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3
중원 역시 현대와 같은 사회 현상을 가지고 있었으니 개천에서 용 나기가 힘든 것이다·
후기지수란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청년 고수들을 말했다·
그런데 청년 고수는 전부 명문대파 아니면 거대세가의 출신이었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통해 혈맥을 다듬고 영약을 이유식으로 처먹으며 걸음마를 떼면서 무기를 잡는 집중 투자형 성장 체계의 덕이 크기는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장애물은 그런 명문 출신이 아닌 청년고수가 나타나도 제대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만약 청이라는 신진 고수가 식인마군을 참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하면 사람들은 일단 믿지 않는다·
혼자 싸우진 않았겠지·
장강수로채에도 고수가 있는데 혼자 싸우도록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여럿이 합공하다 운 좋게 마무리를 했을 것이 아니냐·
식인마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화염마공을 익혔다던데 그 저주받을 악독한 마공의 마성이 뇌에 들어서 제대로 된 판단이나 할 수 있는 상태였을까·
뭐 게다가 계집이라고?
수로채 고수들한테 몸이라도 바치고 명성을 사려 한 모양이지· 크크크·
대충 이런 식이었다·
물론 실제로 청의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수로채주 복하운은 강호의 노선배였고 이런 무림의 특성을 이미 잘 알았다·
은인을 위해서라도 소문이 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흔적을 지우고 식구들의 입을 단속한 덕분이었다·
물론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나가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정작 수로채의 묵직한 이들이 침묵하고 있어 헛소문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청이 아닌 명문의 자제가 식인마군을 무찔렀다는 소문이 돌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남궁신재가 식인마군을 무찔렀다는 소문이 돈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게 된다·
역시 남궁세가! 믿고 있었다고!
이것이 바로 역사와 전통의 힘!
남궁 대인께 축하의 술이라도 보내야겠어!
정파 무림의 미래가 정말로 밝구나!
그 검에 미친 새끼가 사고 칠 줄 알았다고!
이러하니 개천에서 용이 나와도 무명의 청년 고수가 세상에 이름 알리기가 막막하고 힘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조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모든 장소와 시간을 통틀어 권력자들은 항상 사다리를 걷어차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대문파와 거대 세가가 지배하는 정도 무림의 세상을 계속해서 존속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상황이니 후기지수들이 친분을 쌓는 상대란 결국 같은 후기지수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후기지수들이 제 마당에서는 우쭈쭈 온갖 사랑을 받으면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자랐다·
결국 청년 고수들은 무림 상류층의 삶 속에서 무엇이든 긍정 받았다·
사람‘만’ 좋은 이상한 놈이 탄생하기 딱 맞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소형제 팽 소형제· 저기 저 소저분 말일세·”
취면복마검 창빈·
술 처먹고 취한 상태에서 민가를 습격하던 도적떼를 혼자서 쓸어버린 후에 세상이 붙여준 별호였다·
화산파 최대의 기대주이며 창자 배 항렬의 대사형이기도 했다·
“아니 소형제 저기 소저를 좀 보라니깐?”
“하아· 또 뭡니까?”
팽대산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창빈이 은근하게 말했다·
“저기 파격적인 홍색 궁장을 입으신 소저 왼쪽으로 세 번째에 자리를 잡으신 소저 말일세· 참으로 아리땁지 아니하신가?”
“마음에 드시면 가서 말이나 걸어보시죠·”
“에이 꽃이 보러 온 햇님이 따로 있는데 본 말코가 말을 건다고 듣기나 하겠는가?”
후기지수라는 놈들이 왜 다 이따위 놈들이지·
팽대산이 한껏 싫은 티를 냈다·
“일 없습니다·”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러긴가? 혼자서 적적히 술을 마시려니 내 외로워서 그러네· 외로워서·”
“그럼 저는 사람 아니고 무슨 동상입니까?”
“하하 사내놈을 내가 사람으로 쳐야겠는가·”
팽대산이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딴 놈이 잠룡지회의 큰형님이라니·
정파무림의 앞날이 매우 어두웠다·
참고로 잠룡지회는 정파 출신 후기지수 모임의 이름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유서깊은 친목회기도 했다·
“창빈 형· 그냥 드시던 술이나 계속 처드시면 안되겠습니까?”
“아이쿠! 팔 떨어지겠네· 이보게 소형제· 본래 술이란! 주도란 말일세·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하여 그 흥취가 깊고 맛이 사는 법일세·”
“또 그딴 개소리를 하십니까?”
“아아· 여인하고 같이 술 먹고 싶다!”
팽대산이 또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룡지회의 많은 후기지수 중에 제일 싫은 놈을 꼽으라면 단연 이놈을 꼽을 수 있었다·
사람은 좋은 사람인데 깨어있는 내내 입에다 술을 물고 살면서 하는 소리가 이랬다·
사람이라도 좋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즉 대판 싸우고 절연을 선언했을 것이다·
게다가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정작-
“오오 소형제! 저기 좀 보세나!”
창빈의 호들갑이 팽대산의 생각을 끊었다·
그래봐야 또 미인이 어쩌구 할 것이다·
팽대산의 표정이 찌그러진 채로 펴지지를 못했다·
“아니 보라니깐· 저기 남궁 동생이 온다네·”
“···환장하겠군· 진짜·”
남궁 동생이라고 할 사람이라면 소검왕 남궁신재를 말하는 것일 터다·
그리고 남궁신재는 잠룡지회에서 제일 이상한 놈이었다·
제일 싫은 놈도 버거운 판에 제일 이상한 놈의 등장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때에 쓰는 말이었다·
“음? 남궁 동생에게 여인이 생인 모양인데? 검치답게 여인도 검을 찬 여인만 여인으로 치는 모양이야· 이크 이리로 오는군·”
팽대산이 짜증을 꾹 눌러 담았다·
그야 그렇겠지·
여기 있는 줄 알테니까·
팽대산이 항상 싫은 놈들을 마주치는 이유다·
여인들의 집요함은 이미 넌덜머리가 난다·
쓰레기 투척과 온갖 기기묘묘한 접촉 시도 그리고 사생활이라곤 없는 무한 관찰 등등·
팽대산이 여인 떼를 혐오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는 언제나 팽대산의 위치가 특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도시에만 들르면 반나절 이내에 옥기린 떴다! 하는 소식이 쫙 퍼졌다·
그러면 여인이 몰렸다·
그러면 지나가는 잠룡지회 회원 혹은 무림맹의 선배님들이 ‘아 또 옥기린이 옥기린 했네’ 하고 곧장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검치가 여인을 끼고 온다고?
이건 팽대산도 좀 궁금하기는 했다·
검치가 여인과 동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잠룡지회에서 이 사람만은 절대 여인과 연이 없을 것 같다는 사람을 뽑으면?
항상 압도적 우승의 자리는 고정이었다·
남궁신재 그 검에 미친 놈은 진짜 검 이외에 아무것도 눈에 차지 않는 놈이었다·
‘검 이외에’ 라는 말은 진짜로 검을 제외한 모든 것을 말했다·
절대 여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팽대산이었지만 검치의 여인은 좀 많이 궁금했다·
팽대산의 고개가 슬그머니 돌아갔다·
단아한 도복을 입은 예쁘장한 소녀다·
이제 겨우 스무 살 쯤 되어 보였다·
복잡하게 땋아올린 머리는 새까맣고 화장기 없는 피부가 희고 눈동자는 크며 입술은 소담했다·
가슴이 너무 큰 탓에 옷 입은 태가 둔한 것이 흠이기는 하나 그래도 그럭저럭 미인 축에는 드는 소녀였다·
그리고 허리에는 검을 찼다·
“검을 차고 있군요?”
“그야 그렇겠지· 검치잖나·”
“그도 그렇군요·”
팽대산이 창빈의 말에 동의했다·
이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창빈 형·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지 않습니까?”
“본 말코는 잘 모르겠네· 낯선 얼굴인데?”
“분명 한 번 본 것 같습니다· 그냥 누구 동생 아닙니까?”
“하긴· 저놈이 여인하고 친하기는 그렇지·”
둘이 수근거리는 사이 남궁신재가 가까이에 다가와 손을 흔들었다·
“팽 아우 보러 왔더니 창빈 형도 계셨군요?”
“그래 잘 지냈나?”
“저야 늘 잘 지내지 않겠습니까· 팽 아우는?”
“저도 잘 지냈습니다만·”
“그래· 잘 지내는 게 최고지· 자· 이쪽은 서문 소저일세· 이래 보여도 대단한 검객이라네·”
아· 역시· 검치가 괜히 검치일라고·
역시· 그럼 그렇지· 검치가 무슨 여인을·
팽대산과 창빈이 눈빛을 통해 긍정했다·
이 역시 아주아주 드문 일이었다·
“안녕하신가요 대협분들· 소녀는 서문 모라고 하는 계집이랍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쟁쟁한 대협분들을 뵈니 참으로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걸요· 혹여 실수하게 되더라도 어여삐 봐주시겠어요?”
소녀가 교태 어린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얼굴은 그럭저럭인데 목소리 하나는 청량하니 일절이었다·
팽대산이 눈을 마주치자 살살 눈웃음을 치며 곧장 꼬리를 흔들었다·
거기에 담긴 호감에 팽대산이 즉시 관심을 잃었다·
“팽대산이오·”
팽대산이 무뚜뚝하게 이름을 밝혔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화산의 창빈이외다·”
의외로 역시 창빈이 단답으로 대답하는 데에 그쳤다·
“아· 옥기린 팽대산 대협이시군요!”
그러면서 활짝 웃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팽대산의 목소리가 한 음정 가라앉았다·
“왜 모르고 왔나?”
팽대산이 쏘아붙였다·
소녀가 곧장 울상을 지었다·
“아···· 소녀가 뭔가 잘못이라도···”
“서문 소저· 팽 아우가 말이오· 원래 다정한 놈이 아니니 그리 낙심하지 않아도 되오· 소저 아니라 무림오화가 앞에 있어도 이런 놈이라·”
남궁신재가 시무룩해진 검우를 달랬다·
그 와중에서도 하는 말이 가관이기는 했다·
너보다 예쁜 여인이 들이대도 마찬가지라는 게 도대체 위로랍시고 할 말이란 말인가!
네 급에서는 턱도 없으니 포기하라는 말이다·
정말로 듣는 여인 기분 나빠질 소리였다·
개소리를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크게 놀랐다·
검우도 여인은 여인이었던 모양·
옥기린 앞에서 조신해지는 품이 신기하기도 하고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기도 했다·
“게다가 이놈은 도를 쓰지· 서문 소저와 같이 빼어난 검객이 굳이 연연할 가치가 없소· 그냥 없는 놈이라 생각하시오·”
팽대산은 오늘 아주 내내 인상 구겨지는 날을 잡았다·
사람 면전에서 저런 소리를 하니 남궁신재가 검치라 불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뭐 아는 형님이 데려온 여인을 더 매몰차게 걷어차기도 예의에 맞지 않았다·
저쪽에서 관심을 끊어준다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
“제가 듣기로 팽 대협께서 여인을 보는 심미안이 빼어나시다고 들었어요·”
“그런 일 없소·”
“그러시지 말구요· 저는 어떠한가요? 팽 대협께서 점수를 매기신다면 소녀는 어떠하세요?”
“하아· 이보시오 소저”
팽대산이 한숨과 함께 조용히 타일렀다·
“나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소· 그러니 정 대화 상대가 필요하시거든 저기 창빈 도장에게나 말을 좀 걸어주시오·”
그 말에 옆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던 창빈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게· 이 말코는 그냥 신경 안 써도 되는 남궁 아우 술 한 잔 따라주게나·”
“아· 이런· 한 잔 받으시죠 형님·”
창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내다·
그리고 창빈은 항상 술자리에 여인이 있어야 그 맛이 더욱 각별한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래서 술자리에 여인이 생기는 순간 오로지 술만 먹었다·
본인 왈 너무 맛있어서 그렇다고·
상승한 술맛을 즐기느라 심지어 말 한마디를 못 하고 처마시기만 하는 위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여인이 생겼으니 이제 창빈의 대사는 다 끝났다고 봐야 했다·
그 사이에 소녀가 계속해서 팽대산에게 치근거렸다·
“그래서 팽 대협? 소녀는 어떠신가요? 혹·”
“그만· 나한테 신경 끄시오· 그나마 남궁 형 얼굴을 보아서 참고 있는 것이오· 굳이 소저에게 모진 말을 하고 싶지는 않소·”
팽대산이 목소리를 깔았다·
슬슬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러자 소녀가 말했다·
“구지 모즌 마를 흐그 습즈는 은쓰·”
팽대산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하여간 무슨 말만 하면 맨날 목소리를 깔아요·”
소녀가 갑자기 껄렁한 태도로 탁자에 팔꿈치를 찍고 턱을 괴며 삐딱하니 기댔다·
“야 산이 여전하네! 그래도 섭섭하다? 겨우 반 년 좀 넘게 못 봤다고 사람 얼굴을 다 까먹고· 우리 산이 헤어질라니까 막 울먹거리던 게 어제 같은데· 아니 좀 울었던가?”
“···설마·”
“왜 얼굴 좀 바꼈다고 못 알아보겠냐?”
팽대산이 경악했다·
청이 그제야 만족스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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