하는 악독한 수법!
물론 청이 그렇게까지 사악하고 지독한 독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냥 급했고 마침 손에 쥐고 있었다·
고기를 예쁘게 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숙수가 초보였는지 그냥 뼈가 각목처럼 보일 지경으로 고기가 붙어있지 않았겠나·
뼈에 붙은 고기가 맛있는 법!
청이 아주 반딱반딱 광이 나도록 냠냠 뜯어먹고 있었으니 당장 급할 때에 손에 든 길고 묵직한 것이 얼마나 휘두르기 좋아·
가만히 놔두면 희매를 가지고 아옹다옹 말싸움이 벌어질 테고·
그리고 무림의 방식이란 말로 시작해서 피로 끝나기 마련이었으니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대가리의 대가리부터 깨 버리는 편이 좋다·
그래야 희매도 지키고 더불어 우리 정파 한가족 화룡조 조원들의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살월파 무사들이 제대로 칼을 맞대지도 못하고 곧장 등을 돌려 도망친다·
계단을 내려가다 훅 꺼지면서 우당탕탕 굴러가는 소리 와지끈 난간 부러지는 파열음과 함께 으아아 급히 꺼져 추락하는 비명소리 등등·
그나마 회식에 같이 참여했던 살월파의 간부들은 노련한 사파답게 숙달된 도망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좁은 복도 좁은 계단에서 뒤엉키지 않고 곧장 장지문 뚫고 반대 특실로 거기서 또 장지문 뚫고 난간으로 나아가 망설임 없이 훌쩍 뛰어내리는 것이다·
네모반듯한 진해루는 중원 양식 중에서 그러하다는 것이지 아직 원시 고대 미개한 수준에서야 결국 위에가 좁고 아래가 넓어 층마다 펼쳐진 기왓지붕을 내딛고 지상으로 신속한 퇴각을 선보인다·
그래도 아낀다고 데려온 아우들을 미끼로 던지고 몸을 빼내는 비정한 형님들이다·
물론 크윽 아우들아! 너희들의 희생은 잊지 않겠다·
이미 살월파 간부들의 머리속에는 ‘형님! 제가 막겠습니다! 물러나십시오!’ 하고 그저 의리에 한 몸 바친 비장한 장면을 기억으로 날조해 때려 박은 상태다·
이 때의 최대의 피해자는 족발에 얻어맞아 사망한 이왕출도 아끼는 직통 수하들을 잃은 살월파 간부들도 계단에 엉쳐 넘어져 꺾이고 부러지고 깨졌을지언정 목숨이라도 건진 판단 빠른 도망자들도 아니다·
이왕출은 어쨌거나 무인으로서 위대한 경지 화경 맛을 쪼오금 보고 죽었다·
그리고 이미 죽은 놈은 피해자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피해시체쯤 된다·
왕우를 포함한 도주 간부들은 어쨌거나 목숨은 건졌고 천화검의 흉악한 족발 공격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계단을 굴러 아프고 터지고 부러졌더라도 어쨌거나 목숨을 건진 살월파 무사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다른 방 뒤져서 애꿎은 특실 손님 잡으며 윽박지르던 살월파의 잔당들은?
이미 계단이 막혀 퇴로도 없고 그 이전에 벌써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상태다·
그러니 와아아 함성으로 들이닥친 정파의 정의로운 젊은이들이 문답무용 죽어라 이 사파의 쓰레기들아 하고 대뜸 쑤시는 칼날 앞에 도망도 못 쳐보고 쓰러져나간다·
더 억울한 점이라면 그에 환호를 보내는 특실 손님들의 반응이다·
역시 정파야! 믿고 있었다고!
압도적 감사! 그리고 또 감사!
여러분 덕분에 큰 수모를 면했습니다·
정파 최고 정파 사랑해요· 역시 큰일은 전부 정파가 한다·
우리는 안다 소림사 구파일방 무림맹·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파 건달들에게 아주 피눈물이 나는 소리였다·
저 새끼들이나 우리나 어차피 사람 찔러 먹고사는 새끼들인데····
그리고 여인 하나를 둘러싸고 발길질을 하고 병기를 내리치며 신나게 두들겨 패던 살월파 건달들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운명이라기보다는 더 기구하고 비참한 꼴을 당했지만·
족발에 맞아 죽은 놈들 우르르 추가·
“건달이라는 새끼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여인을 패곤· 입만 열면 사나이같은 소리 하는 새끼들이 아주· 괜찮아요? 소저?”
그에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아무런 표정 없는 눈동자가 바닥에 누워 청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감사합니다· 랑랑에게 구명을 베푸신 대협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서문청이라고 해요·”
“서문청이라면 서 문청입니까? 서문 청입니까? 중원의 보편적 작명 양식에 따라서 후자라 하신다면 당신이 바로 그 천화검 서문청입니까?”
“음· 그 천화검이 어떤 천화검인데요?”
“머리가 세개 혹은 다섯 개 달렸다고 하는 괴인입니다· 하지만 본 랑랑은 그것이 랑랑의 오해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수의 두부를 가진 괴인이 아니라 머리처럼 거대한 부피의 유방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삼두가인이라는 표현· 과연· 한 수 배웠습니다·”
“대단히 실례인 소리를 하고 있는데요·”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불쾌감을 느끼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드물게 청음되는 오두라는 표현을 더욱 더 선호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니 오두는 또 무슨····”
“거대한 질량을 머리에 빗대었다는 사례를 통해 유추해 볼 때 오두란 둔부를 개중 볼기 한 짝을 말한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랑랑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화검의 볼기짝은 머리의 부피보다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아씨 뭐 이딴 년이 다 있어·”
그러다가 청이 문득 고개를 갸웃·
아주 먼지가 나도록 팍팍 큰 소리로 처맞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되게 멀쩡하지 않나?
“그런데 괜찮아요? 아픈 데 없어요?”
“생명 유지에 지장이 있거나 신체적 장애 여부 혹은 거동의 불편을 물으신다면 랑랑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심합니다·”
음· 뭔가 되게 이상한 사람이네·
일단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이 제 이름인 부분에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소저? 일어날 수 있겠어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 랑랑은 일각 아니 이각 정도 더 누워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 네· 그럼 그러세요·”
청이 떫은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는 무표정하니 누운 채로 동작은 또 쓸데없이 척척 절도 있게 바닥을 기는 랑랑(아마도)이라는 소저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기어가나 했더니 손을 척 뻗어서 와장창 엎어진 비둘기 구이를 쥐어 품으로 당겨놓고는 살점을 떼어 오물오물 씹어대는 것이다·
원체 표정이 없어서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점점 턱놀림이 빨라지는 것을 보면 아마도 마음에 든 모양이기는 한 듯·
머리 위에 따라서 누운 서역 숫자가 파란색으로 숫자 일 옆으로 누워서 중원 숫자로 한 일 자를 그린다·
선업 단 일 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요리 챙겨먹을 정신이 있는 것을 보니 멀쩡하기는 한 모양이라고·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